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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59화 (59/92)

59화. 진욱왕자

진욱 왕자의 뒤에는 왕실의 핏줄임을 나타내는 옥골선풍의 아들들과 손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진욱 왕자는 장현봉을 보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드러내놓고 비웃었다.

“하교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눈치라면 백년 묵은 여우처럼 비상한 장현봉이 비웃음의 의미를 물었으나 진욱 왕자는 더 크게 비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바보냐? 가르쳐 주게? 라는 눈빛이었다.

이윽고 행렬이 움직이자 더 이상 말을 나눌 수가 없어서 장현봉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없었다. 경시서령에 임명된 아들도 생각보다 착실하게 일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귀한 아기씨를 회임한 세자빈이 자신의 딸이 아닌가. 별일 아니다. 늙은이가 질투를 하는 거야. 장현봉은 꼿꼿한 진욱 왕자의 뒷모습에 마음속으로 침을 뱉었다.

***

아무도 깨우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늦잠을 잤다. 깨어나서 천장을 보며 멍하니 누워 생각에 잠겼다.

당신의 손길 아래서 떨고 있는 한 문제 될 거 없어요, 라니. 으아, 부끄러워.

비록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 뜻이 전달됐다. 그의 뜻도 내게 전달되었으니까. 이불을 얼굴에 뒤집어썼다가 답답해서 다시 내렸다.

어젯밤 우리는 그동안의 오해를 씻기 위해 대화라는 걸 했다. 잉꼬부부인 안부자와 오 여사님도 현대인인 내 입장에서 보면 대화가 거의 없다. 말은 짧게, 눈치는 길게. 그게 이 시대의 부부들이다.

나는 목선후와 내가 그보다는 나은 관계가 되기를 원했다. 어젯밤 옆으로 누워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남자의 윤곽을 눈으로 더듬으며 물었다.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요?”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하지만 우리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고…….”

정오와 말순이 말해 주었지. 소 닭 보듯 한다고. 목선후가 안안용에게 무심하고 무시한다는 뜻이었다.

증오보다 더 못하다는 무시를 받고 살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다. 안안용에게는 한인수라는 장애물이, 목선후에게는 숨겨진 왕자라는 장애물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한쪽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고 오해만 쌓였던 것이다.

“나는 그대가 한 공자를 잊고 나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런데 생각보다 그대는 빨리 마음을 정하더군.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었소.”

“오래 기다리면 안 기다리려고 했어요?”

사랑은 유치하다. 사소한 행동에 감동하고 분노하고 사소한 말을 확인하려고 한다.

“예기치 않게 그대가 친정으로 가 버리는 바람에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나를 따라 안씨 저택으로 온 거였구나. 쉽게 따라오더니.

“소문이나 평판 따위는 내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물론 아버지의 체면은 좀 깎이겠지만. 아버지는 오랫동안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분이오. 체면 좀 깎인다고 상관하실 분이 아니지.”

“정말로 나 때문에 처가살이를 한 거예요?”

“물론이오.”

“그, 내가 장미가시를 뽑아달라고 했을 때 왜 그렇게 싫어했어요?”

내게 손끝도 닿기 싫어하는 태도가 너무 확연해서 열 받았었다.

“바보, 남자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군.”

바보 맞나 봐. 지금도 모르겠어.

“싫어했던 게 아니었소. 물론 그대가 어머니를 힘들게 한 점에는 화도 났었고 때로 실망도 했지. 그러나 그런 때조차 싫어하지는 않았어. 단지 너무 연약해 보여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거요.”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사랑스러운 시각으로 나를 그린 거였구나. 이제야 논어 제7에 끼워져 있었던 그림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목선후의 진심을 알고 나니까 그 그림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그리고 또 궁금한 게 있어요.”

“말만 하다가 밤을 샐 거요? 나는 새벽에 일찍 가야 하오.”

정력도 좋으셔라. 아까 한 것은 안 쳐 주냐? 정말 밤새 할 생각인 거야?

“갑자기 내 방에 들어온 날. 그날 정말 도둑이 왔었나요? 관음증 도둑?”

“설마!”

목선후가 웃더니 내 위로 몸을 겹쳤다.

“정말 위험했었어. 전하께서 동침하는지 확인하고 오라고 사람을 보내셨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다음 날 안씨 상가는 이유도 모른 채 상권을 빼앗기고 그대는 소박을 당했을 거요.”

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잠시 숨을 헐떡였다.

“또 있어요. 팽문은 누구예요?”

“팽문? 내 하인이잖소.”

4등급 하인이 어디 있다고.

“뭐,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요.”

“정 공자와 팽문은 내 친구나 다름없소.”

“정 공자라고요?”

두 번째로 코가 막히고 기가 막혔다.

“내가 천거한 사람들 중 정 공자만 내 사람이었소, 그런데 그대는 그를 뽑더군. 이거야말로 인연이 아니오? 우리는 삼생에 인연이 있는 게 틀림없소.”

그건 맞아. 나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너를 만났으니까.

“생각해 보니 정말 궁금하군. 왜 정 공자를 뽑은 거요? 정 공자가 과거에 합격한 전력은 아무도 모르는데. 정 공자는 전하의 비밀 어사라오.”

역시. 등급은 정확하다.

“잘생겨서요.”

