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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80화 (80/92)
  • 80화. 계약서는 유효해

    “장인어른은 내 신분 때문에 언젠가는 어려움이 닥치리라고 예상해서 신비문파인 풍월문과 손잡기로 한 거요. 형님은 그렇잖아도 나에게 어떻게 접근할까 생각 중이었으니 장인어른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인 거지.”

    “안씨 집안에서 누군가 향시에 합격해야 하는 조건은요?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중문 상가 스무 채는 안전한 거죠? 그렇죠?”

    내 강남빌딩 스무 개는 무사하다. 남편의 형이니까 봐줄 거다. 내 질문에 목선후가 찬물을 끼얹었다.

    “계약서는 잘못된 게 없다고 한 거 같은데?”

    아우, 약 올라. 목선후의 어깨를 탁탁 쳤다. 힘껏 쳤는데 내 주먹만 아팠다. 아프고 나서 더 기운이 없어서 두부라기보다는 도토리묵에 가까운 안안용의 몸이다.

    “동생의 처가인데 봐줄 수 있잖아욧!”

    “부자간에도 계약서는 유효하다오. 그런데 왜 그리 걱정하는 거요? 한 명이라도 향시에 합격하면 되지.”

    “그, 그게 어렵다구요.”

    “동생들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거 아니요? 그대도 천자문을 떼고 시경을 공부하면서 동생들이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나는 일 등급이었다고! 일 등급 수능 강사! 어디다 비교하냐고.

    그리고 아직도 천자문을 공부하는 애들이 언제 사서삼경을 떼서 향시에 합격하냐? 누구는 십 년씩 공부하고 시험을 봐도 떨어지는데. 나는 안씨 집안이 가난해지는 건 절대 못 본다. 오 여사님이 구첩반상이 아니라 삼첩반상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가빠진다.

    “아! 열이 오르나 봐요.”

    내가 눈을 감고 픽 쓰러졌다. 한참을 지나도 목선후의 움직임이 없어 살짝 한 눈을 떴다.

    “안용, 이런 일로 놀리면 안 돼.”

    목선후가 무서운 얼굴로 으름장을 놨다. 그는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화가 났다. 내 양팔을 잡아서 일으켜 앉히더니 내 눈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그대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아오?”

    고개를 흔들었다. 목선후가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장씨 집안 사내는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소. 세상이 나를 비난한다고 해도 끝까지 그들을 쫓아가 남김없이 죽여 버리려고 했소. 내가 그렇게 잔인한 생각을 했다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렇게 부드러운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다고 맹세했을까? 를 생각하자 목이 메었다.

    “미안해요.”

    “뭘?”

    “공자님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 뻔했잖아요.”

    “장난은?”

    “열심히 약 먹고 빨리 나을게요. 됐죠?”

    목선후가 나를 안고 아기를 어르듯이 상체를 천천히 흔들었다.

    “다 나으면 할마마마가 말씀하신 유주를 보러 갑시다.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곳은 드물다고 들었소. 여행하다가 그대가 지치면 내가 업어 주리다.”

    그러고 보니 세자가 나를 업어줬는데. 그 말을 하면 안 되겠지? 세자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를 업어보지 않았을까? 아니지, 아내가 둘이나 되니 누구든 한 번씩은 업어줬겠지.

    기억을 떨쳐 버리고 싶어서 목선후에게 졸랐다.

    “지금 업어줘요. 예행 연습으로요.”

    두말없이 목선후가 넓은 등을 댔다. 든든한 등에 뺨을 대고 물었다.

    “장진한을 찾으면 어떡할 거예요?”

    “세자 저하에게 맡겨야겠지. 세자빈 마마와 관련이 있으니 내가 독단으로 처리할 수는 없소.”

    “그가 제대로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지난번에 한씨 상단 문제로 제대로 벌을 받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예요. 벌을 안 주니까 나쁜 짓을 해도 되는가 보다, 하고 또 하죠. 이번에는 사람도 많이 죽었으니 꼭 대가를 치르게 해요.”

    “알았소. 안용, 자요. 그대가 잠들면 나가지.”

