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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76화 (76/92)
  • 76화. 나뭇가지를 주워요

    비키니보다는 나은데 뭘.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무사히 살아날 생각만 하자고.

    세자가 내 손을 잡고 울퉁불퉁한 바위를 지나 풀밭 위로 올라섰다.

    “저놈들이 올 텐데 이제 어디로 가요?”

    세자가 나를 내려다보더니 씨익 미소를 지었다. 호수에 빠진 터라 핏물이 씻겨 말간 세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허리에 찬 무언가를 풀어 하늘을 향해 쐈다.

    삐이익! 엄청나게 크고 날카로운 소리가 하늘을 찢으며 사방으로 퍼졌다.

    “명적!”

    내가 소리쳤다. 역사 시간에 듣기만 했던 명적이다. 명적도 아냐는 듯이 세자가 나를 쳐다봤다.

    “이 소리는 우리 편 뿐아니라 적들도 들을 텐데요.”

    딴지를 걸고 싶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죠. 우리 여기 있다고 알려 주는 거잖아요.

    “이미 익위사와 병사들이 나를 찾고 있소. 그자들도 살고 싶으면 우리를 추적하지 않고 도망가겠지.”

    “안 가면요? 명적 소리를 듣고 우리를 더 빨리 찾으면 어떡해요?”

    현대인의 의심병과 끈질김 때문에 또 물었다.

    “저 명적은 아무나 못 쓰오. 나라에서 급박한 일이 일어났을 때만 쓰게 되어 있소. 내가 목선후가 아니라는 증거지. 이걸로 목선후가 아니란 걸 알았을 테니 더 이상 찾지 않을 거요.”

    세자의 논리에 당황해서 불경스럽게도 입이 비아냥댔다.

    “아하, 왜 아까는 쓰지 않으셨어요? 세자임을 증명하는 거라면서요.”

    “아까는 우리가 이기고 있었으니까. 질 거라고 생각지 않았소.”

    부하들의 죽음이 생각났는지 세자는 침울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철릭이 붉은 철릭이 되도록 싸웠는데 세 명 다 죽어 버렸다. 미리 명적을 불었더라면 부하들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도 나도 계속 새로운 적들이 나타날 줄 몰랐다. 심지어 점점 더 강하고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자들로 업그레이드 돼서. 마지막 거인들은 내가 트라우마를 누르고 폭포 아래로 뛰어 내릴 만큼 무서웠다.

    나는 자꾸만 떠오르는 무서운 기억을 잊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를 흔들자 머리카락에서 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얼른 손으로 정수리부터 눌러 긴 머리끝까지 쭈욱 물을 짜 내렸다.

    산속의 해는 빨리 진다. 저녁노을이 세자의 수려한 얼굴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그래도 내 남편이 좀 더 잘생겼다고 속으로 외쳤다. 목선후 승!

    나는 와들와들 떨면서 여유만만인 세자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불이라도 피우자고요. 아, 나에게 부싯돌이 있었지. 나는 어금니를 딱딱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추, 추워서 그러는데 불을 피워도 될까요? 연기를 보고 적들이 우리를 발견하지 않을까요?”

    세자는 떨고 있는 내 턱을 보면서 물었다.

    “그런 것까지 아오?”

    군대 간 친구들이 더한 얘기도 해 줬거든요. 전쟁 영화 보면 더 실감 나게 알 수 있고요.

    “피워도 되오. 다시 말하지만 명적 소리를 들었을 테니 감히 우리를 찾지 않을 거요.”

    “그리고…… 나뭇가지가 필요한데……. 부싯돌은 제게 있어요.”

    세자에게 나뭇가지를 주우라고 했다고 목이 잘리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내가 세자의 목숨을 구한 거잖아. 물론 세자가 위험에 처한 건 내 남편 때문이지만. 더 나아가서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세자의 장인과 처남이고.

    결국 세자 때문이네. 세자가 문제야.

