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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92화 (외전 완) (92/92)
  • 외전 4화. 인생은 등급이 전부가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은 어디까지 알려야 하는 것일까? 무엇인가를 감추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와 그런 얘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없이 많은 물음표가 삐죽삐죽 솟아났지만 물음표 사이에서 느낌표가 하나 날개를 치며 높이 날아올랐다.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진실 하나.

    “내게는…… 공자님은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에요.”

    목이 메었다. 돌아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게. 이 어려운 기적이 내게 일어났다는 게 놀랍고 감격스러웠다.

    목선후가 격렬하게 나를 껴안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감격해서 말을 못하는 거였다. 마주 닿은 가슴속에서 두 개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었다.

    ***

    향시 발표 하루 전에 궐향이 수하를 보냈다. 풍월문주이자 내 시아주버님이자 내 생명의 은인인 궐향은 약속을 지키라며 안부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중문 상가 스무 채. 안씨 상가가 비록 상등과 시계와 비누 등으로 돈을 쓸어 담기는 해도 이것은 이 시대 필수품이 아니다. 언제든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행이 될 수 있다.

    반면 안부자의 중문 상가들은 환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끝까지 필요한 물품들을 판다. 아직까지는 생명의 은인이라도 내어 줄 수 없는 가게들이다.

    “문주님이 진심이실까요?”

    내가 아버지와 머리를 맞대고 편지를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나는 친정집 별당으로 오늘 이사 왔다. 출산일이 석 달이나 남았는데 어머니가 안심이 안 된다며 거의 강제로 친정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렇겠지.”

    아버지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에 장난을 치실 분이 아니므로 나는 조금 우울해졌다. 안중이는 실력이 조금 부족하고 안문이는 어려서 실수하기 쉽다.

    대부분 학생들은 수능 시험에서는 평소보다 실력발휘를 못했다. 긴장하기 때문이다. 평소 실력의 90퍼센트 정도면 무난한 편이었다.

    “그럼 어떡해요, 아버지.”

    지난 3년간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이렇다. 내일 되어 봐야 알겠지만 내 감으로는 둘 다 합격하지 못할 것 같았다.

    현대에서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신 뒤로 나는 늘 최악을 상상한다. 그래야 버틸 수 있으니까.

    동생들 중 한 명이라도 합격하면 다행이지만 아닐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달라면 줘야지. 중문 상가보다 더 좋은 걸 얻었지 않느냐?”

    아버지가 말하는 ‘더 좋은 것’은 목선후다. 사위가 장원랑이고 외동딸이 군부인이니 아버지는 부러운 게 없다고 말한다.

    “염려 마라. 중문상가 없어도 안씨 집안은 끄떡 없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버지의 눈썹이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다. 불쌍한 안부자. 잘못하면 늙어서 마누라에게 용돈을 타야 할지도 모른다. 오 여사님의 가게는 아주 잘 나가고 있으니까.

    ***

    궐향은 수하 두 명과 함께 청운각 이 층에 앉아서 일층 단상에서 시를 읽고 있는 어린 유생을 내려다보았다.

    안안중. 십육 세. 이번 향시에 말단으로나마 합격해서 자신을 산에서 내려오게 만든 아이다.

    이제는 자신의 무력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양쪽 다 잘 안다. 하지만 안부자는 내기를 무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애초부터 중문상가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받아도 선후의 혼인 선물로 주려 했지. 흥, 그런데 안부자는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구나.”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궐향이 투덜거렸다. 삼 년 전에 막대한 돈을 써 가며 포섭했던 문파들도 얼마 전에 모두 정리를 했다. 목선후의 신변이 안전함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제 평안하게 풍월문에 전념하려 했는데 덜컥 안씨 집안의 아들 놈 하나가 향시에 합격해 버렸다.

    “실력이 부족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합격했을까? 설마 부정시험?”

    계단을 올라오던 목선후가 궐향의 목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일부러 들리게 말한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나빴다.

    목선후가 궐향의 옆에 앉으며 자신도 부채를 쫙 펴서 눈 아래를 가렸다. 목선후의 뒤에 팽문이 섰다.

    “부정시험은 아닙니다. 처남이 시험을 잘 본 거고 운도 따라준 겁니다.”

