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67화 (67/92)

67화. 반격

***

안부자가 웃은 지 며칠 후.

세자가 잠행을 나와서 안씨 포목점에 들렀다. 상등이 성공적으로 궁궐을 밝히자 민심을 살피는 잠행 중에 새 주문을 할 목적으로.

사람을 보내도 되나 세자는 안씨 포목점의 분위기가 좋았다. 화재가 나서 자신이 직접 방화범을 잡았던 인연이 잠행을 나온 그의 발걸음을 안씨 포목점으로 향하게 했다. 그의 신분을 알고도 호들갑을 떨지 않고 평이하게 대해 주는 점도 좋았다.

화재 진화를 돕고 범인을 잡았다고 따로 선물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안부자는 세자가 원하는 대로 기가 막힌 상등을 보내왔다.

포목점에 달린 상등에는 촛대가 다섯 개인데 궁궐에 보내온 상등에는 촛대가 아홉 개였고 상등의 크기도 두 배였으며 수정 알들도 훨씬 고급이었다. 그 정도 크기라야 궁궐에 어울린다고 했다.

안씨 상가의 주인이라는 안부자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 알 만했다.

상등이 달린 동궁의 접객실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그 화려함과 눈부심에 놀랐고 동궁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다. 왕실의 권위가 단박에 올라갔다.

상등이 안전하게 잘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한 뒤로 대전과 왕비전 그리고 대비전에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자가 잠행을 나올 때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평범한 심의를 입고 때로 작은 삿갓도 썼는데 이날은 삿갓을 벗고 중문 상가를 지나쳤다.

세자가 떴다는 전갈을 받은 포목점의 점주는 기다리던 순간임을 알았다. 그는 발 빠른 하인을 보내 준비된 인물을 데려왔다.

도성의 여기저기를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세자가 안씨 포목점에 들어갔을 때 포목점 안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보통 점주나 부 점주가 입구에 있다가 손님을 받고 점원들은 군데군데 서서 손님들에게 상품을 설명하는 식으로 잘 운영되던 가게가 오늘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하, 수상하오니 소신이 먼저 들어가 보겠사옵니다.”

호위무사가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당황한 표정의 부점주와 함께 나왔다.

“아이고, 송구하옵니다. 어서,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안씨 상가의 모든 점원은 점주부터 말단 문지기까지 단정한 옷차림에 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다소 흐트러진 옷차림을 한 부점주의 모습에는 세자도 놀랐다. 누가 멱살을 잡고 흔든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느냐?”

“저, 저하. 비천한 소인들이 어찌 저하께 비천한 사정을 일일이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부점주는 가게 안에 있는 문제의 장소로 세자를 인도했다. 가게 안에는 한 여인이 쓰러지다시피 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점주의 딸인 민아가 여인을 위로하고 있었다.

“아줌마, 여기는 가게이니 차라리 안채로 들어가세요, 네? 제가 모실게요.”

여인 주변에 빙 둘러 서 있던 점원들이 세자 일행을 보자 황급히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일어나라.”

점원들이 일어서서 눈치를 보며 각자의 자리에 돌아가자 민아가 세자에게 절을 했다.

“세자 저하,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이 여인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옵니다. 예를 갖추지 못하니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세자가 보니 여인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옷은 더럽고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이 추운 한겨울에 맨발이었고 손발은 빨갛게 얼어 있었다.

“어찌된 일이냐?”

백성의 일이라고 생각한 세자가 부 점주가 가져온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넋이 나간 여인은 엎드려 울기만 하고 대신 민아가 조리 있게 설명했다.

“이 여인은 통수라는 선원의 어머니이옵니다. 한씨 상단에서 지난번에 침몰한 배에 남편이 타고 있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그동안 빚을 내거나 굶으면서 간신히 살았는데 이번에 한씨 상단에서 위로금을 많이 주었답니다. 그래서 빚도 갚고 장사 밑천도 생겼는데요.”

“잘됐구나. 다행인데 왜 이러느냐?”

“아들인 통수가 이번에 멀리 떠나는 한씨 상단의 배에 타겠다고 해서요. 남편을 잃었는데 아들마저 잃을 수 없다고 날마다 부두에 나가서 배에 타고 있는 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날마다?”

“예, 이리 한 지 달포쯤 되었습니다. 차라리 배가 떠나 버렸다면 잊을 텐데 눈앞에 있으니 포기하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세자 저하,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한씨 상단에 투자한 집마다 찾아다니며 말리는 중에 여기도 들러서는…….”

민아가 부 점주를 힐끔거렸다. 아까 부점주의 난처한 태도와 흐트러진 옷매무새가 이 때문이었다고 암시하듯이.

“배가 왜 안 떠나느냐? 이 여인 때문이냐?”

그때 여인이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울음 사이로 세자 저하, 라는 말이 들린 모양이었다.

“세자 저하, 우리 아들 좀 잡아 주십시오. 저 바다에 못 나가에 차라리 아들을 감옥에 넣어주십시오. 소인에게는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아들이옵니다.”

“아주머니,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옵니다. 이분은 귀하신 세자 저하시옵니다.”

민아가 여인을 달랬지만 말을 막지는 않았다.

