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85화 (85/92)
  • 85화. 분발하는 동생들

    내가 입술을 내밀며 삐죽거렸다.

    “학생이 아니라 선생을 하는 거죠.”

    “그대가 선생을?”

    한쪽 눈썹을 올리는 목선후를 째려보았다. 이봐, 굉장히 의심스럽다는 표정인데. 내용을 가르치는 선생도 중요하지만 관리를 해 주는 선생도 중요하다고. 관리만 전담으로 하는 학원 강사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돈도 제일 많이 받아.

    내가 씩씩거리며 도발했다.

    “이 년 후에 안씨 학당에서 향시 급제자가 나오면 어떡할래요? 그렇게 되면 인정해 줄 거예요?”

    “못 나온다고 한 건 그대였소.”

    “세상은 변한다니까요. 사람도, 생각도 변하고요.”

    나는 안문이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2년 후면 안문이가 열세 살이 된다. 열세 살에 향시에 합격한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 있지 않은가. 비록 등급 차이는 크지만.

    대한민국 오포세대의 여성에게 포기는 없다. 오포세대란 포기할 만한데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우리 서방님이 올가을 증광시에서 장원할까나?”

    “의심하는 거요?”

    의심하고 싶어도 못 한다. 목선후 빼고 일 등급은 궐향인데 그는 풍월문으로 돌아갔다. 안 돌아갔어도 속세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평생 과거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장원이 되면 벼슬을 하게 되는 거죠? 무슨 벼슬을 하나요?”

    “어사나 승지가 될 수 있소. 지방관도 될 수 있고. 전하나 상서령이 정하는 일이지.”

    장담하건데 목선후가 장원이 되면 전하는 원하는 직책은 무엇이든 주려고 할 것이다.

    “지방관은 안 된다고 하실 거예요.”

    “그러시겠지.”

    먹는 것도 예술인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려 했던 남자다.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벅차오르는 한편으로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수능 영어 강사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새벽 1시까지 학생을 가르치고 가끔 내 학원이 세 들어 있는 건물의 7, 8, 9층을 사기 위해 대출을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생각하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김인수는 식물인간이 되지 않고 부모님과 사이는 좋지 않지만 명문대에 진학하겠지. 십 년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런 미친 삶을 살면서 남은 대출금이 얼마인지 계산하고 있을 거고.

    그런 삶으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신이시여,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이 사람과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이미 높은 데서 세 번 떨어졌지만 혹시 한 번 더 떨어져야 한다면 이를 악물고 참아 볼게요.

    “안용! 왜 우는 거요?”

    깜짝 놀란 목선후가 젓가락을 놓고 일어나서 내 옆으로 왔다. 흔들리는 눈동자에 연민과 당황이 비쳤다.

    “내가…… 서방님을 많이, 아주 많이 좋아한다고 말했던가요?”

    뜨거운 눈물이 흘러서 뺨을 적시고 입술을 적시고 턱 끝으로 뚝뚝 떨어졌지만 내가 지금 느끼는 이 안타까움을 그가 알아주었으면 싶어서 눈물을 닦지 않았다.

    목선후는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이 되더니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끊임없이 넘쳐흘렀다. 나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내가 억제하거나 바꿀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어느 시점에 서서 앞과 뒤를 보며 서 있는 기분. 이런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목선후는 내 감정을 조금은 알아주었다.

    “중문에서 뛰어내리라고 말했을 때 그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지. 그때 알았다오. 그대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하지만 그대가 말해주니 너무 기쁘오.”

    비로소 흑흑, 흐느끼며 그의 목을 얼싸안았다. 목선후가 힘 있는 팔로 나를 마주 안았다.

    “우리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파요.”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요? 안용? 혹시 어디가 많이 아픈 거요?”

    “아니에요.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잖아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사랑을 담아서 그가 말했다.

    “영원한 것은 없지만 지금은 영원하오. 그대도 그렇지?”

    목선후가 팔을 풀고 손끝으로 내 턱을 우아하게 치켜들었다. 우리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그 시선 끝에서 마법이 일어났다.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이 순간 나는 알았다.

    내게 사랑의 마법이 일어났다는 것을.

    “나도 그래요.”

    그의 말이 맞았다. 이 순간이 모여서 하루가 되고 영원이 되는 것이니까.

    목선후가 일어나더니 내 등과 무릎 밑에 팔을 넣어서 번쩍 들었다. 한껏 느끼한 표정인데도 여전히 단정하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증명해 주겠소.”

    아니지, 나는 말로 하는 지금이 좋아. 남자들은 왜 몸으로 말을 대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고대에서도 현대와 똑같아서 신기했다.

    갑자기 현실감이 팍 들고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는 다리를 바동거리며 방금 마법의 언어를 내게 속삭이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더 할 말 없어요?”

    잘생긴 남자들은 가끔 너무 자신감에 차서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해도 여자가 용납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여자도 있겠지만 모든 여자가 그런 건 아니야.

    “잠깐 내려놔 봐요.”

