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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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 상단의 범선에서 물건이 다 내려지자 새로운 물건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배를 수리하고 새로운 선원을 모집하고 물건을 실어 보낼 투자자들이 모였다.
경시서령인 장진한은 한씨 상단의 단주가 경시서청에 직접 오기를 기다렸다. 일반적으로 그런 큰 이익을 본 상인들은 세금 외에도 실어온 물건들 중 일부를 나라에 바쳤고, 그중 일부는 경시서령인 자신의 몫이었다.
그런데 한씨 상단은 물건의 목록을 제출해서 허가를 받고 끝이었다. 커다란 범선이 포구에 정박하는 대가로 일정한 세금을 내고 또 끝이었다. 예의상 보내는 선물도 적었다. 장진한은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그는 아버지가 낙향했기 때문에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세자빈의 오라비이고 아버지도 낙향했지만 미래 왕비의 부친, 즉 국구가 됨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나를 무시하는 거야. 내가 젊고 과거를 보지도 않았다고 무시하는 거라고.”
장진한이 수하에게 투덜거리자 수하가 느릿하게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수하는 장진한이 과거시험에 열등의식이 깊음을 금세 눈치챘다.
“이전엔 어땠나?”
수하는 잠시 고민했다. 이전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사실 범선이 이토록 성공적인 항해를 하고 돌아온 일은 수십 년 내 없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전례도 없었다.
한씨 상단은 포구에 배를 정박하는 대가로 이미 많은 세금을 냈다. 경시서청 서리들이 물품을 조사하고 확인하는데도 협조적이었고 식사비도 충분히 내놓았다.
한씨 상단은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거대한 상단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경시서령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런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
비록 작년에 일시적으로 몰락을 겪기는 했으나 지금은 예전의 성세로 돌아왔다. 그러니 이 젊고 경험 없는 경시서령은 오히려 한씨 상단주와 차라도 한잔하면서 한씨 상단이 잘 되어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도록 돕는 게 좋았다.
한씨 상단과의 좋은 관계는 뒷돈 몇 푼 받는 따위의 사소한 이득보다 더 중요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다면 당장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웠다. 보아하니 이 젊은 세자빈의 오라비는 머리가 안 돌아가는 인간이다. 충고도 하극상이라고 발길질을 할 인간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대부분 이렇게 입을 닦지는 않죠.”
“그렇지?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
수하는 덜컥 겁이 났다.
“어, 어떻게 하시려고요?”
“출항 허가를 안 내줄 거야.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봐야지.”
장진한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수하는 이 어리석은 상사의 뒤통수를 냅다 때리고 싶었지만 꼭 쥔 주먹을 등 뒤로 감췄다. 빨리 이직을 고려해봐야겠다.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까지 공범으로 몰려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장진한이야 세자빈의 오라비이니 웬만하면 빠져나가겠지만 자신은 아니다. 수하는 복잡한 눈빛으로 장진한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
오늘 드디어 상등이 궁으로 들어갔다고 아버지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발표했다. 조금 긴장된 표정이었다. 별거 아닌 작은 물건이긴 하나 궁 안에서 화재가 난다거나 천장에서 떨어져 사람이 다치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처벌은 안 받더라도 나쁜 소문이 난다.
“아버지, 설치할 사람도 보내셨어요?”
“물론이다. 포목점 점주가 철방 점원과 함께 가서 천장에 달고 초에 불을 붙여서 사용하는 법을 보여 주고 왔다. 주의사항도 숙지시켰다.”
“세자 저하도 보셨어요?”
“세자 저하가 그렇게 한가하신 분이냐? 나중에 보셨겠지.”
아버지가 하하하 웃었다. 그러게. 재벌집 천장에 등 하나 단다고 재벌이 하던 일을 멈추고 와서 구경하지는 않지. 내가 재벌이나 왕실 생활을 몰라서 실수했다.
안부자는 재벌이라고 하는데 집 안에서는 재벌다운 모습이 전혀 없고 오 여사님은 평범한 안주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자주, 아니 거의 언제나 안부자가 재벌급 부자임을 잊는다.
“아무 일 없이 잘 사용하면 좋겠어요.”
새로운 물건에는 늘 부작용이 따른다. 하지만 부작용을 이기고 궁에서 잘 사용되면 널리 퍼진다. 당분간 안씨 철방은 호황을 누릴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별당으로 돌아온 나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궁 안에 걸린 샹들리에를 상상했다.
“아씨, 더 시키실 일 없으세요?”
“응, 없어. 휘장은 치지 말고 가.”
“네, 아씨.”
정오와 말순이 내게 이불을 덮어 주고 나가면서 내 머리맡에 있는 작은 상등에 있는 촛불을 껐다. 방문에 걸린 휘장을 치지 않아서 정월 대보름 환한 달빛이 방안 깊숙이 스며들고 어디선가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팔을 흔드는 모습이 창호지에 비쳤다.
나는 이런 모습이 좋아서 가끔 휘장을 치지 않고 잔다. 현대에서는 달빛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달밤에 다니기는 했는데 늘 차 안에 있어서 앞차의 빨간 미등과 내 차의 헤드라이트와 가로등 불빛만 봤다.
나뭇가지가 비치는 창호 대신에 24시간 켜져 있는 간판의 인위적인 색에 익숙했다.
