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속았다!
6등급!
오호, 꽤 높다. 저번에 북행궁에서 빨래를 하고 바닥을 닦던 조유정이 8등급이었다. 시녀들은 하루종일 일을 하느라 사서삼경 근처에도 못 가는데도 등급외나 9등급이 아니었다.
이로써 똑똑한 여인들이 궁에 많이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자였다면 과거에 합격해서 이미 중간관리직에 있을 텐데. 현대인인 내 눈에는 그저 안타깝다.
시녀가 돌아간 다음에 서신을 꺼내 읽으려는데 오 여사님이 씩씩거리며 별당으로 건너왔다. 이른 여름 과일이 쌓인 쟁반을 든 하녀가 뒤따랐다.
나는 서신을 소매 속에 감췄다. 어머니의 기분이 바닥인데 나까지 거들 필요는 없다. 세자 전하가 목선후에게 보낸 서신은 어머니의 불안감을 불타오르게 할 수 있었다.
“안용아, 내가 오늘 청운각을 지나다가 송씨 댁을 만나지 않았겠니?”
송씨 댁은 중문 상가에 다섯 채쯤 상가를 소유한 꽤 부유한 집안인데 한 세대에 한 명씩 향시에 합격한 아들이 나왔다. 덕분에 말단이긴 하나 관리 집안으로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안씨 집안의 무식을 늘 침이 튀도록 흉을 봄으로써 상대적으로 돈과 지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자신의 집안을 자랑했다.
“오늘 그 여편네가 못 먹을 걸 먹었나? 대놓고 지껄이더라. 도성에서 제일 무식한 집안이 안씨 집안이라고 말이다.”
이 시대 문맹률이 90퍼센트가 넘으니 우리 집만 무식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부를 가지고도 무식하니 유명해졌다.
현대처럼 명문대에 기부금 입학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여기는 없다. 대신 높은 관리의 자녀들이 종종 과거를 건너뛰고 관직을 받는 경우는 있다. 장진한도 그런 케이스였다.
“요즘 우리 상가의 발전은 유식한 목씨와 사돈을 맺었기 때문이란다. 내 딸이 한 건데 말이야. 그래서 말해 줬지. 상등을 만든 사람도 우리 안용이고, 그리고 그 뭐냐, 비누도 우리 딸이 만들었다고 말이다.”
비누는 이미 소문이 쫙 퍼졌다. 백 명이 넘는 안씨 집 하인들이 사용했으니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도성의 모든 사람들이 가게를 열기만 기다린다고 한다.
“그 잘난 사위가 빛 좋은 개살구인 줄 모르고. 아니다. 빛 좋은 개살구이면 다행이게? 복어야, 복어. 잘못 먹으면 죽는 복어.”
“……!”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렸다. 찰떡같은 비유이긴 한데 듣는 복어의 아내는 기분이 나빠졌다. 오 여사는 밤마다 들르는 사위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른다. 정오와 말순의 입이 정말 무겁다.
아니, 어머니는 그만큼 나를 믿고 있다.
나는 또 미안해져서 오 여사님을 뒤에서 껴안았다. 부드럽고 푹신하고 향기로운 오 여사님의 등에 뺨을 대고 웅얼거렸다.
“어머니, 나는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그깟 일에 화내지 마세요.”
어머니가 화를 가라앉히고 내게 과일을 먹여 주면서 물었다.
“안신이는 그렇다 치고 안중이나 안문이는 어떻게 가능성이 있겠니?”
“네, 있어요. 안신이도 계속하면 될 텐데 본인이 장사가 더 좋다니 할 수 없죠.”
안신이가 몇 달 사이 9등급이 됐으니 남은 동생들도 희망이 있다.
“안용아, 그리고 목 서방 말이야.”
심장이 뚝 떨어졌다.
“네 아버지 말로는 누군가 왕족의 핏줄로 입적시키려 한다던데, 알고 있니?”
“네,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오 여사님이 말을 끊고 크고 반짝이는 눈을 깜박였다.
“네?”
