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세자의 위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장진한이 마차에 기대앉은 채 기절해 있는 안안용을 훑어보았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은 너무 연약해 보였다. 곱게 자란 세자빈마마도 이렇게까지 약하고 부드러워 보이진 않은데.
장진한이 손을 뻗어 안안용의 작은 뺨을 쓸었다. 장미꽃잎처럼 부드러웠다. 손끝에서 무언가 절절함이 올라와 단전이 후끈 달아올랐다.
장진한 자신도 모르게 침이 꿀꺽 목으로 넘어갔다.
***
으아아, 미쳐. 아까부터 깨어 있던 나는 장진한의 계획을 다 들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장진한이 더러운 손으로 내 뺨을 만지자 참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버려진 사당에 간다니 거기서는 도망칠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깨어나면 꽁꽁 묶일 것이고 그러면 도망칠 기회는 없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장진한의 손놀림을 잊으려고 애썼다. 최면의 덕인지 나는 완전히 기절한 듯 편안하게 숨을 쉬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끈끈하고 뜨거운 장진한의 손은 내 귀를 만지다가 경동맥이 툭툭 튀는 목덜미로 내려갔다. 장진한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내 턱밑에서 쇄골로 손가락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죽을힘을 다해 참으려 해도 저절로 명치가 꼬이고 숨이 가빠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소매 속에 있는 주먹을 꼭 쥐었다. 점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참았던 숨이 터질 찰나.
“공자님, 도착했습니다.”
마부석에 앉은 수하가 말하자 쯧, 혀를 찬 장진한이 내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장진한이 내린 후 누군가 마찬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르므로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숨만 조금씩 쪼개서 내보내고 소매 속에서 움켜쥔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감각이 돌아오자 손톱에 찔린 손바닥이 둔하게 아파 왔다.
잠시 후 마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 거칠게 내 팔을 당겨 짐짝처럼 어깨에 멨다. 이 시대는 다른 방법으로는 사람을 못 옮기는 거야? 거꾸로 흔들리며 눈동자를 돌려 주변을 보았다. 시야가 뒤집힌 터라 얼른 상황 파악이 안 됐지만 말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려는지 다른 곳으로 끌고 가고 있는 모습은 보였다.
곧 눈앞에 흙과 먼지에 뒤덮인 문설주가 보였다.
삐이걱.
낡은 사당 문이 열리고 푸드득, 먼지를 일으키며 새가 날아갔다. 나는 구석에 함부로 처박힌 채로 옆으로 쓰러졌다. 여전히 기절한 척 온몸을 울리는 충격에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반드시 기회를 잡아서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선후 혼자 와서 개죽음을 당할 테니까.
***
한편, 서신의 내용대로 세는 익위사를 대동하고 청운각 앞에 이르렀다.
세자와 익위사 다섯 명이 청운각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신시 초. 회색 철릭을 입은 다섯 사내는 매우 평범해 보였다.
세자는 작은 삿갓을 써서 얼굴을 감추었는데 누가 볼까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 잘생겨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돌아보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잠행을 나올 때는 어둠 때문에 상관이 없었는데 낮에 나오면 이런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들이 청운각 입구로 가까이 가자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세자 주변의 무사들을 힐끔거리며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다가와 손에 든 서신을 내밀었다.
그는 장진한의 부하로 청운각으로 돌아와 청운각 점원에게 붓과 종이를 사서 재빠르게 서신을 썼던 것이다. 익위사 중 한 명이 받아서 세자에게 전했다.
서신을 펴 본 세자는 피식 웃었다.
“잡아라.”
익위사들이 순식간에 서신을 가져온 사내를 잡았다. 너무 빨라서 피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목선후가 아니다. 그러니 그자 아내의 목숨도 상관이 없지.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해라.”
세자의 음성은 평온했지만 가슴은 뛰고 있었다. 세자궁의 서신용지가 사라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세자빈 주변의 사람, 장진한이나 장현봉이 깊이 개입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세자빈의 입지가 갈수록 위태해지고 있었다.
장진한의 수하도 한 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사람들의 무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어깨를 한 번 잡히자 온몸의 뼈마디가 다 부서지는 느낌이다. 식은땀이 나면서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저항은 아예 불가능했다.
“목선후가 아니라면 누, 누구냐?”
“감히!”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삿갓 옆의 한 사내가 다가오더니 사내의 입을 막고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콰드득.
손가락뼈가 몇 개 가루처럼 부서지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혼이 뽑히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어깨를 잡힐 때부터 힘을 못 쓰던 사내는 이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이들에게는 말도 상식도 인정도 통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순순히 협조하는 거다.
하지만 목선후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지? 누가 또 오늘의 비밀회동을 아는 거지?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지? 극심한 통증과 공포 속에서도 사내는 장진한이 맞닥뜨리게 될 상황이 염려스러웠다. 장진한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기다. 그는 장진한의 온갖 더러운 일에 깊이 발을 담궈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머리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너무나 무섭고 강했다.
세자가 물었다.
“어디냐?”
“서, 서중호수 근처 버, 버려진 사, 사당에 있습니다.”
사내는 포기한 듯 순순히 대답했다. 세자가 익위사 한 명에게 눈짓을 했다.
“너는 남아서 목선후를 기다렸다가 데려와라.”
“넵.”
지목받은 익위사가 뒤로 빠졌다.
세자는 목선후가 도성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목선후가 청운각으로 반드시 오리라고 믿었다.
