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63화 (63/92)
  • 63화. 발명가 안안용

    ***

    “잘됐어.”

    “에? 그뿐이에요? 아씨가 그렇게 좋아하던 한 공자님이 이제 거부가 되셨는데 그 한 마디뿐이에요?”

    “더 무슨 말을 해?”

    모르는 척하라고 지금까지 말한 건 말순이 바로 너였 거든. 현대나 고대나 돈만 보면 사람 마음이 홱홱 바뀐다.

    나는 김인수를 생각하느라 울컥울컥 무엇인가가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중이라 이제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인수까지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한인수에게 일어난 일은 좋은 일이므로 나 아니라도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

    “목욕하고 자야겠다.”

    “네, 아씨. 목욕물 준비할게요.”

    “너,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알면서도 말순에게 물었다. 말순은 대답 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잊으라고는 못 하겠지만 다른 남자를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어, 말순아.”

    “아씨는 한 공자님을 잊었어도 소인은 그렇게 못해요.”

    잊은 게 아니라 원래 아무런 관계도 없었어. 오늘 따라 얘가 막 기어오르는데?

    “죄송해요, 아씨, 아씨가 절개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절개까지 나왔어. 이거 수천 년 전 단어 아니야? 하도 오랜만에 들어서 씹다 버린 껌을 도로 씹는 기분이 들었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과 말을 섞는 게 아니었는데.

    잠시 후 뜨거운 목욕물 속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수증기 사이로 김인수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계속 나서 나는 작은 수건을 얼굴에 덮었다.

    “아씨, 후회하시는 거예요?”

    내 머리를 감겨 주던 말순이 물었다.

    “뭘?”

    “한 공자님과 혼인하지 않은 거요.”

    그때는 나는 여기에 있지도 않았는데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후회하고 말고 하겠니? 설사 후회한들 되돌릴 수도 없다.

    “아니.”

    “그러면 왜 우세요?”

    “모른 척 좀 해.”

    오 여사님이 알면 또 속상해한다고. 게다가 김인수는 현대에서 깨어나 잘 먹고 잘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또 한편으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네가 이런 자괴감을 알아?

    ***

    새해 첫날부터 도성에 도는 소문은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정도로 극적인 일이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어마어마한 이득을 가지고 한씨 상단의 배가 돌아왔다!

    투자자들도 좋아했지만 한씨 상단의 단주와 가족들이 가장 좋아했다. 반년 동안의 고난은 죽음처럼 깊었지만 그런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고 상단을 일으켜 세웠다고 안부자가 내게 설명했다.

    자신의 도움으로 더 빨리,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으면서도 조금의 공치사도 하지 않는다. 이런 안부자가 나는 갈수록 좋아진다.

    이제 중문 상가 사수 안씨 학당에는 정 공자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의 문객중의 한 사람을 학당으로 보냈다.

    “우 공자는 첫날부터 민아만 가르친다고 도련님들이 불만이 대단하세요.”

    정오가 무언가를 잔뜩 들고 오며 고자질했다. 정오의 머리와 어깨에 눈송이가 붙어 있다가 실내로 들어오자 금세 녹아 버렸다.

    “누구는 안 그러겠니? 선생이라면 다 그럴걸.”

    나는 더할 거다. 총명한 제자를 만난 스승의 기쁨을 말해 뭐해.

    “그게 뭐니?”

    “아씨, 한씨 상단에서 이리로 보낸 선물이 마차로 몇 대인지 몰라요. 그중에서 작은 거 몇 개를 아씨 기분 전환하시라고 마님께서 보내셨어요.”

    설날 이후 나는 조금 앓았다. 목선후의 문제에다 김인수가 준 한 방이 컸다. 연약한 안안용은 열이 오르기 시작해서 안부자와 오 여사가 깜짝 놀라 도성에서 제일 용한 의원을 불러왔는데 고뿔이라고 했다.

    한겨울 고뿔은 위험하다며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했다. 방을 청소하거나 환기를 시킬 때도 상방으로 옮길 뿐 나가지 못하게 해서 나는 그 대단하다는 한씨네 범선을 구경하지 못했다.