“그렇게 되면 괜찮다고.”
“정말이세요?”
“그래, 솔직히 재혼하는 것보단 낫지.”
백번 낫죠. 어디서 그런 신랑감을 찾나요? 내가 배시시 웃었다.
“감사해요, 어머니.”
“너, 끔찍이도 목 서방을 싫어하더니 많이 변했구나.”
목선후 같은 절세미남을 앞에 두고 옛 연인을 생각하다니 안안용이 절개가 깊더라고요.
“그러면 말이다.”
어머니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이제…… 인수는 완전히 잊은 거 맞지?”
오 여사님에게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번만 더 김인수를 보고 싶긴 하다.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김인수가 부모님과 같이 공원을 산책하거나, 해외여행을 간다고 인천 공항 청사를 걸어간다거나, 가능하면 공부도 잘해서 부모님처럼 의대로 진학한다거나.
뭐, 그런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든다.
퍽!
“아얏!”
어머니가 내 등짝을 후려쳤다. 아름다운 오 여사님, 손맛이 장난 아니다.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아우, 어머니, 왜애?”
내가 칭얼대자 오 여사님이 내 귀에 입을 대고 말했다.
“너, 그 눈빛이 뭐니? 인수는 깨끗이 잊어. 이대로 얌전히 있다가 목 서방이 돌아오면 꽉 잡아, 알겠니?”
이미 그러고 있는데 말할 수가 없어서 우물쭈물했더니 부끄러워 그러는 줄 알고 한 번 더 말 펀치를 날렸다.
“네 아버지 백 명을 모아 봐라. 목 서방만 한가.”
불쌍한 안부자.
“어머니, 아버지께는 이런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시죠?”
이번에는 어머니가 우물쭈물했다.
***
늦게까지 안 자고 기다렸지만 목선후는 오지 않았다. 가끔 안 오기도 하니 그건 문제가 아닌데 받은 서신이 문제였다. 오늘 꼭 목선후에게 전해야 되는 이유가 있었다. 만나자는 날짜가 내일이었다.
세자가 목선후를 만나려고 한다? 서신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시녀는 세자 저하가 보내는 서신라고 분명히 말했다.
청운각의 귀빈실에서 만나자는 세자. 목선후의 정체를 드디어 알아챈 것일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까지 대비마마와 전하도 세자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진욱 왕자 쪽에서 말이 새어 나갔나? 별별 생각을 하다가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세자가 보낸 서신을 들고 목씨 집안으로 갔다. 청운각으로 같이 가기 위해서 나는 남장을 했다. 청운각은 여인은 들여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청운각이 문을 여는 시각은 미시 말. 그래서 약속 시간이 신시 초인가 보다.
초여름다운 날씨에 마차를 타니 창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나는 미리 가서 기다렸다가 목선후와 세자가 만날 때 옆방에서 대기하다가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싶었다.
세자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자신과 닮은 이복형을 보고 형제애를 발휘할 가능성보다는 정치적 계산을 먼저 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내 남편은 내가 보호해야지.
하지만 목선후는 목씨 집안에 없었다.
헐, 세자가 찾는데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어디 가셨대?”
내가 하녀에게 물었다.
목씨 집안 전체가 무슨 친척의 혼인 때문에 하루 거리의 친척집에 가 있었다. 어사중승과 목이후도 휴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젯밤 내게 안 왔던 거구나. 말이라도 하고 가지. 이 시대 남자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
목선후는 안부자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할 수 없이 나 혼자서라도 청운각에 가기로 했다. 일단 세자 저하를 만나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야지.
내가 청운각에 도착했을 때 청운각은 막 문을 열고 있었다. 정오와 말순을 데리고 입구로 다가가니 이마에 끈을 묶은 머슴 차림의 평범한 남자가 입구에 서 있다가 내게 다가왔다. 그가 말을 걸었다.
“목선후 공자님이십니까?”
목선후 대신 왔으니 그렇다고 봐야지. 입은 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이리 오시지요, 라고 말하더니 건물 모퉁이에 세워져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오오, 세자 저하, 치밀한 데가 있네. 첩보전 같잖아.
