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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58화 (58/92)

58화. 선택

새해 첫날, 기쁘고 희망찬 설날 새벽, 안씨 저택을 나서 목선후는 대문 밖에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의 휘장을 걷고 안씨 저택의 커다란 대문을 보면서 이것이 정말 그녀와 마지막이 되면 어떡하나,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견딜 수 없어서 주먹을 꼭 쥐었다.

그는 평생 특별히 무엇인가를 원한 적이 없었다. 세상은 그에게 펼쳐진 책처럼 분명하고 쉬웠다. 무엇이든 얻고 싶었으면 쉽게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싶다는 것 외에 따로 원하는 것이 없었고 종내는 그 길마저 막혔다. 간절함이 없으니 두려움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못 견디게 두려웠다. 자신의 앞날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시는 안안용을 못 보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녀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그를 옭아맸다.

스스로도 억제하기 힘들 만큼 차오르는 불안감 때문에 목선후는 마차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잠시 후 마차는 목씨 저택 앞에 섰다. 목선후가 새벽 여명을 헤치며 명현당에 이르자 무석이 나타났다. 목선후는 왕이 보낸 간단한 서신을 보고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왕의 뜻을 알고 있었지만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으로 스무 해를 살아왔다.

왕자로 복권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길이다.

그런데 왕과 대비마마는 기어이 자신을 왕자로 만들려고 한다. 이전에는 왕과 대비마마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분들의 원이라면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의 아내 안안용.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바보 같고 때로는 이상한 데서 기민하지만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다. 목선후 인생에 정말로 원하는 것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 아무리 왕과 대비가 원해도 목선후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의 바람은 간단했다. 평민으로 안안용과 조용히 사는 것.

그런데 세자와 장씨 집안에서 눈치를 챘다. 다리 부상 때문에 왕과 대비도 마음을 바꿨다. 목선후가 아무리 조용히 살겠다고 해도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순 없지.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목선후는 버려야 한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목선후는 그 운명의 끝에 안안용이 있다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

새해 첫날 문무백관과 종친들이 모두 모여 새해를 축하하는 문안인사를 왕에게 올린다.

지방관들은 특산물을 가지고 인사를 하고 문인들은 시를 쓰고 궁중 악사들이 점잖은 궁중음악을 연주한다.

오후에는 왕이 신하들에게 음식과 어주와 금은보석을 하사하는 연회가 베풀어진다. 이 시간에 왕은 자신의 숨겨놓았던 아들을 소개할 계획이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왕비와 세자는 충격과 배신감이 크겠지만 한 번 크게 놀란 후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왕실이 받아들이고 나면 문무백관이 뭐 어떻게 할 것인가?

왕은 그렇게 마음을 먹고 신년하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침에 무석이 목선후의 답변을 가지고 돌아왔다.

목선후는 이미 열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왕의 계획도 조정의 반대와 왕실의 충격, 무엇보다 세자의 태도를 염려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십니다.”

“또?”

얼마나 기다려야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마음의 준비를 하느라 입맛을 잃을 정도인데 또 늦추라고? 이 모든 게 그놈이 자식이 없어 아비의 심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왕은 괜히 심부름을 한 무석만 노려보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아픔의 정도가 다르다. 부모는 연약한 자식이 더 안쓰럽고 애틋하다.

생모인 왕비가 건재하고 지지기반도 탄탄한 세자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막내아들. 그 사이의 공주들에게는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왕은 자애로운 아비였고 후계다툼도 없어서 왕실과 후궁은 두루 평안했다. 뒤늦게 찾은 큰아들만이 그의 일생의 한이었다.

왕이 되어서 이것 하나를 못 하다니 왕이랄 수도 없다. 왕은 분노에 차서 오히려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싫다면 제깟 놈이 뭘 어찌하겠다고?”

“송구한 말씀이오나 풍월문으로 들어가시겠답니다.”

무석이 납작 엎드리며 대답했다. 이런 대답을 하는 자신이 너무 억울했다. 자신은 원래 왕의 비밀호위무사인데 어쩌다 숨겨진 왕자와의 가교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한탄스럽다. 시작은 작은 일이었는데 갈수록 복잡해지더니 부자가 똑같이 고집이 세고 머리도 좋아서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를 않았다.

역시나 왕은 화를 발칵 냈다. 방금까지도 참더니 한계에 이르렀는지 목에 핏줄이 섰다. 왕이 이정도 화를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뭣이라고? 풍월문이 뭐냐?”

무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신비문파입니다. 본거지가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옵니다. 소인도 소문만 들었습니다. 사실은 그리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르옵니다.”

“나는 너보다 더 뛰어난 무인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너에게 묻겠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 나라의 왕이 겨우 무인 집단에 불과한 풍월문인가 뭔가 하는 자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눈앞에 있는 사람은 왕이다. 이 나라 백성 중에서 풍월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신비문파라도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

“전하, 풍월문 역시 전하의 백성이옵니다. 전하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리하시면 왕자님의 마음을 온전히 얻기 어려울지도 모르옵니다.”

