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82화 (82/92)

82화. 진연군

“네, 왕자님께서 이제 말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군이야. 진연군. 이제부터는 우리끼리도 왕자라고 불러서는 안 된대.”

“명심하겠습니다.”

말순의 대답 속에서 깊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비밀의 무게는 이처럼 무겁고 힘겹다. 한결 밝은 표정의 말순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면서 물러간 후 탁자 위에 있는 논어 제7을 폈다.

목선후가 그린 안씨 학당 중문을 나서는 아름다운 여인.

왜 그는 내 뒷모습을 그렸을까? 뒷모습이 더 예뻐서? 아니면 그때는 내 마음이 뒤돌아서 있어서?

이제 앞을 그려 달라고 해 볼까? 입궁했을 때 전하도 대비마마도 그의 그림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다.

아니, 아니다. 나는 안안용의 얼굴을 매일 볼 자신이 아직은 없다.

언젠가는 그에게 내가 안안용이 아니라 현대인임을 말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고 무엇보다 안부자와 오 여사님의 감정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원래의 안안용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지금 완벽하게 두 사람의 딸이다. 내가 변한 것까지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두 분이다. 원래 그런 아이였는데 잠시 한인수 때문에 변했던 거라고 이해해 준다.

말순이 부럽다. 말순은 지금 등에 진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심정일 거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오?”

아! 갑자기 뒤에서 나를 안는 목선후 때문에 내 손에 있던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선후가 긴 손가락으로 종이를 집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으로 이걸 그렸는지 모르겠소. 원래는 서체를 연습할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걸 그리고 있었소.”

목선후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종이를 반으로 접어 논에 제7에 끼웠다.

“얼마 전에 미인도를 하나 그릴까 하다 그만두었소.”

그의 손에 이끌려 후원을 거닐었다. 여름을 뽐내는 꽃향기가 후원에 가득했다. 그런데도 연회 때문에 더 많은 화분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연못가로 걸어갔다.

연못가에 서서 내 작은 손을 감싸 쥔 목선후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는데 내 귓가에 음성이 들렸다.

“왜 그리지 않았는지 궁금하지 않소?”

음, 궁금해해 주길 바라는구나.

“궁금해요.”

예쁘게 웃으며 원하는 대로 말해 주었다.

“그대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이미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거든.”

가슴이 콱 막혔다. 귀까지 뜨거워졌다.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골랐다.

숨이 좀 편해진 후 말했다.

“그러면 유리 거울을 보면서 자화상을 한 장 그려줘요. 내 가슴에 품고 다니게요.”

사랑은 유치한 거다. 이런 유치한 말을 하면서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으니 말이다. 목선후는 하하! 웃고는 자신을 그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목선후의 귓불이 나처럼 붉어졌다.

이 시대는 자화상을 그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잘 보이는 유리거울이 없어서일 것이다.

***

며칠 후.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궐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환성에서 백 리 밖에 장진한처럼 보이는 자가 있다고 다녀온다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꼭 잡으면 좋겠어요.”

궐향은 올해 안으로는 반드시 풍월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들었다. 문주의 오랜 외유로 불만을 가진 세력이 생겼다고 한다.

“잡을 거요. 그대는 건강하기만 하면 돼. 그리고 연회 준비로 무리하지 마시오.”

“더위가 한풀 꺾여서 괜찮아요. 참, 오늘 안씨 찻집에 새로 들어온 차가 있다고 연회에 쓸만큼 마음대로 고르래요. 같이 갈래요?”

“오늘은 제사가 있어 형님과 함께 목씨 사당에 다녀오기로 했소. 하지만 그대가 원한다면 빠질 수 있소.”

목씨 사당은 어사중승의 형이 사는 마을에 있어서 말을 타고 한 시간 정도 가야 한다. 이제 목선후는 목씨 집안 후손이 아니지만 기른 정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목씨 집안 제사에 참석하려는 거다.

내 눈치를 보는 목선후를 보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절 악처로 만들고 싶으면 그러든지요.”

“하하하. 그대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오.”

현대에서 나는 재미없고 딱딱한 원칙주의자였는데 여기서는 재미있는 여자로 통한다. 뭔가 뿌듯하다. 자기계발서를 읽고 잘 실천해서 성격을 개조한 사람 같은 기분.

“이선이 그대를 호위할 거요. 그를 단 한 순간도 떼어 놓지 마시오.”

“당연하죠.”

“약속하오?”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우리는 외출 시 늘 호위를 두었다. 대부분 팽문과 일선은 목선후를 호위했고 이선과 말순이 나를 호위했는데 몸집이 작고 수줍음이 많은 남자 이선은 내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비치면 어쩔 줄 몰라 했다.

눈치를 주면 좀 멀찍이 떨어지는데 나중에 목선후가 알면 크게 화를 냈다. 정오와 말순이 내 양쪽에서 꼭 붙어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목선후가 간 후에 나는 중문 상가에 가서 점심도 사 먹고 시내 구경도 하다가 안씨 찻집으로 향했다. 막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어떤 여자와 부딪쳤다. 여자와 나는 서로 깜짝 놀라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 시대에도 가끔 얼굴을 가리는 멱리나 너울을 쓰는 여자가 있는데 방금 부딪친 여자가 그렇게 너울을 눈 밑으로 쓰고 있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팟!

등급이 떴다.

6등급? 한 번 본 적 있는 6등급이다.