“안용, 잘 생각해서 대답하시오. 내일 정 공자가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질투쟁이.”

“질투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

“그 말 잊지 말아요. 나중에 다른 여인을…….”

“쉿, 안용. 그런 일은 없어. 절대로.”

“믿어요. 공자님은 마음이 변해도 스스로의 맹세를 깰 분이 아니니까요.”

“그대의 마음은 변할지라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요.”

맞아. 내 마음이 변할지 안 변할지는 사실 나도 모르니까. 감정은 불수의근이라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거든.

“그거 알아요? 나는 공자님처럼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그가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쪽, 입을 맞췄다. 참 단순한 고대인이다. 잘생김과 좋아함을 같은 뜻으로 해석하다니.

해야 될 말이 아직도 쌓여 있었지만 새벽 시간은 무섭게 빨리 다가왔다. 이별의 슬픔이 몰려와 울적해하자 목선후가 넓은 가슴에 나를 안고 부드럽게 달랬다.

“안용, 그대를 위해서라도 내 신분이 확실해야 하오. 그러니 나를 믿고 기다려요. 모든 일이 잘 될 거요.”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끊임없는 목선후의 음성은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눈물을 눈꼬리에 매단 채 아이처럼 잠이 들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신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떠났다. 그사이 나는 한인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정 공자가 시시콜콜 다 말했을 테니까 안안용과 한인수와의 관계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한인수가 왜 4등급이 되었는지. 만약 그가 본래의 한인수로 돌아왔다면 김인수는 나처럼 빙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김인수는 완전히 죽어 버린 걸까?

내가 살리고 싶었던 아이. 육교의 계단에서 굴러서 발목이 삐고 다리에 피가 흐르는데 아픔도 느끼지 못할 만큼 다급했던 순간.

어두운 도시의 밤 속으로 몸을 던진 아이를 나도 모르게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의 순간. 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던졌다.

반드시 구하고 싶었는데 정말 그 아이는 죽었을까?

서른 살이었던 나도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어떤 기쁨과 슬픔이 기다릴지 몰랐는데. 겨우 열여덟에 인생을 포기하다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찢어진다.

지금까지 나는 김인수가 이 세상으로 왔을 거라고 생각해서 계속 스스로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를 그 아이도 잡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마음속 더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뜨거운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이 순간까지 내가 얼마나 간절히 그 아이가 살아 있기를 원했는지 나도 몰랐다.

흑흑흑. 참을 수 없는 울음이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인수야, 왜 그렇게 쉽게 생을 포기했니? 네 앞에 아직도 팔십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왜 믿지 않았니?

사랑도 변하지만 미움도 변한단다. 원한도 변해서 용서가 되기도 하는데. 왜 그랬니? 왜 순간의 절망에 너를 던져버렸니? 몇 시간만 참지. 밝은 태양이 떠오르면 간밤의 악몽은 사라지는 법인데.

김인수에게는 수능 명강사가 아니라 영혼의 치료자가 필요했던 거였다.

나는 마지막에 쌤은 다를 줄 알았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 김인수는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그의 영혼을 치유해 주기를 원했다.

그 아이가 마지막 동아줄처럼 이 별 볼 일 없는 학원 강사를 의지했음을 지금은 안다. 어쩌면 나는 내 눈에만 보이는 등급 때문에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 소홀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랬다. 김인수가 일 등급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애를 학원에 받지 않았을 테니까.

미안해, 미안해. 인수야.

***

한겨울 해변.

설날 아침, 사람들은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즐겁게 떡국을 먹거나 차례를 지내고 있다. 가게도 설날 오전은 문을 열지 않는다. 을왕리의 많은 식당들도 저녁부터 문을 열거나 오늘 하루 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물이 빠지는 때라 모래사장이 하얗게 드러나서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였다. 남자 대학생 자원봉사자와 함께 닥터 조는 휠체어를 밀며 해변에 내려갔다.

바퀴가 모래에 푹푹 빠져서 몇 발걸음 못 가 휠체어가 멈췄다.

“선생님, 여기까지밖에 못 갈 거 같아요.”

“그렇겠네요. 학생, 혼자 식사를 좀 하고 올래요? 문을 연 곳이 있을 거예요. 나는 입맛이 없고, 얘랑 둘이 얘기를 좀 하려고요.”

닥터 조가 카드를 꺼냈다.

“맛있는 것으로 드세요. 오늘은 설날인데 봉사하러 와줘서 더 고마워요.”

“어차피 집에 갈 수가 없었어요. 다녀오겠습니다.”

신이 난 대학생이 카드를 들고 해변 위쪽의 즐비한 식당가로 달려갔다.

닥터 조는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인수야, 여기 기억나? 너 어렸을 때 한 번 왔었어. 을왕리 해수욕장이야.”

특수 제작한 이동 침대 겸 휠체어에 누운 김인수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아들의 얼굴을 따스하게 바라보던 닥터조가 밀려오는 파도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가까운 곳도 인수와 단 한 번 와 봤다. 일 년에 몇 차례씩 해외에서 개최되는 의학회는 잘도 가면서 아들에게는 단 며칠도 할애하지 않았다.

한겨울 해수욕장에는 커플 한 쌍이 서로의 체온을 의지한 채 꼭 붙어서 걷고 있을 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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