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인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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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금만 더 빨리 갔더라면.
목선후가 친척의 혼례식에서 도성으로 돌아온 시각은 이미 신시 말이었다. 막 옷을 갈아입고 쉬려는 찰나 정오와 말순이 달려와 안안용이 목선후 대신 세자를 만나러 갔다는 말을 전했다.
세자가 보내온 마차를 탔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만나러 간 사람이 세자이니 위험한 일은 없다고 했다.
목선후는 팽문과 일선을 데리고 청운각으로 달려갔다. 세자가 청운각에서 목선후를 만나려 했다는 것까지는 이해가 갔지만 다른 장소로의 이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자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세자는 무슨 일을 하든 직선적이고 정직하게 처리했다. 말을 타고 달려가면서 안용을 데려간 자는 세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점점 커졌다. 목선후를 노리는 다른 자.
장진한.
그자가 아니고서는 세자의 이름까지 팔아 가면서 이런 짓을 할 자가 없다.
목선후가 청운각에 도착하자 세자 익위사가 한 명 기다리고 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주었다.
목선후의 예상대로였다. 안안용이 잡혀갔고 세자가 겨우 익위사 세 명을 데리고 서중 호수의 사당으로 쫓아갔다. 겨우 그 적은 숫자로. 세자의 오판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솔직히 미덥지 않았다.
목선후는 미간을 좁히며 어금니를 물었다.
장진한이 안용을 잡아갔다. 그 여린 여인을. 가슴이 콱 막히고 피가 빠져나가며 온몸이 싸늘해졌다.
걱정과 불안, 그리고 분노가 치밀어서 세상을 다 부숴버 리고 싶었다. 안용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장씨 집안은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겠다. 맹세한다.
목선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자비하고 원색적인 살인 충동을 느꼈다.
“세자 저하께서 가셨고 익위사들의 무공은 탁월합니다. 공자님, 아무 일 없을 것입니다.”
팽문이 달랬으나 목선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팽문아, 안씨 집안에 이 사실을 알려라. 나는 일선과 함께 서중호로 간다. 만약 버려진 사당에 우리가 없거든 이선과 오선에게 우리를 추적하라고 해라.”
버려진 사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목선후는 그들이 사당에 그대로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세자 익위사는 괴물처럼 강하지만 인간이므로 한계가 있다.
게다가 장현봉. 그자가 도성에 돌아와 있다. 젊고 미숙한 장진한과 달리 그는 닳고 닳은 능구렁이다. 이런 구린 일을 한두 번 해 보았겠는가. 분명 성공할 수밖에 없는 방도를 마련했을 것이다. 조바심에 입술이 말랐다.
“팽문아, 안씨 집안에 알린 다음에는 궐향에게 가서 장씨 집안을 감시하라고 전해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네.”
팽문은 바로 알아들었다. 원흉은 장씨. 장씨 저택을 감시하다 보면 아씨나 세자의 안위를 알아볼 수도 있다. 그 일에 풍월문 만큼 적당한 사람들은 없다.
“공자님, 일선만 데리고 가시면 위험하옵니다.”
“여기 익위사도 한 사람 있다. 우리는 괜찮으니 어서 가거라.”
팽문이 출발하고 목선후는 익위사와 일선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미칠 것 같이 불안했다.
안용, 제발 무사해다오.
이를 악물고 달려가는 길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힘없이 쓰러지는 안안용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연약한 여인인데. 얼마나 힘이 없는데.
그녀를 아끼느라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른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욕망을 억누르기는 어려웠지만 편안히 잠든 모습을 보면 그럴 가치가 있었다.
안안용의 이마에 난 잔머리의 위치와 입술 가운데 패인 작은 주름까지 눈에 선해서 언제든 그녀가 없어도 그녀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리지 않았다. 그가 그린 그림은 논어 제7에 끼워져 있는 그림 한 장뿐이다. 그녀를 온전히 표현할 자신도 없었고 초상화가 없어도 언제 어디서든 그녀를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납치되었다. 나 때문에.
장진한, 장현봉, 용서하지 않겠어.
목선후는 말 등에 납작 엎드려 속도를 높였다. 노련한 세자 익위사와 일선도 그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버려진 사당에 도착했을 때 죽어 넘어진 수십 명의 무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었다. 동행했던 익위사는 죽은 동료들을 알아보았다. 시체를 뒤졌지만 세자와 안안용과 장진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한기가 도는 목선후의 눈에 서산을 물들인 붉은 노을이 비쳤다. 눈도 마음도 핏빛이다.
어두워지면 더 찾기 어려운데.
삐이익!
그 순간 날카로운 명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자 저하십니다!”
감격한 세자 익위사가 소리쳤다.
세자는 무사해? 안용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주군을 보며 일선이 말했다.
“아씨는 세자 저하와 함께 있으실 겁니다.”
“명적이 울렸으니 됐습니다. 가장 가까운 관아와 동네에서 사람들이 달려올 겁니다.”
관아는 명적이 울리면 사정을 알아보고 처리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백성들은 관리의 말을 듣게 되어 있다. 인원이 많이 오면 찾는 데 어려움이 없다.
세자 익위사가 명적이 쏘아진 곳으로 방향을 잡았고 세 사람은 폭포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가느라고 조금 돌아가는 동안 근처의 마을과 관아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폭포 아래로 내려가자 폭포 아랫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방향 끝에는 깜빡이는 모닥불 빛이 보였다.