남자가 뒤따라오는 정오와 말순을 보고 말했다.
“하인들은 데리고 가지 못합니다.”
나는 정오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너희들은 집으로 가서 기다려. 세자저하께서 데려다주실 거야.”
“아씨, 괜찮을까요? 세자 저하께서 아씨를…….”
“그럴 리 없어. 그리고 내게는 이게 있어.”
내가 허리에 찬 향낭 안에는 고춧가루 최루탄 두 개와 부싯돌, 그리고 간식이 들어 있었다. 나는 세자가 상등을 구입하거나 화재를 진압하거나 장진한을 면직시키고 한씨 상단의 배를 출항시키는 행동을 보면서 상당히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정오야, 목씨 저택에도 한 번 더 가 봐. 예상보다 일찍 돌아올지 모르니.”
“네, 아씨.”
남자가 나를 재촉했기 때문에 나는 염려가 가득한 하녀들을 보내고 마차로 다가갔다.
***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는 말순에게 손을 흔들고 마차를 탔다. 지금 말순의 표정은 너무 복잡해서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걱정, 염려, 말고도 무엇인가 더 있었지만 지금은 말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아니었다.
마차에 오른 나는 깜짝 놀랐다. 마차 안에 누군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세자인 줄 알았다가 남자가 얼굴을 들자 알았다. 저 음흉하고 간사한 눈빛.
장진한! 속았다!
세자의 서신은 목선후를 잡으려는 덫이었어. 그 덫에 내가 잡힌 거다.
내가 소리 지르며 마차 밖으로 튀어 나가려 하자 장진한이 뒤에서 내 입을 막으며 마차 벽을 탁탁 쳤다. 말이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미친 듯이 저항했다. 이대로 잡혀가는 것보다 달리는 마차에서 떨어지는 게 나았다. 그러나 장진한은 허용하지 않았다. 목 뒤를 치는 손길에 순식간에 까만 어둠이 내 눈을 덮었다.
***
“어떻게 된 거냐?”
도성을 빠져나온 장진한은 마부석에 있던 수하에게 고함을 질렀다. 장진한이 준비한 네 명의 무사들이 말을 탄 채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왜 이 계집을 데려온 거냐?”
“계집인 줄 몰랐습니다. 자신이 목선후라고 하기에, 그만.”
수하의 말에 장진한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계획을 망친 이 계집을 죽여버릴까, 생각했다. 저 가는 목을 한 손으로 쥐기만 해도 여자는 죽을 것이다. 목선후의 아내를 죽이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하지만 저가 꼬여내려던 자는 목선후다. 만약 도성을 뒤집으며 범인을 찾으면 나나 아버지가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 어렵게 얻은 왕실 서신용지를 써서 꾀어냈는데.
어떡하지? 그때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수하가 입을 열었다.
“청운각에 서신을 남겨두면 됩니다. 아내를 찾고 싶으면 혼자 오라고요.”
“어디로?”
“서중호수의 폭포 근처에 버려진 사당이 한 개 있습니다. 그리 오라고 하면 됩니다. 주변이 풀숲인 데다 나무는 별로 없어서 누가 오는지 잘 보입니다. 혼자 오지 않으면 즉시 아내를 죽이겠다고 하면 혼자 올 겁니다.”
“뻔히 위험한 걸 알면서 혼자 오라고 하면 오겠느냐?”
“올 겁니다. 목선후 같은 자들은 그걸 명예라고 생각하니까요.”
“좋다.”
장진한의 답이 떨어지자 방금 제안을 한 무사가 마부석에서 내려 말을 타고 되돌아갔다. 남은 사람들은 그대로 서중호수를 향해 달렸다. 어쩌면 더 잘됐는지도 모른다. 아내가 인질로 잡혀 있으면 그놈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지.
장현봉은 목선후의 얼굴만 확인하라고 했지만 장진한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경시서령에서 쫓겨난 것도 목선후의 장인인 안부자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