    문제의 세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느릿하게 숲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가면서 바닥을 살폈다. 잘못해서 산불을 내면 안 되니까 적당한 공터를 찾기로 했다.

    잠시 후 우리는 커다란 나무 아래의 공터에 불을 피우고 앉았다. 세자는 불쏘시개가 될 만한 나뭇잎까지도 알뜰하게 주워왔다. 그가 내내 침묵했기 때문에 나도 입을 다물고 불을 피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내 얇은 여름옷은 그사이 조금 말랐지만 대신 체온을 빼앗아서 몸이 계속 떨렸다. 내색하지 않고 조그만 모닥불 곁으로 최대한 가까이 갔다.

    젖어서 흐물거리는 가죽 신발을 벗어서 나뭇가지에 끼어 땅바닥에 콱 박았다. 두 발도 모닥불에 올리고 싶었지만 참고 손만 불 위에서 비볐다. 세자는 내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시종일관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목선후는 잘 웃지 않기 때문에 몇 살 더 젊고 계속 미소를 짓는 세자가 꽤 귀엽게 느껴졌다.

    느낌은 느낌일 뿐. 나중을 생각하면 조심해야 한다. 나는 평민 안안용. 그는 고귀한 세자. 신분을 잊지 말자. 더불어 시대도 잊지 말고.

    “아까 그게 뭐였소, 매운 것 말이오.”

    세자가 느릿하게 물었다.

    “고춧가루 최루탄이에요. 화약과 고춧가루를 이용해서 만들었어요.”

    화약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아서 말해도 상관없다. 시대적으로 이삼백 년 후에는 화약이 상용화되고 국가가 통제하는 중요 사업이 된다.

    “상등을 만들었다는 안씨네 금지옥엽이 그대였군.”

    세자가 나를 금지옥엽이라고 하니 가슴이 간질거렸다. 에휴, 나는 권력에 약하다니까.

    “비, 비누도 만들었어요.”

    “그게 뭐요?”

    “얼굴이나 손이나 머리카락을 깨끗이 씻는 거예요. 몸이 깨끗해져서 병에 잘 걸리지 않게 돼요. 그래서 많이 만들어서 싸게 팔려고요.”

    말하다 보니 이 사람은 이런 데 관심이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는 배다른 형에 관해서 알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그 문제는 내가 말할 내용은 아니다. 왕이나 대비마마나 목선후나 진욱 왕자가 말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 사람이 물으면 뭐라고 하지? 뭐라고 회피하지? 골치 아프네.

    내가 갑자기 설명을 끊자 세자가 물었다.

    “그대의 남편이 생각했소?”

    헐, 뭔가 그럴듯한 생각은 남자만 한다는 거야, 지금? 그런 거야? 세자?

    속으로는 어이없었지만 얼굴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연약해서 부서지기 직전인 안안용이라 그냥 있어도 부드러워 보이지만 미래를 위하여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아니옵니다.”

    우리의 대화를 되도록 내 남편인 목선후에게서 분리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 부분은 고도의 외교술이 필요한 영역이니까. 지금까지 왕이나 대비가 세자에게 그 사실을 숨긴 이유가 있을 텐데 내가 입을 털면 안 되지.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화제전환이다.

    그냥 봐도 소심해 보이는 안안용인데 이제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의기소침해진 여인이다.

    “저, 저하, 언, 언제 올까요?”

    “누가 말이오?”

    “저하의 부하들이요.”

    “저기 왔소.”

    세자가 일어서며 내 뒤편을 보았다. 멀리서 수많은 횃불이 불의 강을 만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와우, 일국의 세자가 길을 잃으니까 온 동네가 찾으러 나오는구나.

    비로소 내가 어마어마하게 높은 분과 같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것도 단둘이.

    “저, 저하, 감사했습니다. 미리 인사 올립니다.”

