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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86화 (86/92)
  • 86화. 수능 명강사 고대에도 통할까?

    미쳤다.

    안안문, 너 천재였구나.

    일 년 만에 안문이는 등급외에서 7등급이 되어 있었다. 할 말을 잃은 내가 입을 떡 벌리자 어머니가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쓸며 물었다.

    “왜 그러니? 우리 딸, 안색이 너무 안 좋구나. 안문이 때문에 속상해서 그러니? 안문이는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하마.”

    어머니가 두리번거리더니 중문 앞에 서 있는 정오와 말순을 손짓으로 불렀다.

    어머니의 손짓에 정오와 말순이 다가왔다.

    “아씨를 모셔라.”

    “어머니.”

    너무 놀라면 이렇게 멍해지나 보다.

    “왜? 걸을 힘도 없니? 안중이더러 업어 달랠까?”

    “아니에요.”

    정신을 차리자. 증광시까지는 한 달도 안 남았다. 약식이긴 해도 세 번의 시험이 차례대로 엄격하게 치러진다고 들었다. 안문이가 육 등급은 아니지만 이제 겨우 열한 살이다. 이번 임시 과거시험에는 떨어진다고 해도 2년 후 향시에는 합격하고도 남을 실력이다.

    “선, 선생님.”

    정 선생을 쳐다보았다. 뜨거운 내 눈빛에 정 선생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변의 눈치만 봤다.

    내 학원에서 기대 이상으로 성적이 좋아지면 어떤 학부형들은 즉시 더 크고 비싼 학원으로 아이를 빼 갔다. 그래선 안 된다. 이 성적은 학생과 선생이 함께 만들었다. 선생을 바꾼다고 이보다 더 좋아지란 법이 없다.

    “선생님을 믿어요. 안문이는 전적으로 선생님께 맡깁니다.”

    내가 허리를 깊이 굽히며 안문이의 정수리도 같이 눌렀다. 영문을 모른 채 안문이가 허리를 굽혔다.

    “아씨, 이러지 마십시오.”

    “너 왜 이러니?”

    정 공자와 어머니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말렸다. 영문을 모르니 내 행동이 이상한가 보다.

    안문이도 잘했지만 안문이의 천재성을 깨운 정 공자야말로 천재다. 헬렌 켈러가 설리반 선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겠는가? 정 공자를 만나기 전까지 안씨 집안 다섯 아들은 모두 등급외였다.

    안신이가 몇 달 만에 구 등급이 됐을 때 나는 안신이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다. 정 공자 덕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내 실수다.

    현대에서 학부형들이 했던 실수를 나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늦게라도 알았으니 정 공자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야겠다.

    “어머니, 선생님께 맡기고 우린 가요. 안문이나 민아도 선생님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그, 그래?”

    나에게 팔꿈치를 잡힌 어머니가 어깨너머로 정 공자와 안문이를 뒤돌아보며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쏘았다.

    중문을 나서는 우리 앞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정 공자를 막내 안국이가 과거에 합격할 때까지 우리 집에 묶어 둘 수 있을지를 생각하느라 어머니의 야릇한 표정을 보지 못했다.

    안채에 돌아와 방에 앉자 어머니가 하녀들을 내보냈다.

    “안용아, 너, 혹시?”

    “네?”

    “혹시 정 공자를?”

    그다음 말은 오여사님도 하기 어려운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욧!”

    “왜? 장미꽃만 보다가 가끔 할미꽃도 보고 싶을 수 있잖니?”

    나 지금 고대에 와 있는 거 맞아? 오 여사님도 혹시 나처럼 현대의 여자가 빙의한 거 아닐까?

    “어머니, 진심은 아니시죠?”

    “호호호! 아니지, 아니고말고.”

    오 여사님, 그 과장된 웃음이 오히려 진심 같아요. 뻘쭘해진 어머니가 새로 만든 브랜뉴 비누를 감독한다며 중문 상가로 나가고 나도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안문이의 등급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식한 안씨 집안이라고?

