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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88화 (완결) (88/92)

88화. 질투

그날 저녁.

전시를 보고 온 목선후는 내가 내놓은 옷고름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괜한 짓을 했나 싶어 옷고름을 다시 접는데 목선후가 내 손을 잡았다.

“내가 가지고 있겠소.”

옷고름을 간직함으로써 나에 대한 권리를 확인하려는 건가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현대 여자인 나는 옷고름을 찾아서 소중하게 건네준 세자도 어이없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소유욕을 드러내는 목선후도 우습다.

하지만 지금 웃으면 목선후가 정말로 화를 낼 것 같아 짐짓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 저하도 어전시에 나오시나요?”

저녁을 먹으며 물었다.

“아마도.”

무뚝뚝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입매가 단단하다. 이렇게 은근하게 화를 내는 목선후를 본 적이 없다. 뭔가 이질적이다. 잘못도 안 했는데 그냥 당할 내가 아니다. 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무얼 말이오?”

밑도 끝도 없이 툭 던지자 목선후가 비로소 나를 쳐다보았다. 일 등급을 감싼 황금 고리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난다.

“중문 위에서 뛰어내려도 형님이 받아줄 거라는 거. 미리 알고 있었죠? 나를 위해서 뛰어내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죠? 내 그럴 줄 알았어. 결국 나만 뛰어내렸잖아. 누군가 받아준다는 생각 하나도 못 한 나만.”

말하다 보니 슬슬 열이 치받쳤다. 따지자면 한이 없거늘 옷고름 하나에 꼬장을 부린다 이거지.

화가 난 내가 몸을 반쯤 돌리자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안용, 내가 잘못했소. 나를 좀 보시오.”

“뭘 잘못했는데요?”

등 뒤로 물었다.

“흠, 으흠, 흠.”

헛기침만 하며 우물쭈물하는 목선후는 처음이다. 재미있다.

“모르는군요?”

“지, 질투했소.”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홍시처럼 붉은 얼굴로 목선후가 미소 짓고 있었다. 줏대도 없이 따라 웃고 싶어졌다. 안 돼, 안안용. 아직 한 가지 더 남았어.

“중문에서는요?”

“그대를 위해 죽는데 목숨이 하나임을 한탄했다오.”

말이나 못 하면.

“정말이죠?”

“맹세하오.”

“용서해 줄게요.”

“벌써?”

너무 쉽게 용서해 주니까 영혼 없는 용서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원래 쿨한 여자다. 배신한 전남친도 깔끔하게 헤어져 줬는데 사랑하는 남편을 용서 못 할 이유가 없다.

“그대는 너무 착해서 탈이오.”

내 인생에서 착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열심히 산다, 족집게다, 가르치는 데 신들렸다, 는 말은 들어봤어도 착하다는 말은 현대에서든 여기서든 못 들어봤다. 착한 건 무능한 거라고 되뇌며 미친 듯이 일했으니까.

하지만 목선후의 입에서 나오는 착하다는 말은 듣기 좋았다. 그가 착함과 무능함을 혼동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옷고름은 못 주오.”

숟가락을 든 목선후가 마지막 멘트를 날렸다. 이 남자 뒤끝 길다.

***

나는 민아와 시계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 한씨 상단이 가져온 커다란 괘종시계의 원리를 가르쳐 주자 민아와 안씨 철방은 똑같은 부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톱니바퀴가 만들어지는 게 신기했다.

이 나라 최초의 회중시계를 만들어 목선후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 시계를 작게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맞다. 작을수록 고도의 기술이 집약되어야만 하는 물건이 있다.

괘종시계를 만들고도 꽤 시일이 흘러야 손바닥만 한 회중시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고대판 장영실인 민아의 이름을 따서 민스 클락이라는 이름을 붙여줄까 한다.

나와 민아가 세자에게 약속했던 민스 클락을 만드는 동안 예상대로 전시 일 등은 목선후가 차지했다. 전시 합격자 열 명은 설을 이틀 남겨두고 어전시를 치게 됐다.

그 열 명의 수험생들 가족은 어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연회장에서 기다린다.

이미 증광시의 아이콘으로 목선후가 떠올라 있었다. 연이어 일 등을 한 데다가 굳이 과거를 보지 않아도 되는 왕족이라는 소문까지 더해져 도성은 새로운 학자의 탄생에 환호했다.

답안이 너무 탁월해서 부정시험이라는 말을 꺼내는 어사는 없다고 했다.

안부자와 오 여사님을 모시고 입궁했다. 오늘 같은 날 괘종시계를 만들어왔으면 좋았을 텐데 앞으로 한 달은 더 있어야 완정할 수 있다고 했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안씨 상가에서 납품한 상등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정 조각이 흩뿌리는 빛을 올려다본 사람들은 체면도 있고 턱을 든 채 상등의 매력에 푹 빠졌다.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진 어머니가 내 귀에 속삭였다.

“얘, 나는 언젠가 네가 큰일 할 줄 알았다.”

안안용을 공주님처럼 키우며 그 흔한 바느질도 안 가르친 오 여사님의 뿌듯한 얼굴을 보고 웃을 수밖에.

내 영어 학원이 작고 유명한 강사가 없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깔보던 학부형들은 몇 달 지나지 않아 자신이 한 말을 까맣게 잊은 척했다. 그러고는 내 학원을 선택한 자신의 눈썰미와 노력한 자기 자식 자랑만 했다.

사람은 누구나 개구리가 되면 올챙이 시절을 잊는다. 오 여사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어머니, 더 대단한 것도 보여 드릴게요.”