“고얀 놈. 이 고얀 놈. 애비가 왕인데. 세자도 나에게 복종하는데.”

어이가 없는 놈이다. 왕권의 지엄함과 왕실의 엄중함을 모르는 놈이 아닌데 이리 나온다. 잔뜩 부풀어 오른 가슴이 내려앉으며 십 년은 늙은 기분이다.

대비마마는 더하실 텐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날만 손꼽아 기다린 대비마마시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죽기 전에 유일한 소원이라고까지 말하며 왕을 압박하고 있다. 그런데 또 늦추다니.

신년하례를 받기 위해 의정전으로 향하는 왕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

“그게 무슨 말이오?”

세자는 신년하례를 위하여 용포를 입다가 마지막으로 소맷자락과 목깃을 여며 주는 세자빈의 말에 눈썹을 치켜떴다.

“경시서령이 뭐라 했다고?”

“어사중승의 둘째 아들인 목선후가 저하와 많이 닮았다고요. 그래서 소첩이 그랬죠. 이 나라에서 잘난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왕실 사람과 비교를 한다고요. 소첩은 저하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못 봤습니다.”

“맞아.”

“네. 저하께서 제일 잘나셨지요.”

세자빈이 빙긋이 웃으며 수려한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 분을 닮은 아들을 낳고 싶다. 이번에 아들을 낳으면 왕권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그러면 누구도 내 자리를 넘볼 수 없을걸. 후궁인 임승휘 따위? 흥! 세자빈은 코웃음을 쳤지만 겉으로는 조신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게 아니라, 그자가 나와 닮았다고 했소. 중문 상가의 포목점에서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 처남은 닮지 않았다고 했다오.”

“아! 그랬군요.”

세자빈은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세자 저하가 임승휘와 중문상가에 구경 나갔다가 화재현장에서 범인을 잡은 일은 오라버니에게 자세히 들었다. 자신은 회임을 해서 움직이기 어려우니 데리고 나가지 못했음을 알지만 그래도 섭섭했다.

오라버니는 상등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다. 세자 저하가 상등 하나를 주문했다고 하니 조만간 보게 될 것이다. 화재의 위험이 있으니 세자빈 처소에는 결코 설치하지 않겠지만 구경은 할 수 있겠지.

세자빈이 상등을 생각하는 동안 세자는 목선후란 이름을 생각했다.

이 정도로 말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그자가 나와 닮아도 보통 많이 닮은 게 아니란 뜻이겠지. 게다가 장진한이 누이에게 한 말과 자신에게 한 말은 정반대다. 몰라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느낌이다. 왜 장진한은 목선후가 나와 닮았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을까? 세자는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시서령이 오늘 입궁했소?”

“네, 저하.”

“그에게 물어봐야겠군. 자, 이제 갑시다. 아바마마께서 일찍 오라고 말씀하셨소.”

세자 내외가 옷을 다 차려입고 세자궁을 나와 의정전으로 가는 동안 문무백관들이 궁문 앞에서 입궁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어사중승과 목이후도 있었다. 목이후는 신년하례에 참석할 품계가 아니었으나 왕의 지시로 부친과 함께 참석했다. 왕은 그동안 자신의 아들을 잘 키워 준 어사중승이 고마웠고 오늘 특별한 발표를 할 참이었기 때문에 목이후까지 초청했다. 그도 좋은 형이었다니까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었다.

초대 된 이유를 잘 모르는 목이후는 괜히 으쓱거리는 어깨와 떨리는 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종친과 외척들이 서 있는 줄을 쓰윽 훑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시선을 돌렸다. 경시서령 장진한이 자신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노골적이라 목이후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이유지?

장진한이 사돈인 안씨 상가에 불이익을 줄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는데 화재가 났을 때 세자 저하가 계셔서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경시서령에게 특별히 문제되는 일도 아니었고 체면을 깍지도 않았는데 무슨 원수라도 진 듯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하께서 특별히 입궁하라고 하신 것도 이상했는데 혹시 저 자는 그 이유를 알고 저러나? 내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나? 아니면 목씨 집안이? 불안하다.

“아버지.”

목이후가 조그맣게 아버지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목이후가 장진한이 왜 저러는지 물으려는 찰나 공교롭게도 궁문이 열리고 입궁이 시작되었다. 왼편으로 문무백관이 품계에 따라 들어가고 오른편으로 종친과 외척이 들어갔다.

중서령과 나란히 맨 앞에서 가던 장현봉이 오른편에 서 있는 왕의 사촌 형인 진욱 왕자에게 인사를 했다. 한때는 의롭고 혈기 왕성했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그저 깡마른 노인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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