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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83화 (83/92)
  • 83화. 나라를 팔아먹었냐

    ***

    “조용히 하고 나를 따라와라. 안 그러면 여기서 너를 찌르고 나도 죽을 거야. 못 믿겠으면 시험해 보든가.”

    정오와 말순을 부르려고 입을 여는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서중호숫가에서 봤던 남자. 세자빈의 오라비 장진한.

    장진한과 눈이 마주치자 팟!

    그의 등급이 떠올랐다.

    8등급.

    남우효와 같고 북행궁 시녀 조유정과도 같다. 남씨 집안 같은 명문가라면 젖 뗐을 때부터 공부를 시켰을 텐데 겨우 팔등급이다.

    공부는 못하지만 나를 고립시켜 협박할 정도로 잔머리는 발달한 남자였다.

    나는 옆구리에 닿은 칼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아씨! 어디 가세요?”

    내가 찻집 밖으로 나가자 말순이 뒤따라오며 소리쳤다. 말순아 소리치지 마. 눈빛으로 애원했다.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하면 장진한은 나를 찌를 것이다. 그렇잖아도 약한 안안용은 도토리묵이 갈라지듯 베어져서 죽어가겠지.

    내가 장진한에게 끌려가는 동안 사태를 파악한 정오와 말순은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장진한도 그녀들이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들이 함부로 덤빌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이선이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리가 중문 상가 거리를 벗어날 때까지 이선은 보이지 않았다.

    장진한은 마치 아내를 아끼는 남편처럼 어깨 바로 뒤에 붙어서 걸으며 칼을 내 옆구리에서 떼지 않았다. 나는 얌전히 따라갔다. 안신이를 납치했던 창씨 아들은 무인이 아니었어도 내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장진한은 무공을 꽤 한다고 했다. 내 미완성 호신술로 그의 실력을 시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지금의 인생을 사랑했고, 나를 사랑하는 남자도 있다. 살고 싶었다.

    인질극에서는 시간을 오래 끌수록 기회는 많아진다. 우리가 중문으로 다가갔을 때 갑자기 목선후와 일선이 나타났다. 그들이 보이자 정오와 말순이 아씨, 하면서 달려왔다.

    “오지 마. 오면 찔러 버릴 거야.”

    장진한이 칼을 내 목에 대며 소리를 질렀다. 중문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날카로운 칼날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동그란 원이 생겼다.

    이번에도 살면 나는 남은 생을 정말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쓸 수 있는 행운을 이미 다 썼으니까.

    “장진한, 내 아내를 보내라. 그러면 도망치게 해 주겠다. 봐라.”

    어느새 소식을 듣고 등장한 목선후가 들고 있던 칼을 바닥에 던졌다. 일선도 주군을 따라했다.

    우리의 시선이 부딪쳤을 때 일 등급을 감싼 황금 고리는 더할 수 없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만든 상등보다 더 밝고 아름다웠다. 그 영향 때문인지 내 안에 있던 절망과 두려움이 사라졌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황금 고리는 실제로 내게 힘을 주는 능력이 있었다. 황금고리가 빛나면 내 몸과 마음이 바다로 돌아온 벨루가 고래처럼 생생해졌다.

    등급이 그의 실력을 나타낸다면 황금 고리는 치유하는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오직 나만을 향한.

    그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라는 뜨거운 감정이 가슴을 채웠다.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은 모두 멀리 도망가서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장진한이 칼은 내 목에 댄 채 작은 피리를 불었다. 그러고는 나를 끌고 중문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문이 이렇게 거대한 줄 몰랐다. 늘 무심코 지나치기만 했는데.

    중문은 원래 커다란 성문이었고 좌우로 성벽이 있었으나 성이 커지면서 문만 남았다. 그래도 원래 성문이었기 때문에 높고 두꺼웠다. 중문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식 디딤돌까지 그대로 둬서 필요 시 성문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성문 위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세어져 내 비단치마가 꽃잎처럼 펄럭였다. 마침내 성문 위에 올라섰다. 성문 아래 폭은 매우 넓었는데 위에는 겨우 3미터 정도의 폭에 아파트 3, 4층 높이쯤 돼 보였다.