    “안 갈 수는 없는 거죠?”

    “응. 그대의 말처럼 그대로 두면 또 다른 음모를 꾸밀 게 분명해. 꼭 잡아야 하오.”

    세자는 좋겠다. 이런 형이 있어서. 나는 목선후의 등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

    얼마후.

    세자빈이 아들을 출산했다. 귀한 왕손이었다. 왕실이 들떠서 시끄러운 동안 목선후의 입적이 진행되었다. 아무도 관심이 없어 바라던 대로 조용히 묻혔다.

    왕은 손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대 사면령을 내렸다. 장현봉과 장진한도 사면되었으나 장씨 집안 전체가 환성에서 삼천리 밖의 한 섬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장진한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그대로 수배령이 유지되었다.

    환성에서 더 이상 장씨 집안 식솔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세자빈이 불쌍했지만 장현봉의 사면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날 나와 세자는 익위사들처럼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정말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장진한을 아직도 못 찾았기 때문에 목선후의 형인 궐향은 풍월문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목선후가 완전히 안전해질 때까지 목선후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청운각에서 내가 봤던 일 등급 남자였다.

    그날 우리를 유심히 본 이유가 있었다. 자기 동생 부부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내가 그를 유심히 본 이유는 몰랐기 때문에 나를 만나자 먼저 물었다.

    우리는 새로 마련한 저택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그를 초대해서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목씨와 안씨 집안은 식구들이 많아서 내가 완전히 체력을 회복하면 초대해서 크게 연회를 열기로 했다.

    “그날 왜 나를 유심히 봤습니까? 뭔가를 아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궐향이 청운각을 떠올리고 물었다.

    “왜 문주님을 봤느냐고요? 부채로 얼굴을 가리니까 더 궁금하더라고요. 얼마나 잘생겼기에 가리나 싶어서.”

    궐향은 목선후에 비하면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친근감을 느꼈다. 내가 생글거리며 장난을 치자 목선후가 난처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형님, 안용은 약간, 그러니까 장난을 잘 칩니다.”

    동생의 말을 들은 궐향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제수씨인 나를 너그럽게 바라보았다. 청운각에서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부드럽고 따뜻한 눈빛이다.

    여전히 일 등급.

    이 정도 되니까 이 젊은 나이에 풍월문이라는 문파를 이끄는 것이다.

    그가 우리 집에 올 때 여인 한 명과 같이 왔는데 예쁘지만 무인처럼 단단함과 단호함이 엿보였다. 머리를 포니테일 스타일로 높이 묶고 가벼운 무복을 입은 여자는 이십세 쯤 되보여서 나는 궐향의 아내나 연인이라고 생각했다.

    내 질문에 궐향의 뒤에 앉아있던 하지만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팟! 등급이 떠올랐다.

    6등급.

    실력자다. 실력자 여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에요. 사제 관계예요.”

    궐향이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사제관계가 맞긴 한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컨셉이네.

    그래서 그들이 가고 나서 목선후에게 말해 보았다.

    “유진주 낭자가 형님과 순수하게 사제지간이라면 중매해도 되려나?”

    “사제지간 맞소.”

    저녁 식사 후 공부를 하던 목선후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러면 한인수에게 소개할까요? 형님의 제자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일 거고, 무공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잖아요. 남 주긴 아까운 아가씨인데. 한인수는 한씨 상단을 이끌어야 되니 평범한 여인보다는 저렇게 능력 있는 여자가 좋을 것 같아요. 음, 하지만 남녀관계란 감정도 중요하니까 어째야 되려나.”

    공부 중인 목선후 뒤로 돌아가 목을 얼싸안았다.

    “일단 우연히 마주치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두 사람을 안씨 찻집으로 초대한다든가 하는 거죠.”

    “안용.”

    목선후의 음성이 심각했다.

    “공부하는 데 방해하지 말라고요? 에이, 솔직하자고요. 눈감고도 장원할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목선후가 내 손을 잡아서 나를 자신의 옆에 앉혔다.

    “안용.”

