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보내줄 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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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씨 집안 사랑채.
목선후가 부모님께 절을 올렸다. 그다음 목이후에게 절을 했다.
배가 부른 형수는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이 자리에는 지난 이십일 년간 자신을 아들로, 동생으로 키워 준 사람들을 위한 자리였다.
“흠, 흠. 네가 어딜 가든 너는 이 집의 둘째이니라. 만약 전하께서 인정하신다면 말이다.”
“전하께서는 아버님과 어머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형님도요.”
목선후가 붉어진 눈자위로 목이 메어 천천히 말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분들을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자신은 두 사람의 울타리가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너무 연약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네 처가 아직 연약하니 처가에 있는 게 흉이 아니다. 집이 마련될 때까지 처가에 있거라.”
“네, 어머님.”
“집은 어디에 마련할 예정이냐?”
목이후가 물었다. 그는 지금 대단히 충격이 컸다. 이십일 년을 동생이라고 알던 아이가 사실은 숨겨진 왕자였다는 사실을 듣고 어느 정도 배신감과 혼란을 느꼈다.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면서도 한 번도 내색하지 않은 목선후를 생각하면서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쩐지 우리 형제 보고 닮았다는 사람이 없더라. 새삼 절세미남인 목선후를 뜯어보며 목이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도성을 떠나는 것도 고려해 봐야지요. 진욱 왕자님의 봉토가 동부에 있으니 그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다.”
어사중승의 말이 맞았다. 왕이나 대비는 목선후가 도성을 벗어나 얼굴을 보기 힘든 곳으로 떠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목선후는 떠나고 싶었다.
열에 들떠 사경을 헤매던 안안용이 부르던 이름. 인수. 그 한인수가 있는 도성이 싫었다.
가족들은 안안용의 회복이 기뻐서 그냥 넘어갔지만 목선후는 안안용이 중얼거린 이름 때문에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안안용은 아직도 한인수를 잊지 못하고 있구나.
죽을 만큼 아플 때 부르는 이름이야말로 진심일 터. 늘 장난을 치고 웃던 아내가 이제는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혼인 초기에 안안용이 얼마나 한인수를 그리워했는지를. 말로는 원하면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로 못 한다.
우울해지는 목선후의 얼굴을 보던 목이후가 어깨를 다독였다.
“나도 네 얼굴을 못 보는 건 싫구나. 웬만하면 도성에서 살면 좋겠다. 안씨 집안과 우리 집 사이에서 집을 구하면 어떠냐? 양쪽에서 가까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어사중승과 목이후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애썼지만 목선후의 표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
아플 때는 이대로 죽을 것 같았는데 조금 나았다고 또 바로 외출하고 싶어졌다. 내 기분을 아는 어머니가 안씨와 목씨 중간쯤에 있는 저택 중에서 마음에 드는 저택이 있는데 내가 나으면 목선후랑 같이 가서 보자고 했다.
“그냥 여기 별당에서 살면 좋겠는데.”
“안 된다. 방계이긴 하지만 종친인데 어찌 처가살이를 한다는 말이냐. 그것은 왕실과 진욱 왕자님께 대단한 모욕이란다.”
“그런가요?.”
“목 서방, 그렇지 않나?”
“맞는 말씀입니다.”
내게 죽을 떠먹이던 목선후가 대답했다. 입적이 마무리되어 마음대로 사위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오 여사님은 모든 일에 목선후의 동의를 구했다. 이러다 귀찮아서 빨리 분가하자고 하겠어.
진심으로 나는 여기가 좋지만 목선후의 입장과 진연을 손자로 입적시킨 진욱 왕자 편에서는 허락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리고 장진한, 그놈이 아직 안 잡혔으니 조심해야 하네. 세자빈 마마의 출산이 끝나기 전에는 장씨 집안은 아무 처벌도 내릴 수 없으니 나는 좀 그렇네. 마음이 놓이지를 않아.”
세자빈 마마의 출산은 오늘내일 하신다는 전갈을 대비 전의 김 상궁이 가지고 왔다. 대비마마의 명으로 내가 얼마나 회복되었는지 확인하러 오면서 선물도 몽땅 들고 왔는데 통 큰 오 여사님이 그만큼 많은 선물을 또 들려 보냈다.
이제 왕실이 안안용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니까 어머니도 사돈댁에 할 수 있는 성의를 보이고 싶은 모양이다.
안씨 상가의 번창과 한씨 상단의 제1투자자로써 많은 이득을 본 후라, 아버지는 어머니가 상가 한 채를 통째로 팔아서 선물을 사서 보낸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고 말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동생 중에 안신이는 공부를 포기했지만 안중이와 안문이는 열심히 하고 있다. 올해 증광시라는 임시 과거시험에는 응시하지 못하겠지만 이 년 후에는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무식한 안씨 집안이라는 타이틀을 벗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분가하면 동생들을 봐주기가 어려운데.”
“선생을 더 들이면 된다. 돈을 많이 주면 좋은 선생이 오지 않겠니?”
그렇게 쉬우면 지금까지 왜 못하셨는데요? 돈이 많으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도 공부하겠다는 의지보다는 효과가 적답니다.
“민아를 다시 불러야겠어요. 민아 덕분에 동생들이 더 열심히 하는 거예요. 경쟁이 되잖아요.”
“그래야겠다. 오갈 때 하녀 말고 든든한 호위무사를 붙이면 괜찮지 않겠니? 아유, 장진한이 안 잡혀서 이래저래 복잡하구나.”
