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대비마마, 화이팅
대비마마를 보면 현대의 시어머니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한 아들의 애정을 확인하려는 애타는 몸짓이 말이다.
손자의 인생은 손자더러 살라 하고 할머니는 할머니의 인생을 사세요, 했다가는 곤장을 맞거나 멍석말이를 당하려나?
나는 다시 한번 실룩거리는 뺨에 힘을 빡 주고 야무지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진연군은 오로지 할마마마 걱정뿐이옵니다.”
“할마마마, 얼마나 편찮으시옵니까?”
내 말에 이어 목선후가 그을린 손가락으로 대비마마의 이마를 짚었다.
“어젯밤에 잠시 정신을 놓았느니라. 어의 말로는 기가 허해서라는데 이 나이에 기가 펄펄하면 이상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봐도 펄펄하신데 연약한 척하신다. 북궁에서부터 느꼈지만 대비마마는 유머감각이 풍부하다. 블랙유머로.
“고얀 놈. 이런 일이 있어야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이게 효도냐? 다시 또 나가면 불효죄로 어사더러 탄핵하라 해야겠다.”
자신과 진연군 사이에 어떻게 불효죄가 성립되는지는 생각지 않는 대비마마다. 하루 아프시더니 총명한 3등급이 천진난만한 등급외가 됐다.
“할마마마.”
“그렇게 나가고 싶거들랑 내가 죽고 나면 나가거라.”
대비마마가 쐐기를 박았다. 이제 목선후는 대비마마가 죽기 전에는 환성을 벗어날 수 없다. 환성을 벗어나면 대비마마가 죽길 바라는 꼴이 된다.
대비마마, 화이팅!
“늦었으니 어서 출궁하거라. 안용아, 오늘 고생했구나.”
“조금도 힘들지 않았사옵니다. 할마마마,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오겠사옵니다.”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세요. 제발요. 순두부 안안용은 지금 고추기름을 짜고 있다고요. 내일 아침에는 빨간 순두부탕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먼 길을 온 진연군이 좀 쉬어야 되니 오찬에 오너라.”
손자 덕분에 오는 시간이 늦춰졌다. 옆을 보니 목선후는 더할 수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고생한 티가 역력한 옆얼굴을 보니 편하게 지냈던 내가 조금 미안해졌다.
대비전을 물러나온 시각은 그러고도 한참 후였다. 손자의 얼굴과 손등이 닳도록 어루만진 할머니가 지쳐서야 우리는 대비전을 벗어났다.
궁문을 나올 때까지 나는 목선후의 반걸음 뒤로 조신하게 걸었다. 궁문 밖에는 팽문과 정오와 말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초롱을 들고 빠르게 다가왔다.
대비마마가 들려준 비단 보따리를 정오에게 건네준 후 내가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드디어 우리 둘만 있게 된다. 어두운 밤인데도 괜히 얼굴이 뜨거웠다.
손부채를 부치다가 목선후가 들어오자 얼른 손을 내렸다. 마부석에 있는 등롱 불빛이 희미하게 마차 안으로 흘러 들어와서 더 키가 커지고 어깨가 넓어진 목선후의 그림자를 흔들었다.
난 그를 기다렸지만 심하게 기다리지는 않았어. 난 이 시대 여인들처럼 수동적이 될 거야. 쿨하게 대할 거야. 원래 똑 부러지는 쿨한 여자가 나였어.
혀끝을 씹으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목선후가 마차에 타자 우리는 뜨겁게 키스했다. 소극적이 되겠다는 결심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우리 집 앞에 마차가 섰을 즈음에는 정신을 차렸다.
분명 우리 집인데 친정 식구들이 모두 대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사랑채에는 진욱 왕자님, 즉 호적상 시아버지까지 와서 안부자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왁자지껄 떠들면서 목선후를 반겨 주는 사람들. 말할 수 없이 반가운 표정이다.
둘만 있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사랑과 관심을 저버릴 수 없었다. 현대에서 나는 외딴 섬처럼 외롭고 치열하게 살았으니까.
“빨리 끝내고 가리다.”
목선후가 내 귓가에 소근댔다.
“괜찮아요. 밤은 길어요.”
기다림이 있어서 더 아름답고 소중한 사랑이다. 현대와 고대를 통틀어 하나뿐인 내 사랑의 등을 보면서 나는 깊은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
2년후.
수도인 환성의 과거시험장 앞에는 향시를 치기 위해 모여든 유생과 그 가족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는 안중이와 안문이를 응원하기 위해 나온 우리 가족도 있었다.
“안중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넌 합격할 거야.”
어느새 키가 훌쩍 커서 내가 한참 올려다봐야하는 안중이에게 말했다.
“응. 누이야말로 염려 마. 두 번째잖아.”
대답하는 안중이와 시선이 얽혔다.
팟! 등급이 떴다.
칠 등급.
안중이는 간신히 칠 등급이 됐다. 삼 년 전 나는 향시 커트라인이 육 등급임을 확인했다. 그렇다고 안중이에게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시험은 철저한 상대평가이므로 운이 좋으면 커트라인이 칠 등급까지 내려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중이가 바싹 굳은 얼굴로 초가을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꽤 어른스럽다.
곁에 선 안문이는 이미 오 등급.
내가 굳이 용기를 내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느긋하다. 안문이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이고 처음 시도이니 자신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가족들도 안문이에게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지만 선생들과 나는 안문이야말로 이번 향시에 돌풍을 일으킬 수재임을 알고 있다.
“어서 들어가거라.”
정 선생이 제자들을 재촉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비록 하루 동안 치르는 시험이지만 깍듯하게 인사를 한 아들들을 안부자와 오 여사님이 자랑스러움과 안타까움이 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현대의 수능 시험장 앞에 선 부모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표정이다. 어쩌면 더 간절한 표정이다.
