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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68화 (68/92)

68화. 세자의 도움

하루가 지나 화가 가라앉자 세자는 사실을 확인하기로 했다. 며칠 동안 세자의 직속 부관들이 은밀히 조사했고 그날 포목점에서 들었던 말이 모두 진실임을 보고해 왔다.

경시서령이 계속 출항 허가를 안 내준다면 한씨 상단뿐아니라 투자했던 많은 상인들이 줄줄이 도산할 수도 있다는 말에 세자는 기가 막혀 한숨이 나왔다.

나이가 적은 자신도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데.

좌복야였던 장현봉이 낙향할 때 아들을 데리고 내려갔어야 했다. 부친마저 없으니 충언해 주거나 막는 사람이 없어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에 서 있는데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이 이상은 안 된다고 세자빈에게라도 말을 해 둬야겠어. 세자가 막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고.

“저하, 어서 오시옵소서.”

배가 더 나온 세자빈이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으나 방 안은 따뜻하고 아늑했다.

“날이 추워 따뜻한 오리탕을 준비했습니다.”

세자가 화롯가에 앉자 시녀들이 재빨리 음식을 차렸고 세자빈은 따뜻한 물수건으로 세자의 손을 닦아 주었다.

“어제부터 입맛이 없다고 들었소. 아기를 위해서라도 많이 드시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방 안에만 있으니 답답해서 그런지 많이 먹을 수가 없사옵니다. 날이 풀려 밖으로 나가면 입맛도 돌아올 것이옵니다. 염려 마시옵소서.”

세자빈은 총명하고 경우 바른 여인이다. 그런데 오라비라는 자는 왜 이리 다른가? 아니면 세자빈도 내 앞이라 연극을 하는가?

무심코 세자를 올려다본 세자빈은 가슴이 뜨끔했다. 세자의 눈빛이 낯설었다. 차고 굳은 눈빛에 가슴이 떨렸다.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차마 묻지 못하고 일단 식사 시중을 들었다.

“전하, 드셔 보시옵소서. 소첩이 이미 기미하였습니다.”

가냘프고 하얀 손이 자신의 앞접시에 오리탕을 덜어주었다.

“세자빈, 섭섭하게 생각지 말고 들으시오. 경시서령이 월권이 심하다는 소문이라오. 아직 탄핵하는 어사는 없으나 이대로 가면 반드시 문제가 될 테니 어쩌면 좋겠소?”

세자빈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무슨 말인가 하려다 입술을 물고는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세자빈의 모습이 안쓰러운 세자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오라비에게 언질을 좀 주시오.”

내가 막는 데까지는 막아 보겠소, 라고 말하려다가 세자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쉽게 해결해 주면 다음에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송구하옵니다. 소, 소첩이 대신 벌을 청하옵니다.”

“세자빈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자, 자. 그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식사를 합시다.”

세자의 너그러운 태도에 약간 눈시울이 붉어진 세자빈이 숟가락을 드는 순간 밖에서 측근 상궁이 들어와 조용히 아뢨다.

“마마, 경시서령이 들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세자빈이 세자의 눈치를 보다가 대답했다.

“다음에 오시라고 하게.”

“아니다. 들어오라고 해라.”

“저하.”

“자리를 비켜 줄 테니 내가 아까 이른 말을 전하도록 하시오. 빠를수록 좋소.”

세자는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세자가 옆문으로 나가서 세자빈의 침전에 들어서자 장진한이 세자빈이 식사를 하는 방으로 들어왔다.

“마마, 살려주시옵소서.”

인사도 없이 장진한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자 세자빈이 깜짝 놀라 일어서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시녀들이 새파래진 세자빈을 부축했다.

“오라버니, 무슨 일입니까?”

“소신이 모함을 받고 있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소신을 오해하고 계십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주실 분은 세자빈 마마뿐이옵니다.”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무식한 상인들이 세금을 적게 내려고 소신을 음해하고 있습니다. 소신이 엄격하게 세금을 매겨서 원한을 가진 자의 짓입니다. 그런데 세자 저하께서 상인들의 말을 믿는다 하옵니다. 마마, 소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 소신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음을 세자 저하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세자빈은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오라버니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애걸하는데 세자 저하는 분명 그에게 죄가 있다고 말했다. 어느 쪽이 옳지? 머리로는 세자 저하가 맞는데 마음은 눈앞에 엎드려 있는 오라버니에게 끌린다.

세자빈의 침전에서 휴식을 취하던 세자는 소란스러움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경시서령이 세자빈 마마께 간청하고 있습니다.”

“세자빈이 아니라?”

말할 사람은 세자빈이지 경시서령이 아니다. 무슨 염치로 간청을 한단 말인가.

“예, 세자빈 마마께서는 아직 한 마디도 안 하셨습니다.”

