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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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동안 안씨 집안에는 짙은 먹장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안안용은 조금 나아졌다가 또 악화되곤 했는데 어의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흔들었다.
왕실을 위해 일하는 최고의 어의와 최고의 약재를 쓰고 있지만 폐렴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병이었다.
하루는 세자가 안씨 저택으로 잠행을 나왔다. 여인의 침실에 들어갈 수 없어서 침실 옆 상방에서 목선후와 단둘이 얘기만 나누다 돌아갔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돌아가는 세자의 낯빛은 매우 어두웠다.
장씨 저택에 있던 장현봉은 잡혔으나 장진한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장진한이 없어도 국청을 열어 장씨 집안의 죄를 입증하고 처벌하는 건 쉬운 일이었으나 세자빈의 출산 예정일이 코앞이었다. 기다려야 했다.
영리한 세자빈은 산실청에 들어앉아서도 일의 결과를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친정아버지가 보낸 자들이 세자를 죽일 뻔했다는 일은 알지 못했다. 세자 역시 누구에게도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만약 왕실이나 문무백관이 사실을 알게 되면 세자빈은 출산 후 폐위된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목선후를 죽이려고 했는데 세자가 닮아서 실수를 했으나 세자인 줄 알고 풀어주었다고 설명했다.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달아난 장진한과 사경을 헤매는 안안용뿐이다. 세자는 안씨 집안에 잠행을 나갔을 때 목선후에게만은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의 생명을 살린 안안용의 남편이니 그 정도는 알 권리가 있었다.
장씨 집안의 처벌도 세자빈의 출산 이후로 미뤘다. 지금 장씨 저택은 빙 둘러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쥐새끼 한 마리 드나들지 못했다.
집 안에 쌓아놓은 식량이 없었더라면 모두 굶어 죽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비가 왕과 진욱 왕자를 청했다.
“이제 이 일은 미룰 수 없겠습니다. 나는 선후, 아니 연의 뜻대로 해 주고 싶습니다.”
“어마마마, 소자는…….”
대비가 왕의 말을 끊었다. 불경스러운 일이었으나 이번에는 개의치 않았다.
“살다 보면 욕심을 버려야 할 때가 있고, 정을 끊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놓지 못해 손에 움켜쥐고 있을수록 더 멀어지는 법입니다. 놓으세요. 그러셔야 합니다.”
“어마마마.”
“연의 어미에 대한 사랑을 잊지 못해 그러는 거 압니다. 하지만 연과 그 어미는 다른 사람이에요. 두 사람을 분리시키세요.”
왕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인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날들을 이제 완전히 잊어야 하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놓아야 할 것을 끝까지 움켜쥐고 있다가 망하는 것을 보았다.
왕인 자신도 정치에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가?
이성은 대비의 말이 맞음을 알지만 가슴은 묵직하게 아파왔다.
“생각해 보세요. 권력만 있어도 되는 사람이 있고, 권력만으로는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연은 권력만 있으면 되는 아이는 아니지요. 아드님처럼요.”
대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세자가 되지 않겠다고, 형님을 폐위시키지 말라고 부왕에게 간청하던 이 아들을. 자신도 그래놓고 왜 자신의 아들은 이해하지 못할까?
“전하, 대비마마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비록 지금은 소신의 족보에 오르겠지만 조용해지면 군에서 왕자의 품계로 올리시면 됩니다. 선례도 있습니다.”
“…….”
왕이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밖에서 상선이 들어와 조용히 아뢨다.
“전하, 대비마마. 세자 저하 드셨사옵니다. 어찌 하올지요.”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세자의 의도와 할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자의 말을 들을 때도 됐습니다.”
이렇게 말한 대비가 상선에게 명했다.
“들이라.”
곧 상선의 뒤를 따라 단정하고 품위 있는 걸음걸이로 세자가 세 사람 앞으로 걸어 들어왔다.
“소자, 인사 올립니다.”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 세자가 반듯이 앉자 세 사람은 세자의 입을 주시했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에 따라 결정이 달라진다.
세자는 이미 전후 사정을 왕으로부터 직접 들었고 왕 앞에서는 목선후를 형님이라고 스스럼없이 불렀다.
“형님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진욱 왕자님께 입적되지 않으면 목선후로 남아 있다가 아내와 함께 세상 유람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겠답니다.”
“뭣이?”
“뭐라고 했느냐?”
왕과 대비가 체면도 있고 소리를 질렀다.
“그, 그런 불효막심한.”
왕이 푸들푸들 입술을 떨었다. 왕보다는 나았지만 대비 역시 분노했다. 그 아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그 아이를 떳떳하게 보고 싶어서 이 모든 일을 꾸몄다. 그런데 아예 떠나 버리겠다고? 눈앞에서 사라지겠다고?
“그, 그게 사실이냐? 괜히 떠보는 것이 아니고?”
“아니옵니다, 할마마마. 그럴 성격이 아님은 저보다 할마마마께서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하옵니다.”
세자는 폭포 아래에서 잠깐 본 뒤 두 번째로 안씨 저택에서 목선후를 만났다. 두 사람은 얼굴만큼이나 성격도 닮아 있었다. 눈빛만 봐도 대략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형님은 진심이십니다.”
세자가 한 번 정한 결심은 흔들리지 않고 지키듯이 목선후의 결심도 단호했다.
“소자는 그렇게 살고 싶어도 못 살지만 형님은 자유롭게 살게 해 주십시오. 먼 훗날에도 소자가 형님을 절대로 홀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정에게도 그 사실을 주지시키겠습니다.”