이 시대 과거는 삼 년에 한 번 있는 데다 출세와 신분을 구분 짓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인 집안이라 과거에 그렇게 목매지 않아도 되는데도 열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잘하면 무식한 안씨 집안이라는 타이틀을 벗을 수 있고 귀족사회에 들어갈 수도 있다. 내가 방계 왕족에게 시집왔지만 출가외인이라 친정은 신분상 여전히 평민이다.
“어서 가.”
한이 없을 것 같아 내가 한 마디 했다. 내 말을 듣고 오 여사님이 정신이 난 듯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어서 가라. 어서 가. 너희들이 안 가면 네 누이가 이렇게 계속 서 있게 되잖니. 배도 부른데.”
“아이, 어머니. 전 괜찮아요.”
나도 이제 부끄럽단 말이에요. 나는 작은 수박처럼 봉긋 솟은 치마주름을 손으로 가렸다. 임신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이 상황에서도 안안용만 챙기는 어머니가 부끄럽다.
어머니의 말에 드디어 동생들이 과거시험장으로 들어가고 아쉬운 표정의 가족들만 연이어 들어가는 유생들의 무리를 지켜보며 잠시 더 서 있었다.
“가자, 안용아. 네가 무리했다간 목 서방이 한 소리 할 거다.”
세상 무서운 게 없는 오 여사님에게 안안용 말고도 신경 쓰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생겼다.
목선후다. 어머니의 관심은 안안용 한 사람에게서 안안용의 배 속의 아기와 사위로 분산되었다.
거기다 지방에까지 물건을 대는 비누가게와 상등 가게, 괘종시계점이 어머니의 손길 아래 있다. 손이 열 개, 머리가 다섯 개라도 부족할 판이다.
덕분에 안안용은 오 여사님의 눈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나는 오 여사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제 부두에 나가서 안신이를 배웅해야죠.”
한씨 상단의 범선에 처음으로 승선하는 안신이는 아침 일찍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출항준비를 하느라 부두로 나가 있다.
배에는 한씨 상단의 물건뿐 아니라 안씨 상가의 물건들도 잔뜩 실려 있고 서양문물을 직접 보고 싶은 안신이가 이번 항해에 동행하기로 했다.
오 여사님이 내 손을 잡고 만류했다.
“안신이는 우리가 배웅할 테니 너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오늘따라 바람이 차구나. 고뿔이라도 걸리면 큰일 아니니. 내가 오후에 들를 테니 그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야 된다, 알겠니? 내가 애를 여섯 낳았다. 내 말을 들어.”
“네.”
안부자에게 듣기로 오 여사님은 배가 불러서도 전혀 활동을 자제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를 쉽게 낳았는지도 모른다.
그래놓고는 안안용은 불면 날아가는 깃털처럼 철저하게 보호하는 통에 나는 벌써 산달이 된 느낌이다. 아직 삼 개월 넘게 남았는데.
내가 임신한 뒤로 오 여사님이 바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머니의 재촉에 내가 마차를 탔고 가족들은 그대로 안신이를 배웅하기 위해 부두로 향했다.
***
부드러운 손짓이 내 귀밑머리를 올려주며 뺨을 쓰다듬었다.
“어머니?”
무거운 눈꺼풀을 올리자 목선후의 잘난 얼굴이 삼십 센티쯤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음, 언제 왔어요? 오늘은 일찍 퇴청했네요?”
“내가 일찍 퇴청한 게 아니라 그대가 저녁 내 잠들어 있던 거요.”
“아! 그렇구나. 요새 잠이 많아졌어요.”
목선후의 손에 의지해서 상체를 일으켰다. 목선후는 붉은 관복을 입은 채였다. 얼마 전 승지가 된 목선후는 공식적으로 왕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다.
‘승지에게 너무 많은 일을 맡기는’ 왕 때문에 목선후는 휴일도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오늘은 외출도 했으니 피곤할 거요. 그래도 저녁을 먹고 다시 자는 게 좋겠소.”
“저녁을 먹지 않고 퇴청한 거예요?”
최근 승지와 함께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왕은 저녁식사까지 승지와 먹는 날이 많았다.
또 그런 날은 대비마마가 ‘일을 심각하게 많이 하는’ 왕의 건강을 염려해 특별식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때로는 직접 가지고 오기도 하셨는데, 너무 자비로운 대비마마는 종친이자 승지인 목선후에게도 식사를 같이 하도록 허락했다.
목선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먹었소. 그대가 먹는 걸 봐야지.”
“튀긴 닭고기라면 먹을게요.”
“기름기가 많아서 안 되오.”
에휴, 이 남자는 오 여사님 저리 가라네.
“애를 잘 낳으려면 미끄러운 기름을 많이 먹어야 된대요.”
근거 없는 말이지만 그럴듯하지? 응? 논리적이잖아.
“그거야 한 달에 한 번도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지. 그대는 어제도 매운 닭고기를 먹었잖소.”
현대에서는 하루 세 끼도 먹었거든.
“그대의 건강을 가지고 타협은 없으니 포기하시오.”
“마초.”
“무슨 말이오?”
몰라도 된다고 하면 소외감 느끼니까.
“잘못 말한 거예요.”
배시시 웃는데 목선후의 짙은 눈썹이 올라갔다.
“가끔 그대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뒤 어딘가를 보는 것 같아.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하고. 그럴 때는 그대가 멀리 가 버릴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무겁소. 안용, 대체 무엇을 보는 거요?”
긴 속눈썹이 감싼 검고 푸른 눈동자가 내 진심을 재촉했다. 언젠가는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사람들을 볼 때 무엇이 보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