    “왜요? 유진주 낭자가 한인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한 공자가 다른 여자와 혼인해도 괜찮겠소?”

    뭔 소리야, 이게?

    “안 괜찮을 이유가 뭔데요?”

    “정말이오? 나는 그대가 아직 한 공자를 잊지 못하는 줄 알았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대가 열이 높아서 정신이 없을 때 한 공자를 찾았었소. 불러줄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가 싫었소. 그대가 낫기를 바라면서도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거요.”

    죄의식과 사랑의 열망이 깃든 눈동자가 긴 속눈썹 아래서 흔들렸다. 꿈속에서 만난 김인수를 소리 내어 불렀구나. 목선후가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다니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꿈을 꾼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흠, 흠. 그랬군.”

    기쁨으로 목선후의 뺨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질투쟁이.”

    “저리 가시오. 공부해야 하오.”

    “그러죠 뭐, 내일은 집에 가서 놀아야겠어요. 어머니도 보고 싶고, 동생들도 열심히 공부하는지 살펴봐야죠.”

    “어제도 다녀왔잖소.”

    “이틀에 한 번이면 많은 것도 아니네요.”

    내 친구는 아기를 낳으면 친정에서 키워 주기로 했다면서 친정집과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 같은 층에 살았다. 그래서 남편이 야근을 하거나 출장을 가면 친정집에 가서 잤다. 어떤 날은 아침과 저녁 식사를 친정에서 먹었다. 나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나는 결혼해도 친정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여기는 친정이 있다. 목선후가 왕족이라 팔십 칸이 넘는 집으로 분가하긴 했지만 정말이지 친정집 별당에서 산다면 내게는 최고였을 거다.

    “안용, 잊었나 본데 내일 입궁해야 하오. 궁에서 지치지 않으려면 일찍 쉬도록 하시오.”

    이 말은 나는 친정을 못 가고 시댁에 가야 한다는 뜻이다. 혼인하니 이런 일에서 피할 수가 없네. 내가 투덜거리자 목선후가 웃음을 참으며 달랬다.

    “입적한 후 처음으로 가는 거요. 그대의 몸이 아직 약하다고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할마마마가 그대를 매일 불렀을 거요. 내일은 아바마마도 꼭 알현해야 하오.”

    “제가 아팠으니 그런 거죠. 대비마마께서는 증손자에게 푸욱 빠지셔서 우리는 잊은 줄 알았는데.”

    “빠지셨으니까 이 정도지.”

    “알았어요. 나 먼저 잘게요.”

    나는 방으로 돌아와 잠옷만 입고 호신술 연습을 했다. 한씨 상단의 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화약을 구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 경험으로 나는 더욱 내 자신을 잘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안용의 몸이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

    다음 날.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법. 왕실 전용 비누 한 상자와 왕의 서재에 달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상등을 하나 만들어 두었다가 마차에 싣고 갔다.

    왕실 전용 비누는 좀 더 향기롭고, 피부에 좋은 약초가 들어가 있다. 가격이 비싸지만 왕족은 이 정도는 돼야 한다. 일종의 차별화 마케팅 되시겠다.

    “궁 안에서는 제가 비누 사용법을 강의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안내문을 적어왔어요.”

    비누 사용 매뉴얼을 만들어서 종이 하나에 적었다. 체계가 잡혀 있는 왕궁이라면 누군가 맡아서 교육하겠지. 이미 비누에 대한 소문이 궁 안까지 퍼져 있기 때문에 내 비누를 손꼽아 기다린다고 들었다.

    “잘했소.”

    “할마마마의 손과 발은 내가 씻겨드리고 싶어요.”

    “그런 일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현대의 마케팅기법을 하나도 모르는 목선후가 내 효심에 감동한 눈빛으로 내 손을 잡았다. 막 찔린다.

    “아바마마는 공자님이 씻겨 드리세요. 이십 년 만에 찾은 아들이잖아요.”

    우리의 장래가 얼마나 편하냐는 왕의 손에 달려있으므로 나는 남편을 이용하는 데 전혀 양심이 꺼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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