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안부자의 후회
장진한이 놀라서 물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세자빈 마마를 봬야겠다.”
“아버지, 곧 전하께서 납시는데요. 세자빈궁까지 다녀오시면 늦사옵니다.”
세자빈은 회임한 후 관례에 따라 자신의 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외부인을 만나지 않지만 친정 식구는 예외였다.
“하면 네가 다녀오너라. 이 애비가 곧 낙향한다고 말이야. 오늘이 마지막 입궁이라고 전해라.”
“아버지, 그게 무슨 일이십니까?”
“모르겠느냐? 우리가 사마의다. 누군가 우리의 세력을 견제한다는 뜻이다.”
“그게 누굽니까?”
장현봉은 아들에게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어서 사직 상소를 써야겠어.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갈 때는 하루, 한 시간이 중요하다. 때를 잘 맞춰야 한다. 그는 조급했다.
“너는 어서 세자빈궁으로 가거라.”
아들을 내보내고 장현봉은 친한 승지를 붙잡고 상소문을 쓸 만한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다. 승지는 그를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세자빈궁으로 가던 장진한은 머리를 쥐어짰다. 장씨 집안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자들이 누구지?
지금 장씨 집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승장구하고 있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 누군가 불씨만 툭! 던진다면 여기저기서 물어뜯을 것이 자명했다.
인기가 하늘을 찌르다가 하루아침에 망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하지만 도대체 누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많은 사람 중에 딱 이 사람이다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답답했다.
세자빈을 만난 장진한은 회임한 누이동생이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아버지가 잠시 쉬고 싶어 하시나 자신은 경시서령으로 도성에 머물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염려 말고 연통을 넣으라고 했다.
세자빈은 오라비보다는 심계가 깊어서 부친의 생각을 바로 이해했다.
“잘 알겠습니다. 아버지께 저는 염려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곧 뵙기를 바란다고요.”
“세자빈 마마, 아무 걱정 마십시오.”
“네.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장진한이 간 뒤에야 세자빈은 세자가 장진한에게 물을 것이 있었음이 생각났다. 세자가 그렇게 말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사소한 일은 아닐 텐데. 어쩐다?
“마마, 소인이 가서 불러올까요?”
장 상궁이 묻자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어쩔 수 없겠구나. 기회가 있겠지.”
오늘은 아버지의 사직상소가 제일 중요했다. 외척의 세력을 늘 경계하던 진 왕조다.
만약 이대로 중서령까지 됐다면? 깨닫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자신은 무사하겠지만 장씨 집안은 무슨 이유를 붙여서든 제거할 속셈이다. 다름 아닌 시아버지의 주도로 말이다.
“휴, 다행히 아버지께서 일찍 깨닫고 사직하신다니 일단 위험은 지나갔다. 운이 좋았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세자빈이 긴 의자에 눕자 장 상궁이 세자빈의 부은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벌써 이리 붓기 시작하니 어찌합니까?”
“괜찮다. 귀한 아기씨이니 참아야지.”
세자빈은 피곤한 듯이 눈을 감았다. 세자빈은 아침 한차례 연회에 참석한 후로는 세자빈궁에서 새해 첫날을 호젓하게 보냈다. 부친의 낙향은 자신이 아들을 낳는 순간 해결될 일이다. 그녀는 부푼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
오후의 연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왕의 안색은 내내 우울해 보였다. 어주를 내리는 차례가 되어 삼성육부의 수장들이 어주를 받았다. 좌복야 장현봉은 두 번째로 어주를 받아서 소매로 입을 가리고 마셨다.
왕은 이례적으로 목이후에게도 직접 어주를 내렸다. 황공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목이후와 어사중승을 왕이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목이후는 이유를 몰라 떨었지만 어사중승은 왕의 눈길 속에 회한과 슬픔이 담겨 있음을 알았다. 선후, 아니 왕자님과 아직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셨구나.
자신이 이십 년을 기른 목선후라 그의 성품을 잘 안다. 어느 날 갑자기 왕자로 부른다고 철없는 어린애처럼 좋아할 아이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총명해서 사람들 눈에 띌까 염려했더니 아버지의 염려를 알고 그다음부터는 알아도 모른 척하면서 자신을 숨겼다. 노련한 자신도 따라가지 못할 지혜가 있는 아이였다.
어주를 내리는 순서가 끝나고 음악이 연주되자 왕이 세자를 불렀다.
“남은 순서는 세자가 진행하라. 과인은 대비전에 가 봐야겠다.”
“예, 아바마마.”
왕은 자신의 후계자인 왕세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특별히 모난 구석이 없는 성실하고 착한 아이다. 그는 세자에게 불만이 없었다. 이 정도면 자신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은 왕이 될게 분명했다.
“세자야, 오늘 수고하였다.”
“황공하옵니다.”
칭찬을 받은 세자의 뺨이 순간적으로 붉어졌다. 왕은 세자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이고 자리를 떴다. 모든 사람의 눈에 왕이 세자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세자가 자리에 앉자 임승휘가 나비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술을 올렸다. 한참 연회가 무르익었을 때 승지가 다가와 작은 소리로 장인인 좌복야가 사직상소를 올렸는데 어찌할 지 물었다. 좌복야는 상소를 올리고 즉시 궁을 떠났다고 한다.
“전하께서 대비전에 계시네. 내가 따로 말씀 드릴 테니 오늘은 올리지 말게.”
“좌복야께서 반드시 오늘 올려 주십사 하셨습니다.”
