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강의는 내 천직이야
“아씨께서 비누라는 걸 만드신다고 기름을 사방에 널어놓고, 잿물을 만들고 해서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거 보면 더 이상 걱정하지 않겠네요.”
말순이 비누를 한아름 들고 말했다.
“무슨 걱정?”
“공자님이 안 계셔서…… 그러니까 아씨가 마음이 허해서 이런 일을 벌이신다고.”
음, 풀어줄 필요가 없는 오해구나. 왜 여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늘 남자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오늘 점심에 당장 일이 있는 사람 빼고 전부 별당으로 모이라고 해. 동생들도. 알았지? 내가 비누를 사용하는 시범을 보일 거야. 너희는 따뜻한 물과 찬물을 한 대야씩 준비해 주고.”
그날 점심에 별당 대청마루에 서서 마당에 가득 찬 하인들을 보며 비누 사용법을 강의했다. 드디어, 빙의한 후 최초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내 뒤에 앉아서 내 모습을 보던 오 여사님과 동생들이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왜냐고? 끝내주는 강의였으니까. 숨도 안 쉬고 똑 부러지게 강약을 조절하며 강의를 끝내고 나니 기분 좋은 흥분으로 뺨에 열이 올랐다.
내 강의를 듣고 나서 비누를 먹거나 눈에 넣거나 상처에 바르는 사람은 없겠지. 귓구멍과 뇌에 아예 새길 정도로 확실하게 말했으니까.
하인들은 비누를 한 조각씩 받아서 소중히 들고 돌아갔다. 나는 동생들을 불러서내 눈앞에서 씻게 하고 막내는 직접 얼굴과 손을 씻겼다.
“매워!”
눈에 조금 들어갔는지 안국이가 소리쳤다.
“괜찮아.”
미지근한 물로 닦아내고 마지막으로 수건으로 닦자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뽀송하고 하얀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비누 없는 세상이여, 바이 바이 굿바이.
“어머니, 이걸 판매하고 싶어요.”
“네가 원하는 걸 이 어미가 막겠니? 원하는 대로 하렴.”
안국이의 얼굴을 본 오 여사님의 입꼬리가 싱긋 올라갔다. 막내의 뽀얀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통째로 먹어치우고 싶은 눈빛이었다.
***
“공자님, 한씨 상단이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명현당 서재에서 그림을 그리던 목선후의 손길이 뚝 멎었다. 팽문은 붓을 내려놓는 도련님을 곁눈질했다.
“소인은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팽문이 나가자 심부름을 갔던 일선이 들어왔다. 일선은 목선후의 서신을 왕의 사촌 형인 진욱 왕자에게 직접 전하고 왔다.
“공자님, 진욱 왕자님께서는…… 바로 오늘 저녁에 만나 뵙기를 원하십니다. 거절하시려 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좌복야의 사직상소를 반려하셨습니다. 그러자 병을 핑계로 등청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 나라에 진짜 사마의가 났다고 뒷말이 많습니다.”
“장진한은?”
“조용합니다만 그자 성격에 분명히 뭔가를 꾸미지 않겠습니까? 이선에게 감시케 했습니다.”
“잘했다.”
“소인이 해시에 마차를 대령하겠습니다.”
“장소를 모르느냐?”
“해시에 사람을 보내겠다고만 했습니다.”
“진욱 왕자님께서 주도면밀하시구나.”
“공자님의 신분을 눈치채신 걸까요?”
“아마도.”
이십 년 전에 왕위 계승의 복잡하고 험난한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진욱 왕자다. 왕이 평민 여인을 사랑했음은 그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과 씨는 못 속인다고 이 아들이 왕세자와 쌍둥이처럼 닮은 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막상 보면 어떤 얼굴을 할지 얼마나 놀랄지 궁금했다.
일선이 나가자 목선후는 창문을 열고 한겨울 찬바람을 온 몸으로 맞았다. 바람 속에는 꽃잎 같이 아련한 눈송이가 흩날렸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그녀를 생각하듯이 그녀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가 떳떳하게 만나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그녀는 알까?
어떤 때는 바보 같다가도 어떤 때는 총기가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이 흩날리는 눈송이 사이에서 어른거렸다. 보고 싶었다.
***
비누 만들기에 성공한 나는 갑자기 수많은 사업 아이템이 떠올라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안안용은 무한한 돈줄과 절대적 충성파 부하들을 데리고 있는 안부자의 금지옥엽이다.
이런 사람을 현대에서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정도 기반이면 무슨 사업을 하든 망하기가 더 어렵다. 성공할 때까지 계속할 테니까.
한씨 상단에서 보내온 소소한 물건을 뒤지던 나는 밖에서 들어온 말순에게 물었다.
“한씨 상단이 가져온 게 이게 전부야? 또 없대? 우리 가게의 상등 같은 물건은 없든?”
“못 들어봤어요, 아씨.”
“아무래도 직접 한씨 상단에 가 봐야겠어. 내 눈으로 봐야 원하는 걸 찾을 수 있지.”
마침 겨울치고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정오와 말순을 재촉해서 두터운 겨울옷으로 갈아입고 마차를 준비시켰다. 별당을 나오다가 큰 동생 안신이를 만나서 소매를 잡아끌었다.
“너도 보는 게 좋으니 같이 가자.”
“누이, 나는 지금도 하는 일이 너무 많아.”
“진짜야?”
내가 고개를 돌려 안신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팟! 하고 등급이 떴다.
9? 9라고? 9등급?
“꺅! 안신아! 축하해!”