내관의 말에 세자가 일어섰다. 이런 식이면 세자빈은 끝내 한 마디도 못 하고 장진한을 보낼 터. 장진한은 탄핵을 받게 된다. 장진한은 그의 잘못이니 자업자득이지만 회임한 세자빈의 심정을 생각할 때 바람직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는 게 낫겠군.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는 세자빈 앞에 자주색 용포가 보였다. 침전에 있던 세자가 나왔다.

하지만 세자가 여기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장진한은 이제 눈물까지 맺힌 눈으로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소신이 너무 열심히 일을 하니 시기와 질투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버님께서 안 계시는데 소신의 뒤를 봐줄 사람이 없어 이리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너의 죄가 없다는 말이냐?”

헉! 장진한이 고개를 들었다. 파리한 얼굴의 누이동생 옆에 신선같이 고고하고 품위 있는 세자가 서 있었다. 눈에 띄게 화가 난 얼굴이다.

세자와 장진한의 관계는 처남, 매부 사이이기 이전에 군신관계다. 세자가 신하를 질책하는 군주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세, 세자 저하.”

“내가 조사했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다.”

“저하, 억울하옵니다.”

장진한이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면 세자는 이 정도로 지나가려고 했다. 처벌도 없고 면직도 없이 너그럽게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동일하게 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말이다.

“억울하다고? 좋다. 경시서령은 들으라. 너의 억울함을 풀어줄 테니 증인과 증거를 모아서 내게 가져오라.”

바로 어사대나 형부로 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세자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그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증인과 증거가 없음을 깨달은 장진한은 이 자리에서 완전한 용서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이 음해를 당하고 있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인데 어디서 증거를 찾는단 말인가.

그는 무릎으로 기어서 세자빈에게 다가가서 누이동생의 치맛자락 끝을 잡았다.

“마마, 세자빈 마마. 이 오라비를 살려주시옵소서.”

“오라버니, 제 치마를 놓으세요.”

세자를 배웅하기 위해 걸음을 떼려던 세자빈이 비틀거렸지만 장진한의 눈에는 그 위태로움이 보이지 않았다. 세자빈은 난처한 표정으로 치맛자락을 빼내려고 손에 힘을 주었고 그 순간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세자빈의 말을 듣고 막 돌아서던 세자의 눈에 장진한이 붙잡은 치맛자락 때문에 세자빈이 철푸덕! 앞으로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마마!”

“세자빈!”

세자와 시녀들이 달려들었지만 너무 놀란 장진한은 손에 잡힌 누이동생의 치맛자락을 놓지 않았다. 몸이 굳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장진한을 세자가 발로 차서 세자빈으로부터 떨어뜨렸다.

“어서 어의를 불러라. 이자를 끌고 나가서 궁 밖으로 내치라. 앞으로 이자는 궁에 들어오지 못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세자가 소리쳤다. 까무룩 정신을 잃던 세자빈의 귀에 오라버니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 아버님, 어쩌면 좋습니까? 왜 오라버니를 두고 가셨습니까? 낙향해 버린 부친이 원망스러운 세자빈이었다.

***

세자빈은 유산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위험하다는 어의의 말에 왕실은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기절했다가 깨어난 세자빈의 간청에 세자는 장진한을 면직시키는 정도로 처벌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세자빈이 더 이상 충격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명에 의해 한씨 상단의 상선은 즉시 출항 허가를 받았다.

포구에 서서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커다란 범선 두 척 보던 통수는 옆에 서 있는 어머니의 어깨를 안았다.

“제가 저 배를 타고 떠났어야 했는데. 하지만 용서해 드릴게요. 어머니.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해요.”

어머니가 통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쳤다.

“이놈아, 어미 아니었으면 네가 안씨 과자점에 들어갈 수 있었겠냐? 용서는 내가 해야지.”

통수는 요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도성 내의 식당이나 과자점은 들어갈 길이 없었다. 그래서 상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서라도 주방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한씨 상단에 대한 아버지의 헌신과 어머니의 정성에 감동했다며 상단주는 안부자에게 통수의 일자리를 부탁했고 식당이나 주루는 없지만 과자점은 어떠냐는 안부자의 말에 통수는 감격해서 얼굴을 붉혔다.

그 유명한 중문상가의 안씨 과자점 주방에 들어가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비록 맨 밑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그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길이 열렸다.

너무 좋아서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 통수는 찬바람이 휙 지나가자 어머니에게 등을 들이댔다.

“발이 아직 안 나았잖아요. 업혀요.”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아들의 등에 업혔다. 아들이 아버지처럼 바다에서 죽을까 봐 미친년처럼 헤매던 여인은 이제 말끔한 얼굴로 웃었다. 어쩌다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가 은인인지는 알고 있다. 안씨 포목점. 그리고 어린 민아 아씨.

“안씨 포목점에 들르자, 네 새 옷을 해 줄게.”

“좋지요.”

통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중문을 향해 걸었다.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차서 그런지 등에 업힌 어머니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그때 통수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뒷모습을 골목 안에서 쳐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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