    허리를 굽혀서 인사한 다음 나뭇가지에 걸어 놓았던 가죽신을 재빨리 신었다. 그리고 옷이 말랐는지 내 앞을 내려다보니까 얇은 비단천은 구겨져 있고 중요한 옷고름이 떨어져 나가서 가슴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세자는 내내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내색하지도 않고 알려 주지도 않았다. 참, 고약한 성격이다. 남대문이 열린 사람을 보면 살며시 알려줘야 한다고 배운 적이 없나 보다.

    어떻게 옷고름 없이 가슴을 잘 여며보려고 하는데 세자가 자신이 입고 있던 피로 얼룩진 하얀 철릭 저고리를 벗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이제야? 아까 엄청 떨 때 주지. 치사하게.

    그런데 입고 보니 피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도저히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어서 도로 벗어서 공손하게 건넸다. 영하 20도의 기온에서 얼어 죽기 전에나 입을 수 있는 지독한 피비린내였다.

    “감사하옵니다만 황송해서.”

    내 말에 세자가 피식! 웃더니 아무렇지 않게 핏물에 절은 철릭 저고리를 입었다.

    세자가 비웃거나 말거나 나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고 횃불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맨 앞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은…… 목선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반가움과 그리움으로 목이 메었다.

    목이 메이고 눈자위가 시큰거렸다.

    나는 세자를 힐끔 쳐다보고 입꼬리를 올린 다음 타다닥 달려가서 말에서 내리는 그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그다음 일은 모른다. 나를 감싼 든든한 팔과 내 어깨에 둘린 옷. 그리고 횃불에 어른거리는 조각 같은 얼굴을 보고 찔끔 눈물을 흘렸다. 아무 생각도 안 났고, 아무 힘도 없었다.

    안도감으로 이전보다 더 떨리는 몸을 굳건한 가슴이 꽉 안았다. 목선후가 내 귓가에 무슨 말인가 속삭였지만 너무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집에, 집에 가요.”

    이 말만을 되풀이했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죽어 넘어져 있던 사람들과 붉은 철릭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마차나 가마가 들어올 수 없는 지형이라 나는 목선후와 함께 말을 타고 떠났다. 우리가 제일 먼저 떠났다.

    세자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빨리 떠나주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 같았다.

    사람들이 너무 닮은 두 사람을 나란히 두고 보면 이상하게 여길테니까. 생각해 보니 정말 세자는 목선후와 닮아 있었다. 어머니가 다른데도 말이다.

    아버지가 왕이라 그런가? 아버지 쪽 유전자가 울트라급 우성이다.

    세자와 목선후가 서로를 봤는지 궁금했지만 나중에 묻기로 했다. 지금은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등 뒤에서 뛰는 목선후의 심장박동과 가슴을 안은 팔과 흔들리는 말 등만 엉덩이에 느껴졌다.

    ***

    안안용이 누워 있는 침상 옆에서 목선후는 밤을 샜다. 추위와 충격 때문에 열이 오르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안부자와 오 여사와 동생들까지 대청마루에서 날밤을 새며 안안용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세자의 배려로 궁에서 나온 어의와 의녀가 안용을 돌보았지만 안용은 새벽까지 열이 내리지 않았다. 어의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열이 내리지 않는다면 화타가 와도 살리지 못한다면서.

    오 여사가 물수건으로 안안용의 얼굴과 손을 계속 닦았다. 물수건을 짜는 오 여사의 등이 들썩였다. 소리 없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물수건을 든 손등 위로 떨어졌다.

    끝끝내 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는 소리 내어 울어 버리면 정말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까 봐서다. 내가 의연해야 해. 내가 힘을 내야 해.

    오 여사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딸이 어린 시절 숨이 막혀 죽을 뻔한 뒤로 잘 버틴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

    이럴까 봐 목선후를 떨어뜨려 놓았건만. 더 철저히 감시할걸. 사랑하는 외동딸이 하는 짓은 뭐든 허용하고 싶었다. 어느덧 마음이 약해져서 목선후와 인연을 확실히 끊지 못했다. 일이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목선후를 만나지 못하게 할걸.

    오 여사는 좀 더 모질게 행동하지 않은 자신이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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