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도북대문외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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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숲에 숨은 목선후는 도북대문외개탁(북대문을 나가서 열어봄)이라고 쓰인 봉서를 받은 순간을 회상했다.
암행어사가 감찰할 군현은 왕이 추첨으로 뽑은 지역으로 왕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암행어사도 환성의 사대문을 나선 후에야 봉서를 열어 보고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목선후는 지금 환성에서 말로 하루거리의 고을에 와 있다.
관행대로 남루한 옷과 찢어진 삿갓에 노숙을 하면서 두어 달을 보냈더니 신선 같던 목선후의 얼굴도 햇볕에 타고 거칠어졌다.
그래도 그를 수행하는 두 명의 대리(帶吏, 암행어사의 시중을 드는 하급관리)는 목선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아직도 눈 둘 데를 몰라 당황했다.
‘예전보다 더 근사하고 사내다워졌다’고 대리 중 한 사람이 말한 뒤로 목선후는 더 허름한 옷을 입고 삿갓에 구멍도 숭숭 뚫었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꼴이어서 같이 다니는 대리들도 이제는 좀 지나치다고 말할 정도다.
집을 떠날 때는 솜털 같은 버드나무 꽃이 흩날리는 봄이었는데 어느새 뜨거운 한여름이다.
그들이 오늘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 낮에 갈대숲에 숨은 것은 밀매 현장을 덮치기 위해서였다.
나라에서 반출을 금하는 귀한 약재들을 몰래 주변 나라의 상인들에게 파는 일당이 이 고을 수령을 끼고 대낮부터 밀거래를 하고 있었다.
현장을 덮친 후 죄인들을 끌고 관아로 가서 고을수령이 어떤 변명을 하는지 들어 볼 참이었다.
“하필 호부상서 처남이 수령입니다. 호부상서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 이 일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을까요?”
“몰랐으면 상관없고 알았으면 응당 죄를 청해야지요.”
암행어사를 수행하는 두 명의 대리가 목선후에게 각각 의견을 말했다.
“유 대리의 말이 맞다. 호부상서가 알았다면 당연히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목선후의 말에 대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암행어사는 세자라도 잘못했으면 꾸짖을 성정임을 첫눈에 바로 알아챘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대쪽 같은 성품이다.
“역졸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공자님께서는 조금 기다리시지요.”
유 대리가 주위를 둘러보며 속삭였다. 밀매하는 자들의 숫자는 예상보다 많았다. 목숨 내걸고 타국과 밀거래를 하는 자들이 마패를 들이댄다고 순순히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고 오히려 어사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벌써 세 번째 암행어사를 수행하는 노련한 두 사람은 이번 어사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먼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 감찰 지역이 환성을 중심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사심이 흠뻑 묻혀 있다고밖에. 이런 어사가 다치거나 죽거나 하면 자신들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그 순간 이쪽을 유심히 보던 한 놈이 크게 소리쳤다.
“거기 누구냐!”
이런, 들켰구나!
대리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밀매자들을 잡는 것보다 귀한 신분의 암행어사 보호가 먼저였다. 두 사람이 목선후의 양팔을 잡고 갈대숲에서 뛰듯이 일어났다.
“누구냐!”
“잡아라!”
“놓쳐서는 안 돼!”
“겨우 세 놈이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왁자지껄한 고함 소리가 뒤쫓아왔다. 세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역졸들이 당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살이라도 맞으면 큰일이었다.
힐끔 유 대리가 뒤돌아보니 십여 명의 사내들이 무시무시한 병장기를 들고 말처럼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곧 따라잡힐 것 같았다.
“나으리, 어서 가십시오. 저희가 막겠습니다.”
유 대리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무슨 소리냐. 어서 뛰어라. 명령이다.”
목선후의 명령에 할 수 없이 유 대리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따르던 자들은 이 지역에 익숙한지 지름길로만 뒤쫓아 달려오는 바람에 거리를 쉽게 좁혔다. 이 장소에서 자주 밀매가 이루어졌음이 틀림없다.
“나으리!”
정말 큰일인데. 유 대리는 무조건 뜀박질을 멈추었다. 자신은 이 자리에서 뼈를 묻더라도 어사는 살려야 했다.
동료 역시 멈춰서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유 대리는 허리에 감았던 채찍을 풀어 손에 둘둘 감았다. 그의 주 무기는 두 장 길이의 채찍이었다.
하지만 유 대리는 채찍을 든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암행어사가 도망가지 않고 자신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무기도 없이.
“나으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삿갓을 올린 목선후가 유 대리를 보고 싱긋 웃었다.
“염려 말게.”
아우, 이 상황에서 저 미소는 뭐야. 대낮에 예쁜 여우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머리끝이 쭈뼛 일어선 유 대리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유 대리가 이를 악물고 채찍을 바투 잡는 순간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서 밀매업자들의 엉덩이와 다리에 꽂히는 것이 아닌가.
죽이지는 않으려는 듯 정확히 하체만 노려서 날아오는 화살에 사내들은 푹푹 갈대밭 속으로 쓰러졌다. 한 놈도 서 있거나 도망가지 못했다.
유 대리는 멍하니 화살통을 등에 메고 긴 칼을 찬 세 명의 남자가 갈대숲을 여유 있게 헤치며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팽문과 일선, 이선이 이런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듯 조금도 다급하지 않은 얼굴로 다가와서 목선후에게 인사를 했다.
“수고했다.”