어머니가 나간 후 죽 그릇을 내려놓은 목선후가 나를 다시 침상에 눕혔다.
“잠시 나갔다 올 거요. 오늘 밤 못 돌아올지도 모르니 나를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요.”
“어디 가려고요?”
내가 소매를 잡자 목선후가 싱긋 웃었다. 절제되긴 했으나 상큼한 미소였다.
“그대가 조금 안정됐으니 장진한을 찾아야지. 세자 저하는 세자빈 마마 때문에 손을 쓸 수 없다오.”
내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서 목선후의 목을 껴안았다. 장진한을 떠올리자 몸이 떨리고 코끝이 매웠다. 그날의 충격과 참상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 눈을 꼭 감았다.
“안용, 괜찮소. 풍월문이 찾을 거요. 내가 하는 게 아니오. 나는 그럴 힘은 없다오. 그리고 내 호위는 전하께서 보낸 자들이라 천하무적이오. 일선과 이선은 그대도 본 적이 있을 거요.”
“일선과 이선이라고요? 혹시 삼선도 있어요?”
고개를 들고 남편의 높고 곧은 코를 올려다보며 가볍게 물었다. 묻기는 했지만 정말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있소. 아주 가까이에.”
“가까이에? 누, 누구?”
목선후가 목을 가다듬고 조그맣게 말했다.
“말순이요.”
연애는 일 등급, 공부는 등급외인 나의 말순이? 팽문을 짝사랑한다던 그 말순이? 등골이 으스스 서늘해졌다.
“혼인 직전에 장인어른이 갑자기 말순이라는 하녀를 데려왔는데 이상하지 않았소? 새로 온 하녀를 시집갈 때 딸려 보내는 것도 일반적인 일은 아니고 말이오. 그런데 그대는 하나도 의심을 않더군.”
당연하지. 나는 혼인한 지 두 달 후에 왔으니까 예전부터 있던 하녀인 줄 알았지.
“그, 그 말순이도 무술을 하나요?”
나는 그 애가 등급외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가끔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는데 팽문에 대해서 너무 맹목이라 그저 평범한 여자애라고 생각했었다. 짝사랑을 위장술로 사용하다니 현대의 스파이도 배워야 할 한 수다.
“무술을 하긴 하지만 고수는 아니요, 말순은 그대를 가까이에서 보호하려고 보낸 거요.”
“혹시 사선은 정 공자?”
목선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선은 얼굴은 모르지만 추적술이 뛰어난 남자라는 말은 들은 적 있다.
나는 목선후의 가슴을 밀고 털썩 누워서 등을 돌렸다. 주위에 스파이들이 깔려 있는데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니 배신감에 입안이 썼다. 나의 말순이 사실은 너의 말순이었던 거야? 내가 치트키로 가려낸 실력파 선생이 너의 밀정이었고?
“안용, 화 난 거요? 말하고 싶었지만 그대가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어려울까 봐 그런 거요.”
“말순이가 팽문이를 좋아하는 것은요? 연극이었나요?”
“어, 금시초문이요. 팽문이는 모르는 것 같던데?”
나는 일어나 앉았다. 말이 나온 김에 다 알아야겠다. 내가 일어나 앉아 눈을 부라리자 목선후가 긴장해서 턱을 굳혔다.
“또 궁금한 게 있어요. 공자님과 풍월문주와는 무슨 관계예요?”
“그건.”
“속일 생각 마요. 특별한 관계인 거 눈치챘다고요.”
갑자기 목선후가 나를 확 껴안았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가슴에 내 얼굴을 짓이기듯이 강하게 끌어안고는 내 귀에 속삭였다.
“내 어머니의 아들, 이부 형이라오. 이건 아무도 모르오. 왕실도 장인어른도 모르오. 이게 내가 가진 마지막 비밀이오. 그대에게만 말하는 거요.”
내 턱을 손으로 받쳐 올리며 덧붙었다.
“우리가 청운각에 갔던 날을 기억하오?”
어떻게 잊을까? 바로 그 청운각에서 나를 기생취급하던 갑질 대마왕을 만났는데.
“우리의 모습을 이 층에서 봤다더군. 그래서 우리를 모욕한 두 사람에게 대가를 치르게 한 거요.”
“혹시 부채로 얼굴을 가린 젊은 남자?”
“나보다 겨우 세 살 위이니 젊은 건 맞지만 그날 나는 그를 봤더라도 누구인지 몰랐을 거요. 나중에 들었으니까.”
이 층에 앉아서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를 주시하던 일 등급! 내가 다른 것은 다 잊어도 등급은 못 잊는다.
만약 그 사람이 풍월문주라면,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많지만.
“공자님 어머니는 대단한 분이셨을 거예요.”
아들 둘이 다 일 등급이니까. 목선후는 외모는 아버지를 머리는 어머니를 닮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칭찬하자 목선후의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가에는 마성의 보조개가 패였다.
“형은 태어나자마자 풍월문을 물려받았다고 하오. 문파의 장로들이 키워 주었고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와 나의 소식을 장로들에게 듣고 나를 보러 환성에 온 거요.”
“공자님도 형님의 존재를 몰랐겠네요?”
“부왕께서도 어머니가 과부라는 사실만 알고 풍월문주의 아내였던 건 모르셨소. 당연히 나도 형님이 와서 말해 주기 전까지는 몰랐지.”
“그러면 아버지가 풍월문주와 한 계약은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