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나는 세자다
내 남편…… 이 아니다. 아무리 피를 뒤집어쓰고, 체구가 비슷하고 얼굴도 아주 많이 닮았지만 내 남편 목선후가 아니었다. 무지하게 닮기만 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세자?
장진한이 보낸 자들이 세자 저하를 목선후로 오해하고 공격했다. 그런데 청운각에 있어야 할 세자는 도대체 여기에 어떻게 온 거지? 나를 뒤쫓아온 걸까? 나는 서신을 보낸 사람이 장진한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세자가 보냈던 것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세자는 안을 휘둘러보더니 내가 숨어 있는 관음상으로 다가왔다. 내가 엉거주춤 관음상에서 나가려는 순간 문이 열리고 턱수염이 고슴도치처럼 뻗친 두 명의 장한이 들어왔다.
사람이 저렇게 클 수가 있나 싶게 키와 덩치가 컸다. 짧은 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 하나의 근육이 보통 남자의 허벅지보다 더 굵었다.
현대인의 이두박근과는 비교도 안 되는 단단함과 연륜이 느껴졌다.
세자는 지쳤는지 잠시 비틀거렸다. 내가 계산한 대로라면 세자팀은 장진한 빼고도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무인들과 싸웠고 세자 혼자 남았다. 그런데 새로운 적들이 나타났다. 태양을 가릴만큼 커다란 몸집의 거인 두 명.
세자 혼자 상대하기에 저 두 놈은 벅찰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는 상대.
세자가 자신의 신분을 밝혀서 저들로 하여금 믿게 해야 한다. 장진한의 목표는 목선후니까 세자인 줄 안다면 공격하지 않겠지.
내 생각대로 궁지에 몰린 세자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나는 세자다. 감히 역모를 하는가. 여기서 내가 죽으면 구족을 멸할 것이다!”
세자의 말에 사내들이 웃기 시작했다.
“이럴 거라고 말했잖아. 자신이 세자라고 할 거라고.”
“이봐.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속을 줄 알았어? 사람을 뭘로 보고. 병신새끼.”
“병, 병신새끼?”
세자는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병신새끼라는 욕이 더 충격인 듯했다.
“하! 내가 살다 살다 이렇게 잘생긴 놈은 처음 보네. 죽이기 아깝긴 한데, 네 운명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하고 잘 가라.”
“감히! 이 나라의 세자를 해치고 무사할 것 같으냐?”
“글쎄, 세자 저하는 멀쩡히 잘 계시다니까? 왕궁에서 말이야. 예쁜 세자빈 마마와 임 승, 승, 뭐라는 마마랑.”
“임 승휘 마마, 자식 그걸 까먹냐?”
“너희가 어찌 아느냐?”
세자의 목소리는 갑자기 차분해졌다. 후궁의 품계까지 알다니 이들은 단순한 파락호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세자는 칼에서 피를 털어내며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떨리는 세자의 다리가 다 보였다. 무섭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겠지.
거인 한 명이 건들거리며 말했다.
“장 대인이 말해 줬지. 이왕 죽는 마당에 누가 죽이는지는 알고 가야겠지? 그래야 저승길이 좀 편안할 거야. 내가 인정머리가 있는 사람이거든.”
“장대인? 장현봉? 그자가 나를 죽이라 하더냐?”
“바로 알아듣네? 맞아, 장현봉 대인께서 네가 세자 저하께 방해가 되니 이 땅에서 사라져 줘야겠다네? 그러게 조용히 숨어 살지. 뭣하러 기어 나왔냐?”
“내가 세자라니까!”
“하! 이 새끼, 끝까지 우기네. 너는 목선후잖아. 쥐새끼처럼 숨어 살던 세자의 배다른 형.”
“뭐? 뭐라 했느냐?”
너무나 놀랐는지 세자가 더듬거렸다. 충격이 컸구나. 관음상 뒤에서 귀를 기울이던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나는 얼굴만 내놓고 소리쳤다.
“세자 저하, 코를 막으세요!”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나자 세 사람 다 관음상을 노려보았다. 무시무시한 칼을 든 세 남자가 동시에 쏘아보자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세자에게 코를 막으라고 했지만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에 그대로 따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내 음성을 아는 목선후라면 몰라도.
“세자 저하,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아요!”
소리 지름과 동시에 불이 붙은 고춧가루 최루탄을 두 사람에게 던졌다. 어차피 세자가 내 말을 안 들을 거라면 이 상황을 빠르게 끝내는 게 나았다. 그런데.
X발!
최루탄이 안 터졌다. 미치겠다.
내가 하는 짓을 귀엽다는 듯이 보고 있는 저 거인들. 저 주먹에 한 번 맞으면 안안용은 백 퍼센트 즉사다. 부싯돌을 치는 손이 저절로 덜덜 떨렸다.
남은 한 개에 불을 붙여 두 놈을 겨냥해 던졌다. 첫 번째는 방향을 가늠하지 못해 방 한가운데 떨어졌었다.
펑!
이번엔 근사하게 터져서 두 놈은 정신없이 몸을 비틀며 눈물 콧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 최루탄도 아니고 고춧가루 최루탄이 얼마나 효과가 오래 가겠는가.
나는 세자에게 달려갔다.
눈물 콧물을 흘리던 세자는 여자인 내가 달려들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는지 뒤로 물러나며 칼을 치켜들었다.
“저하! 저를 찌르시면 안 돼요. 저하 편이라고요.”
조심스레 다가가서 손을 내밀어 세자가 나를 찌르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자 세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여자가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자 세자가 심하게 움찔했다.