인공의 빛도 아름답지만 달빛의 신비함과는 비교가 안 된다. 달빛은 내게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하고, 잃어버린 것보다는 지금 가진 것이 더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나 역시 한낱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을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눈앞에 산적한 문제들이 작아 보인다.
그렇게 달빛찬가를 소리 없이 부르고 있는데 창호지에 낯선 그림자가 비쳤다.
인체 모양의 검은 그림자.
누, 누구?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오나 말순은 상방에 들어갔으니 이미 잠에 빠져 있다. 하녀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기 때문에 베개에 머리를 대는 순간 잠에 빠진다.
나는 살그머니 이불을 내리고 상체를 들었다.
그 순간 방문이 열렸다.
달빛을 업고 달의 전사처럼 다가온 사람은 목선후였다. 방문이 조용히 열리는 순간. 방문 사이로 드러난 얼굴 윤곽만으로 그를 알아보았다. 아니 창호지에 비치는 그림자에 벌써 그 사람인 줄 알았다.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 곧고 바른 척추. 무엇보다 허리띠를 맨 허리의 모양이 독특하다. 약간 거만하면서도 우아한 자세는 볼 때마다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할 수도 있는 그 자세가 내 눈에는 세상에 없을 매력으로 다가온다.
참 사소한 이유로 누군가를 좋아할 수도 있구나.
그를 알아본 내가 두 팔을 뻗자 목선후가 방문을 닫고 서둘러 다가왔다. 수만 개의 달빛과 수만 개의 하늘이 다가온 듯 기쁨이 출렁이다 못해 넘쳐흘렀다.
우리의 입술이 부딪치고, 한기를 담은 그의 어깨가 그대로 내 몸 위로 쓰러졌다. 숨이 막힐 즈음에야 입술을 떼고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어떻게 왔어요? 이렇게 다니다 들키면 어떡하려고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왕세자를 닮은 죄지. 지구상에 태양이 하나이고 달이 하나이듯 후계자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눈에 띌까 봐서지.
그리고 오 여사님. 목선후가 신분상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않는 한 나를 만날 수 없다고 선언한 오 여사님이 있다.
“한 공자는 또 만났소?”
옷을 벗는 와중에 목선후가 물어왔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곧 깨닫고 헛웃음을 웃었다. 정 공자가 벌써 말했구나. 내 행동이 몰래 보고되고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
아니지, 이건 질투야. 질투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어.
“만나고 싶은데 너무 바쁘더라고요.”
짐짓 으스대는 말에 목선후가 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얏! 이러면 자국이 남는다고요. 내일 어떡해요?”
목선후의 아름다운 눈이 위험하고 위협적으로 번들거렸다. 달빛의 마법인가? 너무 기다렸기 때문인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리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건 현대 여성이 할 만한 생각이 아닌데. 이건 내가 아니라 안안용일 거야.
“내일 모든 사람들이 알겠지.”
“그러기만 해 봐요. 어머니가 나를 방에 가둘 거라고요.”
목선후가 차갑고 까칠한 손끝으로 내 쇄골을 만지작거리다가 얼굴을 내려 입술을 찾았다. 그러고는 코끝에 키스하고 손끝이 지나간 쇄골에 키스했다.
내일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곤란해질지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열정적이었다.
***
한씨 상단주와 안부자가 마주 앉은 자리에 한인수가 차를 내왔다. 한인수의 아버지와 안부자는 평소의 여유가 사라진 심각한 얼굴이었다.
“출항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어.”
“그자가 많은 뇌물을 바라는군. 한두 푼으로는 안 된다는 거지.”
“그래. 하지만 이미 세금으로 지나치게 많이 나갔어. 이득을 많이 봤다고는 하나 침몰한 배의 유가족에게 넉넉한 배상을 해 주고 범선을 하나 더 마련하고 나니 여유가 전혀 없어. 오히려 투자를 받아야 했지 않나. 자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일찍 떠나지도 못했을 거야.”
“나도 투자를 했을 뿐이야.”
안부자가 겸손하게 손사래를 쳤다.
“이번 항해가 성공하면 투자자를 모을 필요도 없고 자네에게 진 빚도 모두 갚을 수 있어. 경시서령이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부과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꽉 막히지는 않았을 것을. 염치도 없는 놈. 그 세금이 다 국고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데.”
한씨 상단주가 이를 갈았다.
“언제까지 떠나야 하나?”
“다음 달이면 해류의 방향이 바뀌네. 네 개의 돛을 단 커다란 범선이라도 바람의 힘만으로는 어렵다네. 그리고 출항이 늦으면 늦을수록 선원들도 물품도 문제가 생긴다네. 기껏 최고의 선원들로 뽑아놓았는데 이대로 출항하지 못하고 있으면 꽤 많은 선원들이 빠지겠다고 할 거야.”
“큰일이군.”
안부자의 말에 한인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아버지, 경시서령은 세자빈의 오라비입니다. 그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세자 저하라면 몰라도요.”
그 순간 안부자가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아하! 맞다. 세자 저하라면 막을 수 있지.”
이렇게 말한 안부자가 껄껄껄 웃자 한씨네 아버지와 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걱정 말게. 방법이 있네. 아주 좋은 방법이 있지.”
안부자가 한인수의 등을 두드렸다.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잊을 뻔했구나.”
한인수는 등짝을 힘 있게 맞았지만 기쁨으로 미소를 지었다. 안부자가 된다고 말했으니 문제는 해결된 거나 다름없다.
“아버지, 조용히 출항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래라.”
한씨 상단주가 아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