내가 안신이의 손을 잡고 팔짝팔짝 뛰자 안신이도 하녀들도 놀라서 어쩔 줄 몰랐다. 내 치렁치렁한 비단 치마가 찬 겨울바람을 휘저으며 펄럭거렸다. 안신이는 내 손을 감히 털어내지는 못했지만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뭘 축하하는데?”
아, 그렇지. 이건 나만 아는 거였지.
“너, 정말 대단하다고. 하는 일이 많다며?”
“놀리는 거야?”
“아니거든.”
나는 안신이의 손목을 부여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생각해 보면 안신이는 작년 가을부터 겨우 몇 개월 공부했을 뿐이다. 그런데 등급외에서 구 등급으로 올랐다. 이건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최소 일 년은 걸린다고 예상했었기 때문에 가슴이 뛸 정도로 흥분했다.
잘하면 정말 동생들 중에 향시에 합격할 애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중문 상가를 잃지 않아도 된다.
“안신아, 학당에 돌아오는 건 싫으니?”
“어.”
안신이가 입을 쭉 내밀었다. 그래, 그게 너의 한계구나. 얘 말고 동생들이 더 있다는 생각에 안신이는 포기하기로 했다. 이래서 자식은 많이 낳아야 하나 보다.
“아버지 일을 하는 건 좋고?”
“어.”
사춘기 소년다운 얼굴로 대답하는 동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빙의한 순간부터 이미 안신이와 안중이는 나보다 키가 더 컸었다. 지금은 키뿐 아니라 어깨도 넓어지고 근육도 생기고 있다.
“오늘 누이를 좀 도와줘.”
구 등급이 아깝긴 하지만 안부자도 구 등급으로 재벌이 됐다. 그러니 재벌만 돼준다면 구 등급으로도 충분하다.
잠시 후 포구 근처에 있는 한씨 상단에 갔더니 한인수도 그의 아버지도 없었지만 직원들이 우리를 주인처럼 대했다. 안신이는 이미 아버지와 여러 번 왔는지 익숙하게 나를 인도했다.
우리는 거대한 범선에서 내린 물건과 아직도 범선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빠짐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범선의 창고를 쭉 둘러볼 때.
“누이, 이것 봐.”
안신이가 나무 상자에 담긴 검은 가루를 내게 내보였다. 특이한 냄새가 났다.
“이게 뭐야?”
“쉿!”
안신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화약 같아.”
“뭐?”
안신이가 계속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그리스라는 나라를 지났다는데 내가 알기로 거기에는 신의 불이라는 게 있어서 던지면 벼락같은 소리를 내면서 터진대. 근처에 있는 것은 뭐든 가루로 만들면서.”
나는 벌써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폭탄을 말하는 거다.
이 시대는 화약이 발명되었으나 널리 퍼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소수만이 아는 고급 정보를 안신이가 알고 있었다.
“근데 왜 속삭여? 불법이야?”
“사람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불법이야? 다만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건 없다는 거지. 위험한 물건이기도 하고 말이야. 만약 나쁜 놈들 손에 들어가면 악한 일에 쓰지도 모르잖아.”
똑똑한데 정의감까지 있네? 이게 구 등급 맞아? 아무래도 빙의하면서 내 측정기가 고장 났는지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오 여사님이 특 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순간도 많았으니까.
“안신아, 이거 우리에게 달라고 하자.”
“왜? 뭐에 쓰려고? 보니까 소량을 실험 삼아 가져온 거 같은데 우리를 줄 게 있을까?”
“소량이어도 돼.”
이런 시대에 살면서 무척추 동물인 안안용이 버티려면 칼만 가지고는 안 된다. 이제 현대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나를 지키는 데 신경을 쓰기로 했다. 내 몸은 여기 안안용의 몸 하나뿐이다.
김인수에게 젊고 예쁘고 돈도 많다고 자랑했지만 나는 아직도 현대의 내 몸이 생각날 때마다 슬프다. 관에 담겨서 화장장에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난다.
내 몸과는 너무 다른 안안용의 몸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예쁘고 부드럽고 나긋나긋하지만 연약한 안안용.
게다가 가끔 호흡곤란도 일으킨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 몸을 신경 쓰고 건강해지려고 더욱 노력함과 동시에 무기도 갖추자.
***
화약을 얻어오기는 했으나 소량이었고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알고 있는 빈약하고 오류투성이의 상식만으로 작은 폭탄을 만들어보았다.
진흙 공을 만들고 속에 화약을 넣고 심지를 세우고 불을 붙여 보았다.
물론 아무도 없는 뒷산에 올라가서 한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말이다.
폭탄은 터지기는 했으나 너무 약해서 바로 옆에 세워둔 나무 조각도 날리지 못했다. 근처에서 우리를 엿보던 다람쥐만 놀라서 나무 위로 쪼르르 달아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약제조법을 좀 알아둘걸.
“아씨, 이제 조금밖에 안 남았어요.”
말순이 화약가루가 묻은 시커먼 손으로 코밑을 문지르며 말했다. 곰의 코처럼 코밑이 까매졌다. 이럴 때 팽문이 있었더라면 반했을 텐데.
팽문 같은 바른생활 사나이는 말순이처럼 순진한 애가 저런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면 확 반하기도 한다던데.
하지만 지금 집에는 팽문도 목선후도 없으니 말순의 저런 모습을 식솔들에게 보이게 하는 건 양심의 가책이 돼서 정오를 심부름 보냈다.
“정오야, 집에 가서 고춧가루를 가져와 봐. 제일 매운 걸로.”
화약 양이 적으니 고춧가루 최루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진흙 공 안을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고 한쪽에는 화약을, 다른 한쪽에는 고춧가루를 채웠다. 시제품으로 두 개를 만들었더니 화약이 똑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