여인의 손목을 잡아는 봤어도 잡혀 본 건 처음인 거다. 이 긴박한 순간에 이런 것에 신경을 써야 하다니 한심해 죽겠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만큼 세자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거인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몸부림치자 낡은 사당이 심하게 들썩거리면서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잡아, 저놈 잡아. 놓치면 안 돼.”
“앞이 안 보여.”
“컥컥, 이 미친년, 뭘 뿌린 거냐?”
그걸 왜 말해 주냐? 미친놈들아.
“저하, 저놈들을 한 군데씩 찌르세요. 어서요.”
우리는 사당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려면 문 앞에 있던 두 놈을 치워야 했다. 하지만 고춧가루 최루탄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두 놈은 커다란 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덩치가 너무 커서 고춧가루 용량이 적었나 보다.
그 옆을 무사히 지나가려면 놈들의 어딘가를 찔러야 했다. 나는 세자의 등을 힘차게 떠밀었다.
“아무 데나 찔러요. 빨리요.”
한 번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떠밀려 본 적이 없는 고귀한 세자는 잠시 어벙하게 나를 보더니 내가 눈에 힘을 빡 주자 막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놈들에게 다가가 팔을 쭉 뻗었다.
한 놈은 다리를, 또 한 놈은 옆구리를 베었다. 더 찌르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놈들은 벌써 정신을 차리는 중이었다.
나는 세자의 손목을 움켜쥐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문밖에는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하얀 철릭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젊은 남자들을 보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비록 고춧가루 최루탄이 터질 때 숨을 참고 있긴 했지만 나 역시 눈이 따갑고 숨이 막혔다. 곧 충격과 슬픔과 고춧가루 때문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안안용의 탁구공만 한 폐는 이제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컥컥.”
나는 조금 달려간 후 나무 밑에 주저앉아 구토를 했다. 고춧가루보다 피비린내 때문에 죽을 만큼 괴로웠다. 노란 물만 뱉고 그 자리에 픽, 옆으로 쓰러졌다.
“낭자, 낭자, 정신 차리시오.”
세자가 줄줄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으며 나를 불렀다. 차마 나를 잡고 흔들지는 못하고.
옛날 여자들은 맨몸을 보이지 못해서 치료도 못 받고 죽었다더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냐고. 있는 힘껏 소리를 냈지만 실제로는 모기소리처럼 가냘프게 앵앵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세, 세자 저하.”
“낭자, 정신 차리시오.”
“저, 저를 업으세요. 여기를 떠나야 해요. 곧…… 쫓아 올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힘이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다 세자라면 남녀칠세부동석을 지키느라 내 몸에 손을 못 대고 혼자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죽을힘을 다해 눈을 떴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지금 나는 고대에 살고 있다.
다행히 세자는 엉거주춤 내 팔을 잡고 업으려고 하였다. 내가 조금 도와주자 가뿐하게 나를 업었다. 살았다. 나는 세자의 목을 껴안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세자가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은 하기가 어려웠다.
***
깜빡 졸았든지 기절했든지 어쨌든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세자는 나를 땅바닥으로 내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는 아까의 두 놈이 서 있었다. 분노로 붉게 타오르는 네 개의 눈을 보자 희망이 사라졌다.
부들부들 떨면서 우리 뒤에 있는 폭포를 바라보았다. 제발 깊은 폭포이기를.
“저하, 수영할 줄 아세요?”
“뭐?”
세자가 내게 되묻는 순간.
팟!
등급이 떴다.
3등급.
헐, 이 집안 천재 집안이었구나. 스물이 안 됐는데 삼 등급이다.
“저하.”
세자를 부르며 폭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세자도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몸을 돌리고 벼랑 끝에 섰다.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배울 때는 쉬웠다. 그런데 여기서는 발이 쉽게 안 떨어졌다. 어딘가에서 떨어지는 것은 너무 싫은데.
9층 트라우마가 아직도 생생하다.
고개를 돌려 세자를 바라보았다.
목선후와 닮아서 목선후 같기도 하다.
“저하, 저 죽으면 제 남편을 좀 위로해 주세요. 우리 부모님도요. 너무 슬퍼하지 마시라고요. 그리고 제가 저하를 살렸으니까 그분들에게 잘해 주셔야 돼요.”
또 남길 유언이 없나? 최대한 안씨 집안과 목선후가 유리한 유언을 남겨야 하는데.
“낭자는 대체 누구요?”
세자가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안안용이요오오.”
나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올림픽 다이빙 선수를 상상하며 몸을 던졌다. 시원하고 장엄한 폭포수를 두 눈 뜨고 거꾸로 보다가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충돌의 충격과 차가운 물의 온도로 인해 살갗이 따갑고 폐가 어는 듯했지만 물이 깊어 부딪친 데는 없었다.
곧이어 세자가 뛰어들었는지 풍덩! 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나는 숨을 참고 천천히 물속을 유영했다. 바로 올라가면 그놈들이 우리의 생존을 눈치챈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하얀 포말 때문에 위에서 안 보이는 곳에 이르러 물 밖으로 나왔다. 이상하게 숨이 가쁘지 않았다. 안안용의 폐는 찢어져서 더 이상 아픔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수영 천재든지.
초여름 산속 폭포수는 생각보다 차가워서 나는 세자를 찾자마자 가장자리로 헤엄쳐갔다. 위에 있는 놈들이 우리를 찾아 내려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빨리 어딘가로 가야 한다.
내 손을 잡고 물 밖으로 꺼내던 세자가 못 볼 것을 본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내려다보니 여름용 얇은 비단옷이 몸에 달라붙어 몸매가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