목선후는 미친 듯이 말의 엉덩이를 때리며 달려 나갔다.
내 눈으로 그녀를 보고 내 두 팔에 안고 그 따뜻함 부드러움을 느끼기까지 숨도 쉬고 싶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는 나에게 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구나.
모닥불 주변에는 두 사람이 있다가 작은 한 인영이 달려와서 말에서 내린 목선후에게 몸을 던졌다. 말 그대로 붕 떠서 자신을 온전히 맡겼다. 찢긴 옷과 헝클어지고 젖은 머리카락.
추위와 공포로 덜덜 떠는 차가운 안용을 안으며 목선후는 모닥불 가에 서 있는 세자를 쳐다보았다.
세자의 흰 철릭은 핏물이 씻겨 연분홍으로 물들어 있었으나 부상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세자의 안위를 확인하자 목선후는 미련 없이 안용을 안고 말에 올랐다. 품안의 아내는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안안용이 죽을 각오로 버텼음을 목선후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안안용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왕실의 일조차 안안용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축 처진 여인을 안은 가슴이 너무 아파서 목선후는 어둠 속을 노려보며 말을 재촉했다.
목선후와 안안용의 뒷모습을 세자는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후 세자의 안위를 걱정하던 마지막 흰 철릭이 다가와서 무릎을 굽혔다.
“궁으로 달려가 제일 실력이 좋은 어의를 안씨에게 보내라.”
횃불을 하나 치켜든 익위사가 왕궁을 향해 달려갔다.
***
“쌤, 일어나요. 쌤, 이대로 자면 죽어요. 쌤, 일어나라니까요. 깨어나라고요.”
끈질긴 녀석. 지지리도 말도 안 듣고 구층에서 뛰어내린 주제에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내 인생이 너 때문에 꼬여서 여기까지 왔다고.
“냅둬.”
“쌤, 이러면 저 화낼 거예요. 제가 다시 그리로 가요?”
안개처럼 뿌연 세상을 조금씩 헤치며 앞으로 나가다가 문득 김인수가 이 세계로 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아났는데. 네 부모님은 어쩌고.
“너, 식물인간에서 깨어났지? 그런데 왜 여기 돌아오겠다는 거야? 못 깨어난 거야?”
“깨어났어요. 근데 쌤이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여기서 나 혼자 잘 지낼 수 있냐고요. 나보고 염치없는 자식이라면서요. 나쁜 놈이라면서요.”
“인수야, 너무 힘들어. 최선을 다해서 살아도 죽게 돼. 이게 운명인가 봐. 이젠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냥 편하게 내버려 둬.”
“쌤, 쌤. 농담 아니에요. 제가 갈 거예요. 다시 뛰어내릴 거라고요. 지난번엔 운 좋게 살았지만 이번엔 아닐걸요.”
“김인수, 이 나쁜 자식아!”
너무 화가 나서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목선후와 오 여사님의 얼굴이 보였다.
***
나는 폐렴에 걸렸다. 항생제도 없는 시대에. 이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 절반은 무조건 죽어 나가는 중병이 폐렴이었다.
비록 깨어나기는 했지만 나는 반복적인 고열에 시달렸고, 끔찍한 흉통과 기침으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내 폐는 이미 폭포에 떨어질 때부터 죽어가고 있었다.
가위눌림 속에서 간신히 잠들었다가 잠깐씩 눈을 뜨면 늘 목선후의 얼굴이 보였다. 슬픈 듯한, 또는 미안한 듯한 표정이라 마음이 아팠다.
공자님 탓이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혔는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죽을 듯 심한 기침을 했다.
이 시대는 진통제도 수면제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얼음물과 끓는 물을 번갈아 오가는 듯한 생생한 고통에 시달렸다.
“너, 너무 아파.”
어느 날 목선후의 얼굴을 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입술에 귀를 대고 있다가 내 말을 알아들은 목선후의 눈에 습기가 어리더니 투명한 물방울이 뚝 내 뺨에 떨어졌다.
“미안하오, 미안해. 안용, 낫기만 하시오. 그대가 원하면 뭐든 해 주리다. 그대가 한 공자에게 가겠다 해도…… 원한다면 보내주리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너무 아파서 목선후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대단하지 않다. 한때는 나도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장진한이나 남우효 같은 작자를 보았을 때.
하지만 이제 아니다. 생각을 바꿨다. 권력에는 대가가 따른다. 현대인인 내 눈에 사당 앞에 죽어 있던 시신들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끔찍한 비극 앞에서 하나의 사회가 완전히 변한다거나, 수십 년이 지나도 상처는 남아 있다거나, 그 사건 때문에 당사자뿐아니라 옆에서 보는 사람까지 인생이 변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게는 사당에서의 경험이 그랬다. 그 피비린내와 움직이지 않는 공허한 눈동자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현실 파악을 하고 건강해진다면 아주 소박하게 살기로 했다. 제2의 안부자가 되겠다거나, 비누의 대량생산과 화약의 발전을 앞당겨서 이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꿈은 버리기로 했다. 대신.
“공자님만 있으면 돼요.”
힘겹게 속삭였다.
말하고 나서 후회했다. 공자님과, 부모님과 동생들과 안씨 상가만 있으면 된다고 할걸.
그렇게 말해야지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잠들기 직전에 목선후의 아름다운 미소를 보았다. 저세상 미남이 남편인데 이대로 죽을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