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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65화 (65/92)

65화. 고춧가루 최루탄

“이걸 왜 만드시는 거예요?”

찬바람을 맞으며 집까지 달려갔다 오느라고 볼이 빨개진 정오가 물었다.

“나쁜 놈들이 쫓아오면 던지려고.”

“아씨, 도망가기 바쁜데 언제 불을 붙여서 저걸 던지나요? 그리고 아까 터지는 걸 보니 차라리 고춧가루를 손으로 뿌리는 게 더 효과가 있겠어요. 소인이 뿌리면 저기까지는 문제없는데.”

정오가 다섯 걸음은 떨어져 있는 바위를 가리키며 장담했다.

“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에디슨도 한 번 성공하기 위해서 천 번을 실패했다고 하더라.”

“그 사람이 누군데요?”

“있어. 서양에 있는 사람. 아니, 있을 사람.”

“그러시다면 소인은 고춧가루 주머니를 만들어 볼게요. 콩주머니처럼 던져서 터지면 되는 거잖아요.”

정오의 방법이 더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생각이야. 콩주머니도 몇 개 만들어 놔.”

정오를 인정해 주었다. 나는 작은 주머니에 수제 고춧가루 최루탄 두 개를 넣고 향낭에는 부싯돌을 넣었다.

별로 무겁지 않아서 두꺼운 겨울 조끼 속에 넣으면 표가 안 났다. 정오의 말대로 써먹을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마음이 든든해서 좋았다.

“아씨, 그거 저절로 터지는 건 아니죠?”

“아닐걸?”

나도 잘 모른다. 핫팩은 흔들기만 해도 뜨거워졌는데 화약은 핫팩 속에 있던 내용물과 비슷한 느낌이라 조금 겁이 났다.

“필요할 때만 가져갈게.”

“꼭 그러셔야 돼요.”

잔소리쟁이, 정오. 얘를 안씨 학당에 집어넣는 걸 진짜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겠다.

***

목선후가 진욱 왕자를 만나고 온 다음 날.

진욱 왕자는 입궁해서 대비전과 대전에 들렀다. 사실 진욱 왕자가 왜 왔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을 만큼 그는 정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얼마 후 왕은 세자빈의 아버지인 좌복야 장현봉의 사직을 윤허했다. 이미 병을 핑계로 칩거하고 있던 장현봉은 부랴부랴 도성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장현봉은 이미 많은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었고 만약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 몰락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리 몸을 낮춰 놓아야 훗날 미안한 마음이 든 왕이 설사 세자빈이 딸을 낳아도 장씨 집안을 무시하거나 세자에게 다른 후궁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장현봉이 낙향한 후, 이상하게 진욱 왕자가 자주 입궁을 했다. 진욱 왕자의 충성심이 워낙 강하고 정직한 사람이라 의심을 받지는 않았지만 의혹은 불러일으켰다.

환갑이 다 되어서 조정에 참견할 리도 없고, 대비와 특별히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왜 자꾸 대비전에 들를까?

오늘도 진욱 왕자는 대비와 마주 앉아 커다란 산수화를 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선후가 그렸다고요?”

“네. 대비마마.”

세상에 없는 절경이 펼쳐진 한 폭의 산수화 앞에서 대비가 저절로 떠오르는 미소를 한 손으로 가렸다.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이 사람 앞에서는 숨겨야 한다.

진욱 왕자나 선후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지 않으니까.

“할일이 없으니 이렇게 그림이나 그리지요.”

“대비마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억지라니요?”

“선후가 과거를 보고 조정에 출사하려는 걸 막으시는 분이 대비마마시니 억지지요.”

대비의 안색이 굳었다. 진욱 왕자와 목선후는 목선후가 진욱왕자의 아들로 입적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면 왕실의 일원이 되면서도 왕위와는 멀어지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다.

목선후와 세자가 닮은 것도 다 설명이 된다. 다만 진욱 왕자의 아들은 왕자가 아니라 군이 되니 품계가 낮아지고 왕을 아바마마라고 부를 수가 없다. 목선후가 진욱 왕자를 만나 의논한 방법이다.

진욱 왕자가 입궁해서 왕과 대비를 만나 수차례 허락을 구했지만 지금까지는 요지부동이다.

“멀쩡한 왕자가 왜 군이 돼야 합니까? 나는 허락 못 합니다.”

“마마, 한 번만 달리 생각해 보십시오. 선후 왕자가 평안히 일생을 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 왕족임을 인정하면서 평안히 살 수 있는 길은 그의 말대로 내 아들로 입적하는 방법이 최상입니다. 아시면서 왜 이리 고집이십니까?”

“고집이라니요? 말씀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요? 내가 이 나라의 대비임을 잊었나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대비가 홱 돌아서자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진욱 왕자가 일어섰다. 할 말이 없으면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버릇은 왕족들의 못된 습성이지. 그의 손이 그림에 닿자 대비가 그 손을 밀어냈다.

“더 보고 돌려드리지요.”

“그, 그러십시오. 소신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진욱 왕자는 대비마마의 시조카이지만 나이가 비슷해 서로를 존중해 왔다. 하지만 근래 목선후의 문제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에는 이렇게 뻘쭘하게 헤어지게 된다.

진욱 왕자가 간 후 김 상궁이 시녀들을 불러 양쪽에서 그림을 들고 서 있게 했다. 김 상궁이 올린 찻잔을 들고 앉아 그림을 감상하는 대비의 눈가에 자잘한 주름살이 패였다.