    기다려. 깜짝 놀라게 해 줄 테니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목선후가 공부하고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늦가을 황혼의 붉은 빛이 목선후의 곧은 콧날 위에 내려앉았고 찌푸린 이마에는 가느다란 세로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지곤 했다. 책에 집중하느라 내가 온 지도 모른다.

    혼자인데도 반듯한 자세와 단정한 태도를 흩트리지 않는다. 왕족이 된 후로 목선후는 외출 시에는 황금 동곳에 황금 비녀를 꽂았다. 허리에는 화려한 비단 폐슬을 늘어뜨리고 옥패도 두 개 찼다. 집에서는 은이나 주석으로 된 동곳을 사용해서 상투를 틀었는데 지금처럼 차가운 은색이 제일 마음에 든다.

    그가 얼굴을 비추는 곳에서는 진욱 왕자의 막내아들인 진연군 마마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과 세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므로 가장 가까운 진욱 왕자와 아들들의 외모와 상당히 닮은 목선후를 보고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이유가 있어서 잠시 목씨 집안에 의탁한 것으로 소문을 냈지만 사실 조금 불안했다. 다행히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시대는 가족과 친척 공동 육아라 부모에게 사정이 있으면 지인이나 친척에게 아이를 맡기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보다는 특출난 외모에 더 많이 관심을 가졌다.

    나는 살그머니 뒤로 다가가 왁! 놀래키려고 했는데 두 팔을 드는 순간 목선후가 뒤를 돌아보며 눈썹을 치켜떴다.

    “또 장난치려고?”

    “내가 온 걸 알고 있었어요?”

    “어떻게 모르겠소?”

    입술을 늘이며 싱긋 웃는 목선후에게 자석처럼 스윽 빨려 들어갔다. 미소도 아름답지만 나를 보는 눈빛이 너무 따뜻했다. 기울어진 내 상체를 자연스럽게 받아 가슴에 안으며 목선후가 물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요?”

    “난 항상 기분이 좋은데요?”

    본격적으로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디 높은 데서 떨어지지 않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늙어 죽을 때까지 높은 데로는 올라가지 않고 살 수 있다는 확신도 커졌다.

    “무슨 일이오? 그대의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소.”

    “그게요.”

    안문이가 천재였어요! 일 년 만에 등급외에서 칠 등급이 됐다고요! 언빌리버블, 판타스틱 베이비라고요. 아이큐 150쯤 되나 봐요. 하지만 이런 말은 속으로 삼키고 목선후의 입술선을 손끝으로 그렸다.

    “흐응, 맞춰 봐요.”

    “장난꾸러기. 언제 철이 들 거요?”

    아마 영원히 안 들걸? 철들 나이가 너무 많이 지났거든.

    “왜요? 철들기 원해요?”

    “아니, 어떤 모습이든 그대이기만 하면 돼. 그대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소.”

    “정말요?”

    이미 감동해 놓고 또 확인하고 싶어 한다. 유치한 안안용.

    저녁 내내 목선후는 내가 기분 좋은 이유를 추론했지만 정답을 맞추지는 못했다. 그가 틀릴 때마다 뺨과 입술에 뽀뽀를 해 주었기 때문에 틀리고도 행복해했다.

    ***

    수능 징크스가 있다. 수능날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던지, 11월인데 눈이 오든지 했다. 보온 도시락이 아닌 일반 도시락은 차갑게 굳어서 긴장한 수험생들의 위장을 마구 공격했다. 내 학생 중에 오전 중에는 실력대로 시험을 잘 보다가 점심 이후 시험을 망친 애들이 꽤 있었다.

    하필 내가 가르친 영어가 점심 이후 첫 시험이라 학생들 도시락 걱정까지 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수능 날 최대한 기름기 없고, 부담이 적은 음식으로 도시락을 싸도록 주의를 주었다.

    증광시 첫 시험날.