    내가 안쓰러워 어머니가 신기하고 예쁜 물건은 무조건 한 개씩 내게 보내는 중이다.

    작은 유리병을 막고 있는 코르크 마개를 땄다. 달큼하고 느끼하면서 이국적인 향기가 코로 스며들었다.

    이 익숙한 냄새!

    “코코넛 오일이네?”

    “네? 코코……?”

    정오가 뒷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이거 비누 만들면 좋은데.”

    “비누가 뭐예요, 아씨?”

    귀가 좋은 말순이 물었다.

    “너희들 빨래 할 때 잿물 쓰잖아. 깨끗해지라고. 근데 그거 독해서 사람이 목욕하거나 얼굴을 씻을 때 못 쓰잖아. 머리도 못 감고.”

    “그렇지요. 잿물, 그거 먹으면 죽어요, 아씨.”

    “비누는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는 거야. 서양에서 쓰는 거. 독하지 않은 거.”

    “근데 그걸 아씨가 어떻게 아세요?”

    정오가 물었다.

    “공자님께서 가르쳐 주신 거겠지.”

    말순의 말에 내가 애매하게 웃었다. 고요한 미소가 거짓말이 될 수도 있다.

    “아씨, 이거 보세요, 세상에! 이게 유리 거울인가 봐요.”

    손바닥만 한 유리거울을 들고 말순이 입을 떡 벌렸다. 벌린 입과 붉은 혀까지 거울에 고스란히 비쳤다. 놀란 말순이 거울을 던질까 봐 내가 얼른 빼앗았다.

    “이건 잘 깨지는 거야.”

    “아씨, 이건 뭐예요?”

    이젠 아예 나에게 대놓고 묻는 정오다.

    “유리구슬 목걸이네. 이번에 유리 제품을 많이 들여왔나 보다.”

    중간에 유럽을 들렀다 왔나? 폭풍으로 항로가 바뀌어서 오히려 이득이 된 거구나.

    “아씨, 이건 뭐에 쓰는 거예요?”

    유리거울에 정신이 팔린 정오 대신 말순이 작은 황금 십자가를 손에 들고 물었다. 눈이 환해졌다.

    이거 순금인 거 같은데? 게다가 십자가의 한 가운데는 손톱 크기의 붉은 루비가 딱! 박혀 있다.

    이 귀한 보물을 무슨 잡동사니처럼 대나무 바구니에 유리제품과 함께 담아서 보내냐? 하여간 오 여사님의 큰손은 못 말린다.

    아니다. 지금 시대에 유리는 보석 취급을 당했다. 오 여사님 눈에는 손바닥만 한 유리 거울이나 황금십자가나 거기서 거기다.

    “이거 생겼으니 비누를 만들자. 정말이지, 그동안 미치는 줄 알았어.”

    내가 코코넛 오일을 들며 말했다. 그동안 장미수나 창포수나 찻물 등등으로 씻어도 비누와 샴푸의 개운함에는 미치지 못했다.

    친구 중 한 명이 수제 비누를 만드는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몇 번 비누를 만드는 과정을 봤다. 재료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원리는 알고 있다. 꼭 코코넛 오일이 아니어도 기름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데 그동안 정신이 복잡해서 그런 일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제 김인수는 현대에서 잘 살 거고 나는 돌아갈 길이 없음을 알았으니 이 세계에 목숨 걸고 적응해야겠다. 그리고 비누는 내 위생과 미모를 위해서는 필수다.

    “일어날래.”

    “아씨, 오늘은 밖에 눈보라가 쳐요. 그러니 절대로 나가시면 안 돼요.”

    “안 나갈 테니 내가 말하는 걸 가져와.”

    친구가 MP비누, CP비누 어쩌고 했을 때 흘려들었는데, 역시 내 머리는 이럴 때 유용하다. 친구의 말이 토씨까지 그대로 기억이 났다. 가성소다를 잿물로 바꾸는 것 외에는 나머지는 그대로 해서 비누를 만들기 시작했다.

