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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87화 (87/92)
  • 87화. 옷고름 한 짝

    “양갓집 규수가 밖을 내다보는 거 아니다. 게다가 너는 이제 왕족이야.”

    “아씨가 군부인이라니 믿기지 않아요.”

    어머니의 말에 맞은편에 앉은 민아가 얼어붙은 작은 얼굴로 말했다. 민아의 등급은 예전과 똑같다. 워낙 높은 수준이라 변화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저, 아씨.”

    “왜?”

    “제가 철방 아저씨들이랑 서양식 시계를 만들어 보려고요. 그 이빨처럼 뾰족한 것들이 빙글빙글 도는 거요. 한씨 상단에서 하나 사 주시면 뜯어 보고 똑같이 만들어 볼게요.”

    “이빨처럼 뾰족한 것은 톱니바퀴야.”

    며칠 전 돌아온 한씨 상단의 배에 커다란 괘종시계가 몇 개 실려 있었다. 현대에서 작은 벽시계나 디지털 시계에 익숙했던 나는 할머니 시대의 유물 같은 괘종시계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는 작은 손목시계를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건전지가 아닌 태엽으로 감는 손목시계나 회중시계 말이다. 한편으로는 시계의 보급이 이 시대의 생활상을 어떻게 바꿀지 염려가 되기도 했다.

    “왕실에 납품할 거라 하나를 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내 말에 어머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원하는데 인수가 거절할 수 있겠니? 그러면 안 되지.”

    안안용이 원하는 것은 왕도 양보해야 된다는 논리를 펴는 오 여사님. 귀여운 내로남불 되시겠다.

    “구해 줄게.”

    내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나는 목선후의 시험준비 때문에 그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작 본인은 말짱한데 나는 불안했다. 누구나 장원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못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친아버지인 왕이나 양아버지 어사중승은 공정한 성품이라 아들의 답안을 까다롭게 채점할 것이다. 답안은 공개가 되므로 왕실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목선후의 편을 들지 않을 터.

    “안용아, 목 서방은 걱정 말라는데도. 첫 시험에 이렇게 긴장하면 어떡하니? 너는 몸이 약하니 다음에는 나오지 마라.”

    신랑이 시험을 보러오는데 배웅을 하지 말라고? 매년 치러지는 공무원 시험도 아니고 삼 년에 한 번 치러지는 과거시험인데?

    “…….”

    “대답 안 하니? 이 어미 숨넘어가게 할래?”

    “네. 그럴게요.”

    내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는 어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집에 돌아와 저녁에 목선후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도 못 하고 침상에 누워 있었다.

    증광시는 열흘 간격으로 세 번 열렸다. 첫 번째 시험인 향시에서 목선후는 1등으로 합격했고 예상대로 문중이는 떨어졌다. 목선후나 문중이의 결과를 예상했던 가족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문중이는 나이도 어리고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본인이나 가족들이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정말 승부를 보는 날은 2년 후다.

    안중이에 대한 아쉬움을 목선후에 대한 기대로 바꾼 가족들은 이제 목선후의 시험 일정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시험인 전시가 열리던 날.

    세자가 미복을 하고 내가 쉬고 있던 안씨 집 별당으로 찾아왔다.

    ***

    별당의 상방. 문간에는 정오와 말순이 앉고 세자와 안안용은 가운데 찻상을 놓고 마주 앉았다. 서로 허리를 굽혀 말없이 인사를 한 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하, 보내주신 귀한 약재 감사합니다.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세자가 약을 들고 직접 왔다는 말을 들었다.

    우습게도 세자와 목선후의 첫 대화도 안안용이 누워 있는 별당의 상방에서였다. 형제간의 대화는 안안용의 중병 때문에 쉽게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 당시 목선후에게 안안용의 생명보다 중한 것은 없었다. 세자는 연약한 여인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신을 보통 사람처럼 대우하던 여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왕실의 일원이 되기 싫어 모욕을 겪으면서도 조용한 인생을 꿈꾸었던 목선후는 안안용 때문에 인생의 키를 돌렸다.

    당당하게 왕실의 일원이 되어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결심 안에는 안안용이 누구에게도 무시를 당하지 않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 컸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을 바꾼 여인이 죽음의 강을 앞에 두고 있다.

    눈앞의 세자든, 옥좌의 부왕이든 그 어떤 것도 그 순간 목선후에게 안안용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안안용의 상태를 묻고 답했다. 그러다가 동경을 보듯 자신과 꼭 닮은 상대방의 얼굴에 시선이 닿으면 화들짝 놀라 서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대화는 끊어졌고 눈치만 보다 헤어졌다.

    안안용이 알기로 그 뒤로는 만난 적이 없다. 전시에 합격에서 상위 열 명에 든다면 어전시가 열리는 왕궁에서 두 사람은 다시 보게 된다.

    상방 문밖에 안부자와 오 여사의 그림자가 비쳤다. 겨울 한낮의 햇빛이 만든 그림자였다. 세자가 갑자기 방문했음을 들은 모양이었다.

    안안용의 시선을 따라 문에 비친 그림자를 확인한 세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날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네.”

    말할 게 있기나 한가? 이봐, 세자. 그렇게 말하니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잖아.

    “뛰어내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바로 뒤따라 뛰어내리셨죠.”

    “무섭지…… 않았습니까?”