    여기에도 시험 징크스가 있는지 첫눈이 내렸다.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목선후와 안중이를 온 가족이 배웅했다.

    안문이는 형의 뒷모습을 파랗게 질린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이 시험을 보러 들어가는 것처럼 긴장한 태도였다.

    이번 시험은 구 등급인 안중이만 치기로 했다. 내가 안문이도 과거시험을 보는 게 좋겠다고 하자 온 가족이 두 손을 들고 반대했고 안문이도 절대로 보지 않겠다고 했다.

    “이 년 후에는 볼 거지?”

    “응.”

    안문이 볼을 붉히며 약속했다. 하긴 안문이가 떡하니 합격해서 최연소 향시 합격자라는 타이틀을 따면 성격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어린 안문이에게 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 나도 알 수 없다.

    이 시대 과거시험은 현대의 수능보다 훨씬 더 파워가 세다. 바로 관직에 직결되고 신분상승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안문이는 지나친 관심과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안문이가 합격한 이후를 걱정하는데 가족들은 떨어질 게 뻔한데 어린 안문이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반대했다.

    ‘향시에 합격하면 학당에는 안 나오는 거야?’라는 민아의 말이 결정타였다. 안문이는 민아의 말에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에고, 조그만 것들이. 이러니 오 여사님이 기함을 하지.

    목선후가 과장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던 사람들이 수군댔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저렇게 잘난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여인들이 눈빛이 사냥감을 보는 늑대의 눈빛으로 변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이를 악물고 내게 속삭였다.

    “목 서방이 은인자중할 때는 몰랐는데 내놓고 보니 아슬아슬하구나. 이것아, 정신 차려. 잘못하다가는 어느 여우 년의 꼬리 짓에 넘어갈지 몰라. 사내는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 법이야.”

    와우, 오 여사님,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을 동시에 가지셨군요. 안부자를 꽉 쥐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늘 경계했구나. 내가 어머니의 팔짱을 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이혼하고 집에 와서 편히 살죠, 뭐. 상등 가게와 비누 가게도 열 개로 늘리고요. 환성의 돈을 쓸어담아 보자고요.”

    안문이 덕분에 궐향은 이 년 후 중문상가 스무 개를 가져가는 대신 안씨 집안을 호위하게 될 것이고 나는 돈방석에 앉아 있게 된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너 동경을 좀 봐라.”

    어머니가 핀잔을 주며 내 눈꼬리를 소매로 닦았다.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흘러나왔나 보다. 과거를 보러 들어가는 목선후 때문이 아니었다. 목선후에게 따라붙는 여인들의 시선 때문도 아니었다.

    이로써 완전히 끊어진 현대와의 고리. 꿈처럼 사라진 삼십 년의 내 과거 때문이었다.

    다시는 김인수의 흔적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세계에 적응을 잘할수록 과거의 내 인생은 희미해질 것이다. 치열한 삼십년의 삶이었는데…….

    차가운 바람이 심장을 스치는 것처럼 허전했다.

    어머니는 ‘어느 여우년’이란 말을 해서 내가 놀랐다고 생각했는지 후회의 눈빛으로 나를 달랬다.

    “춥다, 집에 들어갔다가 시험이 끝날 때 나오자. 네가 여기서 기다리면 목서방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다.”

    “네.”

    아버지가 여자들을 두 대의 마차에 나누어 태웠다. 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은 말을 타고 쏟아지는 눈송이를 그대로 맞으며 집으로 향했다. 내가 마차의 휘장을 걷고 안문이와 나란히 말을 몰고 있는 정 공자를 보았다. 정공자는 대견하다는 듯이 가끔 안문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저 심정을 알지. 정 공자는 지금 엄청난 원석을 캐어 다듬는 느낌일 거다. 안 좋은 선생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의 선생은 제자를 아낀다. 자신의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하므로 싫어하기가 더 어렵다.

    흐뭇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어머니가 내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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