    “싫소.”

    목선후가 고집을 부렸다. 할 수 없지. 안안용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니까. 내가 음흉하게 키득거렸다. 본의는 아니지만 때로는 본능에 충실해야…….

    ***

    우리 집에서 열기로 했던 연회는 미뤄졌다. 증광시가 코앞이었고 내 건강도 간신히 회복했으며 무엇보다 세자빈의 친정이 몰락하는 데 나와 목선후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진욱 왕자님, 즉 내 새로운 시아버지는 얼마나 세밀한지 좌우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앞뒤와 위아래와 전후 사정을 모두 따졌다. 그리고 내린 결론.

    세자와 세자빈을 위해 당분간 자중하되 증광시에 장원을 해서 왕실과 조정에 자랑스러운 이름을 알리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야 등급을 보는 치트키가 있어서 목선후의 장원을 확신하지만 진욱 왕자는 무슨 근거로 확신하는지 궁금했다.

    말순의 말로는 목선후가 과거에 소년 수재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란다. 그 당시 목선후의 답안은 중신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될 정도로 명문장이었고 진욱 왕자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면 장원은 따논 당상이라지만 세상에는 숨은 다크호스가 있는 법. 나는 목선후에게 최선을 다해 준비하라고 말했다. 진욱 왕자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 등급임을 증명하라는 뜻에서였다.

    목선후가 서재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나는 친정으로 가서 오 여사님과 함께 수능생을 위한 총명탕 제조에 들어갔다. 약국에서 사 먹거나 사서 학생에게 준 적은 있어도 제조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의원의 도움을 받아 머리에 좋은 몇 가지 약재를 약하게 섞은 다음 맛있는 꿀을 첨가했다. 너무 들뜬 내 모습에 어머니가 걱정했다.

    “목 서방이 아무리 소년 수재라지만 장원을 할까? 미리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어쩌려고 그러니? 안용아, 얼굴만 보자면 장원감이긴 해도 과거 시험지에 얼굴이 박혀 있지는 않단다.”

    어머니의 통찰력은 놀랍다. 그래서 현대에서도 취업서류에서 사진을 빼버렸다. 물론 면접에서 결국 드러나지만 말이다.

    “장원할 거예요. 어머니.”

    장담하는 나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던 오 여사님이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래, 까짓것 장원 못 하면 어떠니? 안씨 가문의 사위로 금 방석에 앉았는데. 온 나라에서 목 서방만큼 운이 좋은 사내도 없을 거야. 이제 신분 문제도 해결되어서 왕족이 됐고. 이 이상 바라면 욕심이지.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그렇게 말한 오 여사님이 산삼 한 뿌리를 더 넣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의원에게 채근했다. 의원은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면서 치료약이 아니라 보약이니 약하게 짓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어머니, 그거 말굽은 한 개 값이라면서요. 아꼈다가 아버지 드리세요.”

    “됐다.”

    어머니가 산삼을 놓고 몸을 돌렸다. 이럴 때는 안부자가 불쌍하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들고 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당으로 향했다. 늦가을 바람에 바싹 마른 장미넝쿨이 우리를 맞았다. 기온이 떨어져 학당에서는 작은 난로를 피우고 덧문을 닫고 공부 중이었다.

    마침 정 공자, 정확히 말하면 정 어사이자 목선후의 비밀수하인 사선이 안문이를 데리고 학당문을 밀고 나왔다.

    “오셨습니까?”

    “선생님, 점심을 가져왔어요.”

    내가 손짓을 하자 하녀들이 찬합을 정공자와 안문에게 건넸다. 우리는 요즘 공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학당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친정에 올 때는 주로 낮인데 동생들에게 주라고 간식을 하녀들에게 보내도 직접 보지는 않았다. 공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너는 왜 나오느냐?”

    어머니가 안문이를 보고 물었다.

    “흠, 흠.”

    어색한 헛기침을 한 정 공자가 고개를 푹 숙인 안문이를 대신해서 말했다.

    “민아 때문에 훈계를 좀 하려고 나왔습니다.”

    “너, 이놈의 자식. 벌써 여자에게 미쳐 공부를 소홀히 하다니.”

    원색적이고 신랄한 오 여사의 발언에 말을 꺼낸 정 공자도 허둥댔다.

    아니, 오 여사님, 너무 속단하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안문이를 위해 중재를 시작했다.

    “선생님, 그건 아니죠?”

    정 공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대를 잔뜩 걸고 있는 안문이 마저 딴 길로 새면 안씨 집안은 가망이 없다. 목선후가 장원을 해도 목씨나 진씨가 영광을 얻게 될뿐. 여전히 무식하고 돈 많은 안씨 집안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다.

    “안문이가 민아를 위해 학업을 늦추고 있습니다. 혼자 잘하기 싫다면서요.”

    정 공자의 말에 어이없어진 내가 안문이의 턱을 손가락으로 치켜들었다. 안문이와 내 시선이 얽혔다.

    팟!

    떠오른 등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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