    잿물 비율을 몰라서 수없이 실패하다가 드디어 적당한 비율을 알아내어 성공하는데 꼬박 육 일이 걸렸다. 그리고 목욕을 했다. 내가 만든 천연 비누로.

    천상의 선율이 귓가에 들리는 줄 알았다. 이런 사소한 기쁨이 잠시나마 목선후와 김인수를 잊게 했다.

    “비누 가게를 열어야겠어. 정오야,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이거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어보고 와.”

    코코넛 오일을 흔들었다. 코코넛 오일이 없으면 다른 오일을 써도 되지만 일단 최대한 코코넛 오일을 쓰는 게 좋다. 게다가 코코넛 오일은 그 외에는 마땅히 쓸 데가 이 세계에는 없다. 먹거나 바르거나 외에는.

    “엑, 이거 먹는 거예요? 냄새가 이상해요.”

    달콤 느끼한 코코넛 오일 냄새를 맡은 정오가 질색을 했다. 생선 비린내는 맛있다고 달려들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내가 원하는 만큼 사 줄 수 있다고 하셨는데 가지고 온 양이 많지 않았다. 서양에서는 쓰일 일이 많지만 여기서는 어디에 써야할 지 몰라 조금만 싣고 왔단다. 일단 다 내가 사기로 했다.

    한씨 상단은 안부자의 도움을 고마워하면서 코코넛 오일이 든 나무통을 두 개 보내왔다.

    나무통이 작진 않지만 이걸로는 가게를 열 정도는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공급을 받을 수도 없으니 문제였다.

    “소기름, 돼지기름, 오리기름, 닭기름, 에휴 이런 건 별론데.”

    내가 중얼거리자 말순이 물었다.

    “왜요, 아씨? 무슨 기름이 필요하신데요?”

    “그냥 두면 굳는 기름.”

    “들깨 기름이 굳어요, 아씨.”

    “아마씨 기름도 굳어요.”

    오오! 내 등급외 하녀들은 알고 보니 천재였어.

    “근데 아마가 뭐니?”

    내가 묻자 하녀들이 아씨가 정말 이상해졌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뒷산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하얀 꽃 있잖아요.”

    “보라색이야.”

    말순이 정오의 말을 수정했다. 하얀색이면 어떻고 보라색이면 어때? 들깨보다는 향기가 좋겠지.

    “그거 씨는 먹을 수 있는 거야?”

    “그럼요. 없어서 못 먹죠.”

    음식의 재료라면 비누의 재료로도 나쁘지 않다.

    “근데 생으로는 못 먹어요. 물에 담궜다가 볶아 먹어야지 안 그러면 배가 많이 아파요.”

    고사리나 토란대처럼 독성이 있구나.

    “아마씨 기름은 비싸?”

    “아니오. 들기름이나 참기름보다 싸요.”

    “잘 됐구나. 가서 좀 사와. 기름집 가면 있지?”

    “아마씨가 있으면 볶아서 짜 달라고 할게요.”

    이 시대는 씨를 즉석에서 볶아 기름을 짜 준다. 그 정도도 엄청 대단한 기술이라 안씨네 기름집은 연일 성황이다.

    정오가 나가고 말순은 육 일 동안 열심히 만든 코코넛오일 비누를 한 개씩 연잎에 쌌다.

    “사람들한테 줄 때 꼭 말해야 돼. 먹으면 안 된다고. 죽지는 않지만 배가 많이 아파. 그리고 이걸로 씻고 나면 물로 남김없이 씻어내야 해. 비눗기가 남는다고 죽지는 않지만 피부에 안 좋아.”

    이 정도로 말해도 될까? 죽지는 않지만, 이라는 말을 너무 넓게 해석해서 결코 죽지 않는다, 로 이해하면 안 되는데.

    “눈을 씻거나 상처 난 데는 안 되고. 알았지? 꼭 말하고 줘야 한다?”

    “네, 아씨.”

    일단 우리 집에 있는 여인들에게 한 개씩 선물해서 반응을 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위생문제가 컸다. 이 시대는 고기가 부족해 거의 채식을 하지만 그래도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매우 비위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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