“그리도 안 되면 배가 영원히 못 떠나게 해 주십시오. 지금은 장 대인이 붙잡고 있지만 얼마 못 가 허가할 것입니다. 제발, 저하. 배가 떠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여인의 말을 듣던 세자의 준수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장 대인이 배를 붙잡는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그러자 뒤에 시립해 있던 부점주가 앞으로 나섰다. 경시서령인 장진한이 출항 허가를 내주지 않아 한씨 상단의 배가 출항을 못 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체됨에 따라 많은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고 조곤조곤 말한 다음 이는 중문 상가의 상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즉 자신의 사견이 아니고 누구나 아는 진실이라는 뜻이었다.

“왜 출항 허가를 내주지 않았느냐?”

“송구하오나 소인도 모르겠사옵니다. 세금도 다 냈고, 부두 사용료도 넉넉히 냈다고 하옵니다. 허가받지 않은 물품도 없고요. 모두 이유를 모르고 있사옵니다.”

세자가 혀를 찼다. 영준한 얼굴이 딱딱해지고 눈빛이 매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상인들에게 경시서령은 왕처럼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노련하고 청렴한 자로 경시서령을 뽑았던 아바마마께서 이번엔 지나치게 젊고 과거도 보지 않은 장진한을 세자빈의 오라비라는 이유로 그 자리에 앉혔다.

세자 자신을 위한 아바마마의 배려였는데 이런 결과를 보고 나니 낯이 뜨뜻해졌다.

“출항 날짜가 얼마나 미뤄졌느냐?”

“정확히 스무닷새이옵니다. 경시서청의 서리들이 매일 나와서 물품을 조사하지만 아직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세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노련하게 자신이 느끼는 분노와 짜증을 감췄다. 세자 자리는 녹녹지 않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내보여서는 안 된다. 군주의 표정은 바로 정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상등을 세 개 더 주문하겠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만들어서 궁으로 가져오도록 하라.”

“황공하옵니다. 저하.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모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절을 하는 동안 세자는 성큼성큼 걸어서 가게를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부점주가 일어서며 민아에게 눈짓을 했다.

“아주머니,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었다가 내일 가세요. 이러다가 정말 동상에 걸리겠어요.”

“통수는?”

민아가 여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염려 마세요. 아드님은 배를 못 탈 거예요.”

민아와 여인이 안채로 들어간 후 점주가 안채에서 가게로 나왔다. 점주와 부 점주는 조용히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인은 정말로 통수라는 선원의 모친이며, 한 달째 부두를 쫓아다닌다는 말도 맞았다. 다만 오늘 저녁 갑자기 포목점 점주에 의해서 이유도 모른 채 마차를 타고 포목점으로 왔을 뿐이다.

여인이 한 말도 평소에 하던 말 그대로였다. 그러니 세자가 어떻게 물어도 같은 말이 나왔다. 나머지는 부점주와 민아가 알아서 했다.

여인이 이렇게 수고를 했으니 여인의 아들 통수는 이번 항해에 따라가지 못한다. 대신 통수가 만족할 만한 값진 선물을 한씨 상단이 준비했다.

***

며칠 후.

중문상가에 시찰을 나갔던 서리가 돌아와 장진한을 찾았다. 중문 상가의 상인들 사이에 소문이 돌고 있다고 했다. 경시서령이 뇌물을 바라고 한씨 상단의 배를 묶어 두는 바람에 한씨 상단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소문. 게다가 며칠 전에 세자 저하께서 잠행을 나와 그 소문을 들었다는 것까지 퍼져 있었다. 이 소문은 안부자가 일부러 퍼트린 소문이었다.

“이를 어쩝니까?”

아직 이직을 못 한 수하가 벌벌 떨면서 장진한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소문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십중팔구 어사의 탄핵 상소가 올라가고 그 결과는 잘해야 유배요, 못하면 참수형도 가능하다.

공공연히 뇌물을 받는 관리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묵계가 있었다. 일은 진행되게 만든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하다 어사들에게 들켜서 탄핵을 당하면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 고 해 봤자 소용없었다. 선을 넘은 본인의 탓이니까.

물론 장진한이야 세자빈의 오라비이니 큰 벌은 면하겠지만 경시서령 자리는 지키지 못한다. 수하는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튀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세자 저하께서 조사하고 계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세자 익위사가 한씨 상단의 배에 올라 이것저것 물었다고 하옵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게 듣고 있던 장진한의 안색이 파래지면서 손이 덜덜 떨렸다.

“내, 내가 궁에 다녀와야겠다. 세자빈 마마를 만나면 된다.”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장진한이 허둥대며 경시서청을 나서는 시간.

세자 시강원에서 오전 공부를 마친 세자가 세자빈궁으로 가고 있었다. 오라비에 관해서 넌지시 할 말도 있어서 부러 세자빈과 점심을 먹겠다고 했다.

편하기야 임승휘가 편했지만 그는 세자빈의 중요성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고 세자빈이 회임한 요즘은 더 조심하고 있는 편이었다. 안 그랬으면 며칠 전 잠행을 다녀온 직후에 세자빈에게 물었을 것이다.

오라비라는 자가 무엇 하는 작자냐고. 이렇게 세자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손이 귀한 왕실에서 첫 왕손의 탄생을 기다리는 윗전들 때문에도 세자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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