    목선후가 계단을 딛고 올라오려 했다. 그러자 장진한이 나를 가장자리로 밀었다. 성문 위에는 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위태롭게 떨며 가장자리에 서게 되었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나서면 그대로 떨어질 정도라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넌 어차피 도망 못가. 자, 봐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어. 자수해라. 장씨 집안이 유배를 가 있는 섬으로 보내주겠다. 약속한다.”

    목선후가 장진한을 달랬다. 그는 세자빈의 오라비다. 괜히 죽여서 원한을 맺는 것보다 괴롭게 오래 살게 하는 게 나았다.

    “크하하하!”

    갑자기 장진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 목선후가 절반은 올라왔다. 그가 입은 겨자색 도포가 바람에 흩날려 개나리꽃처럼 화사했다.

    “그렇게 사느니 죽겠다.”

    장진한, 진정한 사이코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구나.

    “목선후, 어서 올라와라.”

    왜? 왜? 그를 올라오라고 하지?

    내 의문을 무시하고 목선후가 나는 듯이 올라왔다. 우리는 열 걸음쯤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아름답고 품위 있는 얼굴은 파리했고 어금니를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턱이 움찔거렸다. 그는 내게 끊임없이 안심하라고 눈으로 말했다.

    갑자기 끔찍한 공포가 등골에 흘렀다. 왜 올라오라고 했지? 목선후를?

    설마!

    그때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거대한 두 개의 몸집이 보였다. 폭포 옆의 낡은 사당에서 보았던 자들이다. 고춧가루 최루탄의 매운맛을 본 자들이고 세자의 칼에 찔렸던 자들이다. 얼마나 두꺼운 살이면 칼에 찔리고도 저렇게 말짱하게 나았을까?

    “그들을 올라오게 해라.”

    장진한이 요구했다. 목선후가 손을 들자 일선이 비켜서며 그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쿵쿵쿵.

    두 남자가 발을 디딜 때마다 땅이 울렸다.

    이윽고 위로 올라온 거인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빳빳한 수염은 더 지저분하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들은 나를 올려다보더니 고춧가루 최루탄이 생각났는지 히죽 웃었다. 커다랗고 누런 이가 드러났다.

    나는 발밑을 신경 쓰느라 그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고 등급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장진한의 칼을 조심하며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성벽의 오른쪽에 나와 장진한이 서 있고 가운데에 목선후가, 그리고 왼쪽에 거인들이 섰다. 그때 어디선가 휘익 화살 한 개가 날아와 방금 올라간 거인의 어깨에 박혔다.

    거인은 성가신 듯이 자신의 어깨에 꽂힌 화살을 반대편 손으로 뚝 꺾었다. 그러자 화살촉까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살은 거의 어깨 거죽을 조금 상하게 했을 뿐이었다.

    장진한이 소리쳤다,

    “한 번만 더 활을 쏘면 이 년을 밀어 버리겠다. 알았느냐?”

    장진한이 나를 미는 시늉을 했기 때문에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공포를 느끼게 하는 높이였다.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며 힘이 빠졌다. 장진한이 밀지 않아도 떨어질 것 같다.

    내가 도대체 전생에 얼마나 나쁜 짓을 한 거야?

    나 님, 혹시 나라를 팔아먹었냐?

    “안용!”

    목선후가 소리 질렀다.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얼굴이라 잘생겼느니, 수려하다느니 하는 표현이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 저 사람이 저렇게 슬퍼하게 둘 수는 없는데. 목선후의 절박하고 처절한 표정에 이를 악물었다.

    장진한이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자, 목선후, 이 여자를 대신해서 여기서 뛰어내리면 여자는 살려주지.”

    내가 걱정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장진한이 목선후에게 중문 위로 올라오라고 한 이유고 사이코패스인 장진한이 할 만한 제안이었다. 소름 끼치는 장진한의 표정에 구역질이 나오려 했다.