“그 아이는 뭘 해도 잘해. 그렇지, 김 상궁?”

“그러하옵니다.”

“저런 형이 있다면 세자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그러하옵니다.”

“세자는 아직 모르겠지만 선후는 탐욕이 없고 속이 깊은 아이야. 탐욕스러운 아이가 아니란 말일세.”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남도 판단하는 법이옵니다. 왕자마마의 진심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선후가 군계일학의 인재이니 왕위를 탐낼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가?”

“네. 소인은 그리 생각하옵니다.”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마땅히 앉을 자리에 앉지 못하는 그 아이가 너무 안됐어.”

김 상궁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대비마마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결정권을 손에 쥐고 계시는 분은 전하시다. 전하의 마음을 돌리기는 대비마마의 마음을 돌리기보다 어렵다.

“나는 북행궁에서 그 아이가 용포를 입었을 때 이미 한풀이를 했다.”

진씨 왕조는 왕위 계승에 적자나 장자 우선이 아니었다. 우위를 점할 수는 있으나 능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계승권을 박탈당했다.

현재의 왕이 비록 적자였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후궁에게서 태어난 형들이 먼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형들이 큰 문제를 일으켜 폐위되지 않았더라면 셋째 왕자는 끝까지 왕자로서 평생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선후는 장자가 되어 세자가 됐을 터.

어쩌다 어미가 과부였고, 어쩌다 탄생을 숨겨서 여기까지 왔지만 대비의 마음속에서 왕세자는 장자인 선후였다.

“원래 이름은 진연이지.”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지만 김 상궁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아들었다.

“참 좋은 이름이옵니다.”

“우리가 이럴수록 그 아이가 힘들겠지? 진욱 왕자 말이 처가에서는 너무 놀라서 감당하기 어렵다고 이혼을 원한다고 했다더군. 이해는 가지만 괘씸해.”

“신분의 차이가 큰 탓이옵니다.”

김 상궁은 그 약하고 여린 아씨가 꽤 강단 있게 시녀 역을 잘 해냈던 일을 기억했다. 마침 대비도 그 점이 생각났는지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평민이지만 품위가 있었어.”

“그러하옵니다. 예절 바른 아씨였사옵니다.”

“손아귀 힘이 하나도 없는데 아이는 어찌 낳을지.”

김 상궁이 호호, 하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이를 손으로 낳나? 마마도 참.

***

대비전을 나오는 진욱 왕자의 눈은 서늘했다.

일면식도 없는 목선후란 이름의 보잘것없는 서생에게서 만나 뵙고 싶다는 연락이 왔을 때 처음에는 만나주지 않으려 했다.

마침 한가했고, 어사중승의 둘째 아들이라니, 평소 어사중승의 학식을 인정하던 그는 까마득히 어린 목선후를 만나 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수십 년을 복잡한 조정에서 살아남아 가문을 번창시킨 사람이다. 만나기 전에 살짝 조사를 해 봤더니 낌새가 이상했다.

목선후를 뒷조사하다 보니 묘하게 이십 년 전의 소문이 생각났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만나려고 제3의 장소에서 그 젊은이를 만났다. 그런 준비를 했지만 평소의 조심성 때문이지 딱히 별다른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선후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는 모든 상황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십 년 전에 왕자가 태어났다는 사실과 그동안 목씨 집안에서 숨겨서 키운 엄청난 비밀을. 놀라서 정신이 빠질 지경인데 목선후가 큰절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큰아버님.”

입을 열어 말하는 순간 진욱 왕자는 조카를 사랑하게 되었다. 도무지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청년이었다. 수려한 외모와 진실된 눈빛, 젊으면서도 깊은 음성은 절벽에 매달린 종소리처럼 은은하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런 멋진 청년이라면 왕실 핏줄이 아니라도 좋아했을 텐데 왕실의 핏줄에다 도움을 청하는데 어찌 돕지 않으랴.

게다가 그는 도성에서 부자로 유명한 안부자의 사위였다. 안부자의 영향력은 겉보기보다 막대해서 진욱 왕자처럼 도성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결코 안부자를 무식한 평민이라고 무시하지 않았다. 무시하기는커녕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은근히 노력했다.

진욱 왕자가 지금 목선후를 도우면 안부자라는 막대한 자금줄이 따라오게 된다. 왕족도 가난한 왕족과 부유한 왕족이 있는데 가난한 왕족의 처지는 평민보다 낫지 않았다. 품위를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돈이 들었기 때문에 진욱 왕자처럼 많은 후손이 있을 경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총명한 조카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에게 꼭 필요한 일이니 성사시켜 달라고 했다. 나이로 따지면 손자뻘이나 품계가 너무 낮아도 위에서 허락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막내아들로 입적시켜 달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왕족으로 인정을 받으면서도 왕위와는 상관이 없는 위치가 되니 안전하고 평민인 아내와의 혼인도 용인된다고 설득하는데 진욱 왕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비마마의 말대로 고얀 놈이긴 해. 이 늙은이의 머리 꼭대기에 있더라니까.

목선후의 제안을 들었을 때는 쉽게 일이 성사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비의 뜻이 견고했다. 장손이라면서 기어이 왕자로 복권시키려 했다. 대비마마를 설득해야 왕을 설득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놈은 어서 일이 해결되어 떳떳하게 처가에 가고 싶다는데.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오늘도 실패했다고 생각한 진욱 왕자의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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