“저녁 문안드릴 때 내가 말씀 드리지.”
“황공하옵니다. 저하, 이 상소문은 어서방에 두겠사옵니다.”
승지가 몸을 돌리자 세자가 불렀다.
“어서방에 두지 말고 자네가 승지방에 가지고 있게. 내가 말을 먼저 한 다음 올리게.”
“그리하겠사옵니다.”
승지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세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식사 시중을 드는 임승휘를 돌아보았다. 세자빈이 총명하고 심계가 깊다면 임승휘는 단순하고 다정했다. 할마마마와 어마마마는 자신을 대놓고 총애했다.
세자 인생에 여인은 이 세 종류뿐으로 여인이 남자들과 다름없이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라는 생각은 한 순간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특별히 예쁘게 생긴 시녀가 세자의 상에 새로운 음식을 올렸다. 임승휘는 화들짝 놀라 세자 저하, 라고 부르면서 세자의 시선을 끌었다.
이런 모습도 귀엽다고 세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그 시녀도 예뻤지. 두 번째의 승휘가 생길 때도 되었는데 초조해하는 임승휘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승휘, 상등이 곧 완성되어 들어온다는구나. 시험 삼아 안전한 곳에 설치를 했다가 나중에 동궁으로 옮길 예정이다.”
“어마, 기대가 크옵니다, 저하.”
임 승휘가 장미꽃 같은 미소를 흘리며 세자의 손등에 하얗고 가녀린 손을 얹었다.
***
잠시 정신을 잃었던 한인수가 멀쩡해지자 정 공자가 이건 귀신의 장난이라고 굿을 해야 한다고 놀리기 시작했다.
새해 첫날 액땜한 셈 치라는 문객도 있었다. 누군가는 예쁜 아씨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장난친 거 아니냐고 놀리기도 했다.
한인수는 뭔가 생각날 듯 말 듯해서 아직도 멍한 상태이지만 왠지 시원한 기분이었다. 뭔가 마음속에서 정리된 듯도 하고, 끊어진 듯도 했다. 머리도 맑고 기분도 좋아서 문객들의 놀림에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떠들썩한 학당에 갑자기 안씨 저택의 대문을 지키던 문지기가 뛰어 들어왔다.
“한 공자님, 한 공자님!”
이 문지기는 한씨 상단을 잘 아는 사람으로 한씨 상단의 몰락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한인수가 드나들 때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하곤 했다. 그런 사람이 숨도 못 쉬고 뛰어 들어와서는 한인수를 찾았다.
한인수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렸다. 집안에 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을까? 아직도 투자자들이 가끔 들러서 아버지를 괴롭힌다는 말을 들었다.
“무슨 일인가?”
“한 공자님, 아이고, 공자니임! 이제 고생 끝입니다요.”
“무슨 일이기에?”
“한씨 상단의 배가 들어왔답니다. 아라비? 뭐 그런 나라까지 다녀왔는데 귀한 물건들을 잔뜩 싣고 돌아왔답니다. 이제 한씨 상단은 살았습니다요.”
“축하하네. 한 공자.”
“아이고, 새해 첫날부터 희소식일세.”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모두 한 마디씩 하는데 한인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믿기지 않아서 문지기가 하는 말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할 뿐이었다.
배가 돌아왔다. 그것도 비단을 팔고 새 상품을 가득 싣고.
그 물건들은 이 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는 이국의 물건들이고 부르는 게 값이다. 사실이라면 한씨 상단은 일어설 수 있다!
한인수가 벌떡 일어났다.
“집에 가 봐야겠네.”
정 공자에게 말하자 문지기가 재촉했다.
“주인님은 이미 아십니다. 인사하느라 시간 낭비 하지 마시고 빨리 가 보시랍니다. 하실 일이 많을 거라고요. 주인님께서도 사람을 보내 도우신답니다.”
“어서 가게.”
정 공자가 밀었다.
“말이 준비돼 있습니다.”
“아, 안용이에게 인사를 해야…….”
“무슨 소리!”
정 공자는 발을 들어 한인수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었다. 아까 기절하는 통에 아씨와 둘만 방 안에 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얼마나 당황했는데.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목선후는 정 공자를 친구라고 말했지만 정 공자 역시 왕이 보낸 사람으로 정확히 말하면 공무수행중인 어사였다.
“고맙네. 정 공자, 학당은 자네가 좀 수고해 주게.”
“염려 말고 어서 가게.”
한인수는 비로소 현실감이 드는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대문으로 달려갔다. 대문 앞에는 안부자가 말고삐를 잡고 서 있었다.
“어르신.”
감격한 한인수의 눈에 습기가 어렸다. 겉으로는 냉담하고 무심해 보여도 실은 다방면으로 도와준 안부자다. 사위의 눈치를 보면서도 그를 선생으로 채용할 정도였으니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어서 가거라.”
“다녀오겠습니다.”
한인수가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본 안부자는 천천히 몸을 돌려 석양이 깔린 저택을 바라보았다. 형제나 다름없는 한씨 상단이 되살아났으니 기쁘기 한량없었지만 안용의 일을 생각하면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목선후 한 사람만 놓고 본다면야 따라올 사윗감이 없지만 신분이 그토록 위태한데다 이제는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졌다.
그런데 한인수는 안씨보다 더 부유해질지도 모른다. 안부자는 한씨 상단을 시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왕이 혼인을 명했을 때 죽을 각오로 응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