너울을 써서 얼굴은 안 보이지만 가짜 세자의 서신을 가져왔던 바로 그 여인이다. 여인은 당연히 내가 자신의 얼굴을 못 알아본다고 생각해서 간단히 인사를 하고 서둘러 찻집을 벗어났지만 나는 여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신도 가짜였으니 세자궁의 시녀라는 저 여인도 가짜인데 그 생각까지는 못 했다.

“이선, 저 여자를 쫓아가서 어디에 사는지 보고 와요.”

이선은 추적술에 능하고 발도 빠르다. 그는 한 줌의 그림자만 있어도 몸을 감출 수 있다. 6등급 여인을 쫓아가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다.

“하지만 아씨, 소인은 아씨를 떠날 수 없습니다.”

목선후의 명을 기억한 이선이 소심하게 반발했다.

“저 여자가 장진한의 하수인이에요. 얼른 가요. 놓치지 말고. 여기는 말순이 있고 나는 찻집 안에서 기다릴 거니까 염려 말아요. 봐요, 찻집 안에 사람이 많잖아요. 우리 사람들도 많고.”

나는 조바심이 났다. 반드시 저 여인의 뒤를 밟아야 한다. 저 여인은 장진한 패거리와 선이 닿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죽을상을 한 이선이 마지못해 여인을 따라가고 나는 정오와 말순을 데리고 찻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말대로 찻집에는 새로 덖은 고소한 찻잎 냄새가 가득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씨.”

내가 들어가자 찻집 점장이 힐끗 상등을 올려다보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상등 불빛을 받은 찻잎들은 더 반짝반짝하고 향기로워 보였다.

이제 사람들은 나만 보면 상등을 떠올린다.

찻집은 한 번 홀라당 탄 뒤로 새로 지으면서 내 제안에 따라 구조를 꽤 현대적으로 바꾸었다. 판매자 중심이 아니라 고객 중심의 구조로 바꾸었기 때문에 당연히 매상이 기하급수적으로 뛰어올랐다.

나는 ‘단지 구경 오는’ 사람도 막지 말라고 했다. 그 뒤로 찻잎을 파는 도매점인 안씨 찻집은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때가 많았다. 한쪽에서는 시음해 볼 수 있도록 점원이 작은 찻잔에 차를 제공하기 때문에 더욱 붐볐다.

오늘도 그랬다.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벽을 따라 한쪽으로 걸었다. 그러느라 정오와 말순과 거리가 좀 떨어졌다. 이선도 없는데 말순과 떨어지는 게 불안해서 말순을 부르려고 입을 벌렸다.

***

성동격서. 동쪽을 공격하는 척하다가 서쪽을 공격하는 병법 중 하나.

장진한은 자신의 계략이 너무 멋지게 성공해서 오히려 얼떨떨해졌다.

제일 먼저 그는 거짓 정보를 줘서 풍월문주를 환성 밖으로 빼냈다. 이런 일은 남찬웅이 했다. 장진한은 남찬웅의 집을 은신처로 삼고 모든 계획을 세웠다.

소문이 돌자 풍월문의 사정이 나빠진 탓에 다급해진 궐향은 평소의 냉철함을 잃고 별다른 의심 없이 달려갔다.

그다음에는 목선후나 안안용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이었는데 이날은 목씨 가문에서 제사를 지내는 날이니 목선후 부부가 집 밖으로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운이 나쁘게 목선후가 먼저 떠나고 안안용이 나중에 집을 나섰다. 어느 쪽을 따라갈까 하다가 안안용을 노리기로 했다.

목선후는 본인도 칼을 잘 썼고 일선은 세자 익위사만큼 강했다. 지금 장진한은 혼자다. 아버지의 비밀 병기였던 두 거인은 너무나 눈에 띄어 밖으로 나올 수가 없어서 약속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호랑이가 사슴을 노릴 때도 강한 숫사슴 보다는 아기 사슴을 노리는 법. 장진한은 안안용을 따라갔다.

안안용에게 세자궁의 서신을 전하는 시녀 역할을 했던 자신의 첩에게 주변의 호위를 따돌리라고 했는데 평소에 야무진 첩은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고 그냥 찻집을 나오고 말았다.

맞은편 가게의 모퉁이에서 안씨 찻집을 지켜보던 장진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첩의 행동이 이상했다.

사실 장진한의 첩은 찻집 안이 너무 붐비는 데다 장진한의 명령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명령에 따르는 척 흉내만 낼 작정이었기 때문에 찻집 안을 대충 휘둘러보고 나와 버렸다.

그녀는 원래 예쁘고 영리해서 귀염을 받는 양갓집 규수였다. 우연히 장진한의 눈에 띄어 억지로 그의 첩이 되었고 복종하지 않으면 친정집이 화를 입을까 봐 시키는 일을 했지만 늘 도망가고 싶었다.

이제 장진한은 이빨 빠진 호랑이다. 예전처럼 그의 명령을 마음을 다해 수행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장진한이 죽어서 자신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찻집을 나오다가 안안용과 부딪쳤는데 장진한의 첩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마음만 먹으면 호위를 따돌릴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장진한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은 여인이 서둘러서 걸어가다가 자신에게 꼬리가 붙었음을 알았다.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안안용의 호위일 것이다. 장진한의 계획대로 안안용의 호위가 여인을 따라왔다. 자신이 포기한 일이었는데 운명은 어쩔 수 없구나. 여인이 한숨을 쉬고 발길을 재촉했다.

멀리서 그를 보고 있던 장진한은 그럼 그렇지, 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시킨 대로 첩이 호위를 따돌렸다.

이제 안안용은 아기 사슴처럼 혼자다. 장진한은 두건을 눌러쓰고 소매 속에 칼을 감추고 찻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워낙 많은 터라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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