자신이 여기 남아 목선후를 만나는 것이 가장 편한 길이기는 하지만 지금 목선후의 아내가 장진한 손에 잡혀 있다. 이 일에는 세자빈도 관계가 있는데 만약 목선후의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자빈과 세자 자신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 뿐만이 아니었다. 세자는 더 이상 장씨 집안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세자가 용납할 수 있는 선을 가뿐히 넘겨 버렸다.
“앞장서라.”
익위사 대장이 말하자 사내는 비칠거리며 타고 온 말로 다가갔다. 말을 타고 갈 상황이 아닌 듯했다.
“마차를 가져와라.”
세자가 말하자 익위사 한 명이 재빠르게 청운각 안으로 들어갔다. 세자가 마차를 빌리자는데 청운각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곧 옆 골목에서 마차가 나와 세자 앞에 섰고 익위사가 안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자 세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말을 타고 온 장진한의 수하는 익위사 한 명과 같이 마부석에 앉았다. 그는 손가락이 부러져 말고삐도 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옆에 앉은 사내는 말고삐를 잡으면서도 옆에 있는 자신을 제압할 수 있다는 듯이 여유로웠다.
다른 익위사들은 마차 주변을 호위하며 두 발로 걸었다. 시내를 벗어나자 마차는 빠르게 달렸는데 익위사들은 조금도 처지지 않고 같이 달렸다. 괴물들이었다.
***
연약해 보이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이럴 때는 유용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몰래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남자들이 벌써 다섯. 아까 청운각에 간 자도 있으니 장진한을 빼고도 최소 여섯 명의 사내들이 목선후를 기다리고 있다.
목선후가 얼마나 무술을 잘하는지는 몰라도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이다. 나는 먼지를 들이마시며 은밀하게 향낭 속을 확인했다. 내가 만든 고춧가루 폭탄이 잘 터져야 할텐데.
그때 멀리서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
사당 안에 나 혼자만 남겨두고 장진한과 똘마니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너희는 누구냐!”
“쳐라!”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죽여 버리겠어!”
“죽여라!”
갑자기 밖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며 챙챙챙! 칼이 부딪치는 소리와 몸싸움을 하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재빠르게 일어나 사당 안에 있는 칠이 벗겨진 관음상 뒤에 숨었다. 사방을 살피며 도망갈 곳을 찾았지만 불행히도 사당의 입구는 한 군데뿐이고 입구 앞에는 지금 피 튀기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목선후가 나를 구하려고 달려왔다. 아니, 아니다. 그는 멀리 있다. 혹시 풍월문? 일선이라는 목선후의 비밀 수하?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사당 안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입구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의지와 다르게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안안용의 몸은 짜증나도록 연약하다.
문틈으로 내다보니 회색 철릭을 입은 네 사람이 장진한의 무사 여섯과 싸우고 있었다. 회색 철릭중 한 명은 삿갓을 쓰고 있었고, 세 사람이 그를 보호하듯이 두어 발 앞서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장진한의 수하 중 한 명은 칼을 들지도 못하고 한쪽에 서 있기만 했다.
장진한은 보이지 않았는데 내가 볼 수 없는 곳에 숨어 있나 보다. 비겁한 놈. 대장 주제에 뒤에 숨기나 하고.
그런데 저들은 누구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장진한의 수하와 싸우는 회색 철릭은 금세 붉은 피로 얼룩졌다.
그들의 무위는 장진한의 부하들보다 월등해서 장진한의 부하들이 하나씩 쓰러져갔다. 마지막 남은 두 명. 회색 철릭을 입은 자들은 한 사람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들이 입은 옷은 붉게 물들었는데 모두 장진한 부하들의 피였다. 삿갓이 명령했다. 얼굴을 보지 못해서 꽤 나이가 있는 대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음성이 매우 젊었다. 기껏해 봐야 십대 후반? 하지만 태도가 압도적이다.
“한 놈은 살려두어라.”
“네.”
배후를 알기 위해 한 놈은 살려두라는 거 같아서 ‘그 배후 내가 알고 있어요.’ 말하려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어디선가 일단의 사람들이 칼을 들고 우르르 몰려와서 장진한 패거리에 붙었다.
회색 철릭에게 죽은 장진한 패거리가 동네 양아치 수준이라면 이들은 조직력과 무기를 제대로 갖춘 조폭 수준이었다.
숫자도 많았다. 이제 회색 철릭을 입은 사람들이 매우 불리해 보였다.
겁이 난 나는 돌아가 관음상 뒤에 숨었다.
어떤 불상은 속이 비어 안에 들어가 숨을 수도 있다는데 이 관음상은 속이 꽉 차 있는지 엄청 무겁고 단단했다. 나는 향낭 속에서 부싯돌을 꺼내서 실험해 봤다.
타탁!
단 두 번 만에 지푸라기에 불이 붙었다. 생각보다 빨리 최루탄을 던질 수 있다. 지금은 던지자마자 바로 터져야 할 상황이다. 최루탄 심지가 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송곳니로 심지를 짧게 끊었다. 밖에서 나는 소리는 점점 더 격렬해지고 바람에 실려 오는 피비린내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심해졌다.
제발, 제발. 회색 철릭 팀이 이겨야 돼.
손에 축축하게 땀이 배고 가슴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두 손으로 귀를 반쯤 막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회색 철릭을 입고 삿갓을 목에 건 남자가 들어왔다. 네 사람의 회색 철릭 중에서 삿갓을 쓴 우두머리다.
나는 피를 뒤집어쓴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얼굴의 삼 분의 일 정도는 새빨간 피가 튀어 귀신처럼 보였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