    목선후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우리 사이에 차가운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람결 사이로 나뭇잎과 꽃잎이 날려왔다.

    목선후의 깊고 또렷한 동공에 무엇인가 어리기 시작했다. 초탈한 표정이 그가 무엇을 할지 말해 준다.

    그는 나 대신 기꺼이 뛰어내릴 작정이다. 목선후가 뛰어내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 장진한이 승리한다.

    목선후가 뛰어내리지 않고 장진한과 거인들을 잡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뛰어내리는 것뿐이다. 나만 없으면 저들은 날아오는 화살에 구멍이 뚫릴 테니까.

    내가 뛰어내리면? 바닥에 에어매트가 깔린다거나, 무협영화처럼 와이어를 착용한 무사가 내 허리를 잡아채서 사뿐히 지상으로 내려온다거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비현실을 꿈꾸기에는 나는 너무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처연해진 나는 바닥을 보고 목선후를 보았다.

    입 모양으로 사랑해요, 라고 말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목선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는 내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픈 표정이었다. 나보다 더 아파하는 그를 보니 오히려 비장한 용기가 생겼다.

    세상에는 공짜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리 비정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작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고대로 빙의해서 가족과 남편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일 년 가까이 살았다. 꿈이라 해도 좋고, 환상이라 해도 좋다. 최선을 다해서 살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장진한은 나를 가장자리에 세워놓고 저는 무서운지 내게서 두 걸음 정도 떨어졌다. 이럴 때 고춧가루 최루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이놈을 잡고 같이 뛰어내릴까? 운 좋게 이놈을 밑에 깔고 떨어지면 나는 살지도 몰라.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아 볼까 궁리하는데 목선후가 갑자기 소리쳤다.

    “안용, 뛰어내려!”

    미쳤어? 여기서 뛰어내리게? 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랑 같이 죽을 사람이지 나만 죽게 할 사람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의 눈을 쳐다본 후 망설이지 않고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국가를 위해서 올림픽 다이빙 선수를 해야 했는데 안 해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일까? 세 번째 목숨을 걸고 떨어지니 이젠 이런 생각까지 났다.

    첫 번째로 떨어질 때는 완전히 타의였다. 고3 남학생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고 김인수의 다리를 잡고 끌어내릴 수 있다고 믿은 내 무지 탓이었다. 그건 희생이었지만 완전한 희생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두 번째는 살려고 뛰어내렸다. 폭포 아래가 미칠 듯이 무서웠지만 한 나라의 세자와 함께라 왠지 권력의 힘이 받쳐 줄 거라는 착각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결정적으로 두 명의 거인이 폭포보다 더 무서웠다.

    이번이 세 번째다. 나는 목선후의 눈빛 하나만을 믿고 목숨을 허공에 걸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빙의한 후의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로소 두려움에 숨이 멈췄다.

    그 순간 누군가 정말로 내 몸을 잡아챘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나를 받았다.

    궐향?

    나는 궐향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가 나를 받는 순간 찬란하게 빛나는 일 등급이 떠올랐다.

    “우린 풍월문이야. 바람과 달을 잡는다고.”

    궐향이 가슴으로 나를 받치며 말했다.

    윽, 처음에는 충격이 왔다. 곧이어 안전하게 바닥을 느끼고는 흐윽, 숨을 들이쉬었다.

    내 발밑에는 나를 받다가 어디 한 군데가 부러진 풍월문 제자 대여섯 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나를 자신의 손과 가슴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들과 부딪치며 내 몸도 여기저기 통증이 느껴졌지만 내 두 다리로 설 정도로 멀쩡했다.

    너무 의외라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엉거주춤 서서 가슴만 들썩였다. 심호흡을 하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흥분한 장진한의 빨간 눈이 불타올랐다.

    “으아아! 죽여 버릴 거야.”

    분해서 악마처럼 부르짖는 장진한.

    나의 건재함을 본 장진한이 목선후에게 달려들었고 반대편에서는 거인들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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