    안안용은 피식 웃음이 터지려다 입술을 꾹 물었다. 세자 앞에서 비웃음을 흘리다니 군기가 빠졌다.

    “정말 무서웠어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그런 경우 보통의 여인들은 눈감고 주저앉지요. 그런 이상한 모습으로 뛰어내리지 않고.”

    두 팔을 높이 들고 뾰족하게 만든 다음 뛰어내리는 모양이 낯설었던지 세자가 이상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래야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거든요. 머리도 보호하고요.”

    “물의 저항?”

    이 시대는 이런 표현을 안 쓰는구나. 안안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설명 했다.

    “물과 부딪칠 때 충격을 말하는 거랍니다. 그게 은근 세거든요.”

    “그대는 정말 특이한 사람이군요. 그런 생각을 하는 여인이 있다니 놀랍습니다.”

    안안용이 남편과 쌍둥이처럼 닮은 세자의 얼굴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여인도 생각을 한답니다. 아주 아주 많이요. 단지 말할 수 없을 뿐이지요.”

    이 시대는.

    “맞습니다. 상등과 비누도 만드셨지요.”

    “지금은 시계를 만들어 볼까 한답니다. 시간을 알려 주는 기계랍니다.”

    세자는 시계나 기계라는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에 호기심이 불일 듯 일어났지만 꾸욱 가슴 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오래 이야기할 사이는 아니었다.

    “무엇을 만들든 제게도 하나 주십시오.”

    “예, 저하.”

    첫 고객 확보. 그것도 가격표를 보지 않는 VVIP다. 상등과 비누에 이어 괘종시계로 대박 나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환히 떠오르는 안안용의 미소에 세자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일어서던 세자가 조금 주저하더니 소매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곱게 접은 옷고름 한 짝.

    폭포에 떨어지면서 안안용이 잊어버린 것. 확, 안안용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한 나라의 세자가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안안용의 표정을 읽은 세자가 변명했다.

    “흠, 흠. 일부러 찾은 것은 아닙니다. 익위사가 후처리를 하는 중에 발견해서.”

    시선을 비낀 세자가 이렇게 입속으로 중얼거리더니 안안용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방을 나가 버렸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황급히 문을 열었다. 세자의 잿빛 도포자락이 문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안안용은 어안이 벙벙한 채 쳐다보았다.

    “아씨, 세자 저하를 배웅하시겠어요? 소인들이 부축할까요?”

    “아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안안용이 세자의 뒷모습에 절을 하던 정오와 말순이 다가오기 전에 잽싸게 옷고름을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에휴, 누가 보면 딱 오해 각이네.

    문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안부자와 오 여사가 후다닥 마루 밑으로 내려가 방문을 열고 나오는 세자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딸은 왕족의 일원이 되었지만 자신들은 여전히 평민이므로 세자가 지나가기까지 고개를 들지 않아야 했다. 그런 법도를 무시한 두 사람은 곧 허리를 펴고 사위와 닮은 세자를 넉살 좋게 바라보았다.

    세자가 상등을 주문할 때부터 세자와 안씨 집안은 묘한 친밀감이 있었다.

    몇 걸음 떨어져 세자를 기다리던 세자 익위사가 다가오며 안부자 부부를 힐끔거렸다.

    “저하, 어서 가시지요.”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안안용이 있는 방문을 돌아보았다. 세월이 흘러 편안해지면 그때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쉽게 올 수도 있고 아예 안 올 수도 있다. 그녀를 다시 못 본다 해도 함께 폭포에서 뛰어내린 경험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고 세자는 생각했다.

    ***

    첫시험에는 온 가족이 갔고 두 번째 시험에는 안씨 학당의 선생과 학생들만 시험장 입구로 목선후를 배웅했다. 목선후에게는 미안하지만 배웅에도 내성이 생기는지 관심이 시들해진 건 사실이다.

    오늘 본 전시의 발표는 칠일 후.

    전시 합격 발표 후 겨우 사흘 만에 어전시가 열린다. 증광시이기 때문에 간격이 짧은 편이다. 거의 한 달 동안 목선후는 긴장을 풀지 못한다.

    목선후는 평소 무술을 연습한 덕에 책상 앞에 앉아 있기만 하는 보통의 유생들보다 견디기가 쉽다고 했지만 없던 다크서클이 생겼다.

    어전시는 아버지와 아들이 왕과 신하로서 만나는 날. 그날에는 내 가족과 진욱 왕자 가족이 초청되어 어전시가 끝나자마자 진행되는 연회에 참석한다.

    아버지는 목씨 집안이 빠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나 역시 아쉬웠다. 그래서 장원이 된 후에 우리 집에서 미뤘던 잔치를 열기로 했다.

    오 여사님은 어전시에 입고 갈 옷을 만드느라 부산스럽다.

    입고 갈 옷은 한 벌인데 왜 열 벌을 만드는 건지. 색색의 비단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섬 같은 어머니의 머리 위에서 아버지와 내 시선이 얽혔다. 아버지의 눈가에 주름이 졌다. 웃는 거다. 입은 그대로인데 눈이 웃고 있다.

    오 여사님에게 쩔쩔매는 안부자보다 저렇게 티나지 않게 지지하는 안부자가 더 멋있다. 일부다처제인 사회에서 거부인 안부자가 조강지처 외에 첩을 두지 않는데는 저런 깊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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