거지꼴을 한 목선후가 삿갓을 벗자 팽문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씨가 이런 모습을 못 본 게 다행이지. 한여름 태양 볕에 탄 목선후의 얼굴 위로 땀방울이 하천에 물 흐르듯 시커멓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
밀매업자들을 끌고 관가에 가서 이 고을 수령의 관인과 병부를 압수하는 등 뒤처리를 하는 데 사흘이 걸렸다.
다음 감찰지역으로 떠나려는데 궁에서 파발이 도착했다. 귀환하라는 어명이었다.
어명은 지체할 수가 없으므로 관가에 있던 준마를 타고 하루 종일 달려서 환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몸이 약한 안안용이나 연로한 대비마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파발이 내민 봉서에 이유가 쓰여 있지 않으므로 추측에 추측만 더할 뿐이었다.
환성의 성문을 넘자마자 일선에게 명했다.
“일선아, 너는 집에 가서 아씨께 아무 일 없는지 보고 오너라. 나는 씻고 바로 입궁해야겠다.”
목선후는 아직 암행어사이므로 집에 들를 수가 없었다. 환성의 한 객잔에서 몸을 씻고 팽문이 마련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미 해가 떨어져 궁문이 닫혔으나 그에게는 왕이 직접 하사한 출입증이 있었다.
목선후가 씻을 때 일선은 은신술을 발휘해 집에 다녀오더니 아씨는 이미 입궁했다고 알려왔다. 그렇다면 대비마마 문제구나.
아니나 다를까. 입궁하니 초롱을 든 내관이 그를 대비전으로 바로 인도했다.
등롱이 환한 대비전에 이르자 입구에서 세자빈과 유모에게 안긴 세손이 나오고 있었다. 세손까지 올 정도면 심각한 병인가? 목선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근엄한 아버지와는 달리 손자에게 맹목적으로 애정을 퍼붓던 할머니다. 아직 정정하신 줄 알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암행어사를 한다고 환성을 떠나 있지 않았을 터. 후회가 되었다.
“진연군.”
다가온 세자빈의 얼굴은 초췌했다. 친정의 몰락이 젊은 여인에게서 모든 생기를 빼앗아 버린 것 같았다.
“세자빈 마마.”
목선후가 허리를 굽히자 세자빈이 물끄러미 목선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리도 세자 저하와 닮았을까?
햇볕에 그을려 더 강인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남자는 그녀가 대항하기에는 너무 커 보였다.
내가 여기서 원한을 드러내면 낼수록 내 입지는 좁아질 뿐이야. 어마마마처럼 평생 고립되어 살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행동을 조심해야 해.
“대비마마는 괜찮으십니다. 너무 염려 마세요.”
온화한 세자빈의 태도에 목선후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초롱을 든 시녀들과 함께 세자빈이 지나가자 내관이 다가와 목선후를 재촉했다.
“대비마마께서 여러 번 진연군께서 도착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군부인이 와 있나?”
“예. 아침 일찍 오셔서 지금까지 계십니다.”
그 말에 목선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연약한 안안용이 하루 종일 대비마마의 시중을 들었다면 지금쯤 무너지기 직전일 텐데. 안안용과 대비마마를 동시에 염려하며 대비마마의 침실의 상방에 들어가자 작은 웃음소리가 장지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안안용의 웃음소리다. 그 끝에는 힘이 없는 노인의 웃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진연군께서 드셨습니다.”
내관이 조용히 아뢰고 문을 열었다.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대비 앞에 톱니바퀴를 손에 든 안안용이 앉아 있었다. 곳곳에 커다란 황 촛불이 타고 있어 넓은 방이 환했다.
목선후가 들어서자 안안용이 톱니바퀴를 손에 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웃음기가 남아 있는 안안용의 얼굴을 보자 울컥 그리움이 치밀었다. 겨우 몇 달인데 몇 년 같다. 달려가서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어금니를 물고 조금은 냉정한 표정을 만든 후 대비에게 절을 했다.
“할마마마, 소손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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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맞이해야 옳지만 몸이 선뜻 일어서지지 않았다. 그 결단력 있고 빠릿빠릿한 수능 명강사는 어디 가고 순두부 같은 안안용의 몸만 남아서 손바닥만 한 톱니바퀴 하나도 간신히 들고 있다.
목선후를 보자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나도 몰랐던 반가움에 목이 잠겼다. 무언가 목구멍을 막아서 떨리는 음성이 나올까 봐 입도 열지 않았다.
이 사람을 이렇게 보고 싶어 했구나. 저 반듯한 얼굴과 깊은 눈동자. 모양 좋은 입술과 새까매진 피부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구나. 하지만 목선후는 내게 힐끗 눈길 한 번 주더니 평온한 얼굴로 대비마마에게 절을 했다.
나를 보고도 조금의 동요도 없는 것 같다. 이것 참. 하루 종일 섰다 앉았다 하느라 허리가 아프고 억지 미소로 뺨이 실룩거려도 목선후를 보려고 남아 있었는데.
하지만 목선후와 시선이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 일 등급을 둘러싼 황금고리가 희미한 황 촛불 아래서도 상등에 달린 수정처럼 빛났다. 그는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다. 그가 나를 보고 얼마나 기뻐하는지는 저 황금고리가 말해 주고 있었다.
대비마마는 목선후의 손을 꼭 잡고 끌어당겼다.
“풍찬노숙이 할 만하더냐?”
“네, 할마마마.”
“이 할미가 걱정되지는 않고?”
“걱정했사옵니다.”
대비마마가 나를 곁눈질하더니 입술을 삐뚜름히 내밀었다. 세상에, 대비마마가 입을 삐죽이다니! 처음 만났을 때의 무시무시한 근엄함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아내를 걱정한 것이겠지. 안 그러냐? 안용아.”
하하, 이런 답정너 할머니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