내 대답에 자리에 앉던 어머니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는 동안 수험생들의 가족이 관리들과 함께 연이어 들어왔다.

정해진 자리에 앉은 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쪽을 곁눈질했다. 전시 장원의 가족들이 궁금한 거다. 게다가 초대된 가족들 중에서 평민은 우리 집뿐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풍채 좋은 안부자와 수선화처럼 가냘픈 나, 안안용을 지나쳐 조금 화려한 오 여사님에게 머물렀다.

내가 궁에서 지나치게 눈에 띄는 옷은 좋지 않다고 해서 오 여사님이 많이 양보했다. 그런데도 보통 여인들 옷보다는 화려한 편이라 신분과 체면을 따지는 귀족들의 눈에 띈 것이다. 오 여사님이 처음에 고른 옷은 한복 패션쇼 런웨이에 설 만한 옷이었다.

막상 시선이 쏠리자 오 여사님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내가 당당하게 그들을 마주 바라봐줬다.

내 당돌한 시선을 눈치챈 사람들이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건 참아도 우리 오 여사님 기죽는 건 못 참지.

“어머니, 오늘은 사위 때문에 이 자리에 왔지만 언젠가는 아들 때문에 올 거예요. 두고 보세요.”

“그런 날이 정말 올까?”

“장담해요. 그러니 기죽지 마세요.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건데 우리는 구첩반상을 먹잖아요.”

왕의 반찬이 십이첩반상이다. 왕 다음으로 잘 먹는 집이 우리 집이다. 굉장히 현실적인 위안을 하자 비로소 오 여사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시험을 끝낸 왕과 수험생들이 입장했다. 왕의 바로 뒤에 약간 상기된 표정의 목선후가 반듯하게 걸어 들어왔다.

너무 닮은 두 사람을 보자 가슴이 퉁퉁 뛰었지만 왕족이니 닮은 거지, 라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고 안심했다. 이런 데서는 이해력이 좋은 고대인들이다.

“장원은 가까이 오라.”

자리에 앉은 왕이 목선후를 불러 바로 밑 자리에 앉혔다. 반대편 자리에는 세자가 앉아서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왕은 2, 3등은 어사주를 내리는 것으로 대충 끝내고 시종일관 장원하고만 놀았다. 그 모습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장원을 한 목선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치, 일 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은 시대를 초월한다.

간혹 내 쪽을 돌아보는 목선후의 눈빛이 말했다. 어서 끝나고 우리 둘만 있고 싶다고.

목선후의 시선이 조금만 비껴도 왕이 목선후를 불러댔다. 세자를 옆에 두고 꼭 저렇게 티를 내셔야 하나? 세자가 내 쪽을 보지 않아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비마마 납시오오.”

내관이 길게 외쳤다.

“아니, 대비마마께서?”

“웬일이시지?”

웅성거리는 관리들 사이로 궁장과 보석으로 찬란하게 꾸민 대비마마가 연회장으로 거침없이 들어섰다. 왕비도 나오지 않은 어전시의 연회 자리에 대비마마가 나오는 게 파격인 듯. 모두 황망하게 일어서서 허리를 굽혔다.

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려 힐끔 쳐다보니 대비마마가 목선후 쪽을 보고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대비마마 뒤로는 시녀들이 쟁반에 황금과 보석을 들고 뒤따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대비마마, 설마 그걸 모두 목선후에게 내리시는 건 아니죠?’

다행히 대비마마의 보석은 장원랑을 잘 내조한 상으로 내게로 거의 다 왔다.

흐흐. 대비마마의 편애가 너무 좋다.

당분간 전하와 대비마마의 이러한 편애는 나와 목선후에게만 집중될 것이다.

뭐, 괜찮다. 이제 목선후의 신분은 안정되었고 장진한은 죽었다.

느릿한 궁중 음악이 흐르고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왕과 대비의 흡족한 얼굴 때문에 대신들도 편안히 연회를 즐겼다.

나는 안부자와 오 여사님 사이에 앉아 홍조를 띤 목선후의 얼굴을 멀리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목선후가 저기에 있으니 모든 것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코마 상태에서 깨어난 김인수는 재활 훈련을 무사히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친구인 재활병원 원장이 이제부터 통원치료를 하면 된다고 말했을 때, 닥터 조는 울음을 터트렸다. 김 원장도 눈시울이 빨개지며 아내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슬슬 대입준비도 해야지?”

친구 의사의 말에 김 원장과 닥터 조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회복되기만 해.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엄마는 더 바랄 게 없어.”

김인수는 자신의 손을 움켜쥔 닥터 조의 가는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이런 손가락을 여기가 아닌 어느 먼 곳에서 본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기억의 한 조각은 때때로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찔렀다.

천천히 기억해 내자, 고 엄마는 위로해 주었지만 어쩌면 평생 이 아픔은 남아 있을 거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인수야, 원장님께 인사하고 가자.”

“네.”

닥터 조의 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인수는 아버지의 친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수야, 재활도 네 의지에 달렸다는 거 알지?”

“내 아들한테 푸시하지 말라니까. 이 정도도 잘하는 거야.”

김 원장이 손사래를 치며 친구를 막았다.

이 정도도 잘하는 거라고?

인수는 아버지의 변화가 새삼스러워 눈을 끔뻑거렸다. 부모님이 변했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런 순간이 오면 새삼 놀란다.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장실을 나오는 인수를 서로 부축하려고 부부사이에 잠시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인수는 공평하게 한 손씩 내밀었다. 김 원장과 닥터 조는 아들의 손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인 양 정성스럽게 움켜잡았다.

-본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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