    “나는 안씨 집안에서 합격자가 나온다면 셋째일 줄 알았다. 둘째가 합격하다니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궐향이 목선후에게 찻잔을 건넸다. 안씨 집안 셋째는 너무 긴장을 한 탓에 실수를 해서 향시에 합격하지 못했다. 나이를 따지면 이해할 만했다. 소년 수재는 그리 쉽게 나오는 게 아니다.

    “어쩐 일로 왔느냐?”

    “장인어른께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해서요. 여기에 계실 것 같아 왔더니 처남이 와 있네요.”

    “오, 안부자 어르신이 내기를 없던 일로 하자고 했구나? 그렇지? 맞지?”

    궐향이 반색을 하며 부채까지 내리고 무릎을 탁 쳤다. 목선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아니라고?”

    “네. 대신 유예해주시겠답니다. 삼 년 후로요.”

    “대체 뭣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필요 없지 않느냐!”

    분한 심정이 그대로 실린 음성이다.

    “미래는 알 수 없으니 보장이 필요하시답니다.”

    궐향이 목선후의 눈을 노려보았다. 외동딸의 목숨까지 구해주었는데 정말 지독한 안부자다.

    “전하란 말은 그게 전부냐?”

    “네. 그리고 이건 안용을 구해주신 보답으로 드리는 거랍니다.”

    목선후가 중문에 있는 안씨 상가 다섯 채의 집문서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궐향이 곧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자그마치 다섯 채다. 어마어마한 수입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궐향의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시를 낭송하던 안안중이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처남을 마주 보면서 목선후는 배가 불러 청운각에 오지 못한 안안용을 생각했다. 자신이 안안용과 함께 삼 년 전 청운각에 왔을 때 이렇게 될 거라고 말하기는 했어도 그대로 될 줄은 솔직히 몰랐다.

    ‘등급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목선후가 궐향을 만나러 집을 나설 때 안안용이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목선후는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안안용이 알 수 없는 말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안안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가끔 자신을 볼 때 먼 산을 보는 것처럼 아련한 눈빛을 한다.

    하지만 목선후는 이전처럼 불안하지 않았다. 안안용은 아침저녁으로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준다.

    말로 하지 않을 때는 사랑스러운 미소로, 맛있는 음식으로, 갑자기 달려와 가슴팍에 뛰어드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해 준다.

    목선후는 말 대신 그림을 그려 준다. 시를 써 주고 싶지만 안안용이 모르는 글자가 자꾸 들어가서 시는 포기했다.

    목선후의 그림 속에서 미인은 이제 얼굴을 보이며 웃고 있다. 머지않아 여인 옆에는 작은 아이가 나란히 그려질 것이다.

    ***

    나는 딸을 낳았다.

    딸을 낳아서 좋긴 한데 여자는 과거도 못 보고 삼종지도를 따라야 하는 이 시대에 내 딸이 어떻게 살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깨끗이 목욕을 시킨 아기를 강보에 싸서 어머니가 안고 왔다.

    나보다는 아빠를 닮은 작고 완벽한 아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눈에 초점이 없어서 내가 아무리 들여다봐도 등급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내 딸이 등급이 높든 낮든 무슨 상관이냐 싶다.

    무조건 사랑스러운데.

    오 여사님 옆을 안부자가 딱 붙어서 아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람 좋은 얼굴에 홍조가 어리고 뺨은 터질 것처럼 움찔거렸다.

    “으하하하! 잘했다. 안용아.”

    안부자가 너무 크게 웃어서 모두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안부자의 태도는 안용이 태어났을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오 여사님이 말했다.

    “우리 집안에도 드디어 여아가 둘이다. 둘.”

    나는 이제 여아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크지 않았나요?

    “좋아할 일이 아니에요. 첫애만 딸이고 줄줄이 아들이면 어떡해요.”

    오 여사님의 말에 안부자가 웃음을 뚝 그쳤다.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 서 있는 아들 다섯을 돌아보더니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분들의 여아선호사상은 정말 시대를 초월했구나. 아니지, 나 안안용이 너무 예쁜 탓이지. 흐흐.

    “어머니. 저기 저는 아이를 그렇게 많이 낳을 생각은…….”

    무통주사도 없이 생으로 출산하느라고 아파 죽을 뻔했다고요. 우리 시대에는 이렇게 아프게 아기를 낳는 경우는 드물다고요. 그러자 오 여사님이 나를 달랬다.