정은 왕의 후궁이 낳은 두 살짜리 막내아들이다. 만약 세자가 후사가 없으면 그다음 순서는 정 왕자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느냐?”
“네. 아바마마.”
세자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세자의 성격을 잘 아는 왕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안용이는 어떻더냐?”
대비가 성급하게 물었다. 원래는 형수는? 이라고 물어야 하지만 익숙지 않아서 잊어버렸다.
“아직 위험하옵니다. 열흘은 더 지나야 안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네가 보았느냐?”
왕이 물었다. 왕은 아직 한 번도 안안용을 본 적이 없었다. 상등을 만들었다는 똑똑한 며느리를 빨리 보고 싶었다.
대전에 걸린 상등을 바라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고 상등을 만들었다는 안안용을 만나서 어떻게 저런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 또 무엇을 만들어 왕실을 기쁘게 할지 궁금했다.
“못 뵈었습니다. 아직도 병이 중해서 형님께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세자는 그녀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다는 말을 듣자 어쩌면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번만 보고 싶었다. 그 잠깐 사이에 얼마나 다양한 말과 행동을 하던지 그녀를 생각할 때면 헛웃음이 나왔다.
세자는 태어나서 처음 나뭇가지를 주웠고, 여인에게 손목이 잡혔고, 여인에게 등을 떠밀렸으며, 여인이 자신의 앞에서 젖은 신발을 벗는 모습을 보았다. 모두 생애 최초의 경험이었다.
제일 웃기는 모습은 나뭇가지 두 개에 걸려 있는 젖은 신발이었다. 가죽은 마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모닥불 옆에 둔다고 마를 가능성이 없었다. 말해 줄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여인은 자신을 어린 동생처럼 편하게 대하고 있지만 자신은 언행에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이 나라의 세자다. 웃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세자의 눈치는 전혀 보지 않고 나름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세자는 아직도 따끔거리는 눈과 코와 목구멍 때문에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참고 여인이 안 보는 사이에 얼른 콧물을 닦았다.
세자 앞인데 여인은 옷고름이 떨어져 나간 줄을 못 느끼는지, 맨살이 드러난 저고리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평민 여인이라 그런가?
머리카락 한 올만 흐트러져도 부끄러워하며 새로 단장하는 세자빈이나 임 승휘와는 완전히 달랐다.
여인이 추위 때문에 벌벌 떠는데도 세자는 모닥불을 피워 주는 것 외에 또 무엇을 해 줘야 하는지 몰랐다. 철릭 저고리도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앞가슴이 비치니 가리라는 뜻이었지 추위를 막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세자는 타인의 결핍과 필요를 이해하지 못했다.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여인이 저고리를 받으며 띠는 반가운 미소를 보자 여인에게 진작 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안안용은 그 옷을 돌려주었다. 섭섭했다. 추워서 오들오들 떠는 주제에, 감히 세자가 주는 옷을 거절하다니.
그런 여인이 목선후를 보자 정신을 잃고 달려가서 남자의 품에 안겼다. 품위나 체면은 다 던져 버리고.
세자가 눈앞에 있는데. 아니 세자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그때 세자는 목선후를 처음 보았다.
자신이 구리거울을 보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닮은 얼굴 때문에 부왕과 자신 사이에 저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부왕도 저 여인도 나보다 목선후를 더 좋아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던 세자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안씨 집안에 어의와 의녀와 약재를 풍성하게 보낸 후에도 쉽게 찾아갈 수가 없었다.
보름 만에 참지 못하고 갔는데 여인은 아직도 누워 있었다. 그냥 그녀가 무사한지 보고 싶었다. 그녀가 높은 폭포에서 망설임 없이 뛰어내릴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지금도 생각날 때면 가슴이 철렁한다. 정작 사내인 자신은 망설이고 있었는데.
목선후, 아니 형은 우울해 보였다. 아내의 병이나 자신의 신분 말고도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달아난 장진한 때문이겠지.
세자로서 최선을 다해 빨리 잡아들이겠다고 약속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장지문 너머로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하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세자는 하녀가 문을 열 때 눈동자에 힘을 주고 방 안을 살폈지만 안안용은 보이지 않고 침상 끝만 살짝 보일 뿐이었다.
“아씨께서 공자님을 찾으세요.”
잠행 나온 세자를 못 알아본 하녀가 목선후만 보고 말했다. 목선후와 세자는 서로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몸을 돌렸다. 목선후는 안안용의 방으로 자신은 상방 밖으로.
회상에서 빠져나온 세자는 대비를 향해 말했다.
“가끔 정신을 차리면 대비마마께 심려를 끼쳤다고 송구하다고 말한답니다.”
“아이고, 그 애가 그렇게 다정하느니라. 내 안마도 곧잘 했다.”
대비는 안안용이 손가락 힘이 없어 안마가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또 까먹었다.
“김 상궁에게 다녀오라고 해야겠습니다. 이제 이 늙은이는 쉬어야겠으니 가서 나머지 일을 마무리 지으세요.”
대비의 말에 세 남자는 일어나서 대비에게 절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남은 일은 진욱 왕자의 족보에 진연 이라는 이름을 올리고 왕의 승인을 받고 세상에 발표하는 일이었다.
“세자야, 이번 일은 네가 맡아서 처리하거라.”
“네, 아바마마.”
세자는 부왕이 자신에게 이 일을 맡김으로써 새로 생긴 형제 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고 세자를 여전히 총애함을 보여 주려 한다고 느꼈다.
“산실청에서는 소식이 없느냐?”
“네, 아직이옵니다.”
왕은 첫 손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최소한의 후계 구도가 완성되기까지는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