    “얘, 두 번째부터는 쉽단다. 세 번째는 진통을 시작하자마자 나올 거야. 안국이는 산파가 오기도 전에 나오더라.”

    산파가 오기도 전에?

    내가 할 말을 잃고 파랗게 질리자 옆에 있던 목선후가 얼른 내 손을 잡았다.

    “안용, 괜찮소. 딸 하나면 충분하오.”

    목선후의 말에 이번에는 어머니가 파랗게 질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혹시 딴 데서.”

    “아, 아닙니다. 안용이 원하지 않으면 그렇다는 겁니다.”

    “명심하게. 안용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줘도 이건 안 되네. 대를 끊을 셈인가? 왜 대답을 안 하나?”

    “예, 명심하겠습니다.”

    목선후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했다. 누워 있는 내게는 장난스럽게 깜빡이는 목선후의 아름다운 두 눈이 빤히 보였다.

    일 등급을 감싸고 있는 황금 고리는 신비스럽게 반짝였다.

    언젠가는 저 황금 고리의 비밀도 아는 날이 올 것이다. 모른다 해도 상관없다.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내 옆에 있는 한 나는 언제나 기쁘고 행복할 테니까.

    “자, 안아 보게. 자네 첫아이일세.”

    오 여사님의 손에서 아기를 받아 안는 목선후의 얼굴이 감격에 싸여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봐, 목선후, 낳느라 고생한 건 나니까 너는 키우느라 고생을 해야 할 거야. 우리 평등하게 살자고.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목선후는 딸을 위해서라면 목숨이 열 개라도 아끼지 않을 것 같다. 이건 장인과 사위가 닮았다.

    “얘들아, 너희들도 들어와. 조카를 봐야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섯 명의 안씨 집안 아들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너희들, 비누로 손 씻고 만지는 거니?”

    오 여사님이 아들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기가 보고 싶어 눈이 뒤집힌 동생들이 어머니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아무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는 듯이. 서로 어깨를 밀치는 동생들에게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이 작렬했다. 목선후는 혹시 아기가 다칠까 봐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목선후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팽문은 방 밖에 서 있다가 동생들이 들어오는 틈에 방 안을 슬쩍 건너다보았다. 어수선한 틈으로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팽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순박해 보일 정도로 편한 웃음이었다.

    그의 등급에는 여전히 약간 붉은 기가 섞여 있다. 궐향이나 궐향의 호위들에게서도 이런 색이 보이곤 했으니까 붉은색은 무력이 강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건지도 모른다.

    목선후의 황금 고리도 아마 이와 비슷한 원리가 아닐까 짐작해 보고 있다. 물론, 지금은 태어난 아기에게 내 모든 관심이 쏠렸다.

    나는 목선후가 안고 있는 아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기의 작은 얼굴을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깊고 따뜻한 감정이 명치를 조였다.

    내 아기.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내게로 온 새 생명. 그 경이로움에 숨이 막혔다.

    내 표정을 본 목선후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제 그만. 처남들, 누이가 쉬어야 하네.”

    “벌써요?”

    “난 아직 못 안아 봤는데요?”

    “한 번만 더 만져 보고요.”

    “나가기 싫어. 여기서 아기랑 잘래.”

    안국이까지 항의를 하는 통에 방 안이 중문 상가만큼이나 떠들썩해졌다

    “매형 말씀 못 들었니? 일어나. 누이, 매형. 평안히 쉬십시오. 물러가겠습니다.”

    안신이가 의젓하게 인사를 하더니 동생들뿐아니라 부모님까지 등을 떠밀었다. 오 여사님이 펄쩍 뛰었다.

    “얘, 나는 여기 있을 거야.”

    “장모님, 오시더라도 조금 있다 다시 오세요.”

    목선후의 말에 어머니가 마지못해 일어섰다.

    두런두런 멀어지는 말소리와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털썩 자리에 드러누웠다. 태풍이 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아, 정신이 하나도 없네.”

    “안용, 자도록 해요.”

    내 옆에 아기를 누이며 목선후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래야겠어요. 눈이 감겨요. 우리 애기 더 보고 싶은데.”

    “내가 옆에 있을테니 염려 말고 자요.”

    알아요. 염려 안 할 거예요. 진짜로.

    -끝

    By.[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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