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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57화 (57/92)
  • 57화. 삼종지도를 가르치지 않았네

    마음은 불꽃이 일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나도 목소리를 죽였다. 설마 입구에 서 있던 하인을 때려서 기절이라도 시킨 건 아니겠지?

    내가 좋아하는 느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오는 목선후의 눈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보조개가 예쁘게 그늘을 만든다.

    “그대가 하려던 짓을 먼저 했지. 담을 넘어왔소.”

    “…….”

    그 점잖은 목선후가, 일 등급 천재 목선후가 나를 보려고 담을 넘어왔다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우리의 마음이 통했구나.

    “그대도 나에게 오려던 거였지?”

    뭔가 자신 없는 음성이다. 흠, 학당으로 가려던 참이라고 해볼까? 하지만 그런 사소한 장난을 치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했다.

    “당연하죠. 내가 조금만 더 키가 컸어도 내가 먼저 담을 넘었을 거예요.”

    안채만 벗어나면 다른 곳은 지키는 하인들이 없어서 살살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다음엔 내 등을 밟고 넘게 해 주겠소.”

    이 왕자님은 자신이 왕자라는 자각이 없는 탓에 하인처럼 등을 내주겠다고 한다. 왕자를 밟고 담을 넘는 영광을 누리게 생겼다.

    “공자님, 내가 저기 중문에 있는 하인을 불러서 얘기하는 동안 안 보이게 얼른 방으로 들어가요. 알았죠?”

    “안 그래도 돼오.”

    “정말 하인을 기절시킨 거예요?”

    “아니, 팽문이 알아서 주의를 끌 거요. 우리는 그냥 방으로 들어가면 돼.”

    4등급 마당쇠. 숨겨진 왕자를 모시는 비밀요원으로 007처럼 다재다능할 것이 분명한 팽문.

    본명도 팽문이 아니겠지.

    전각을 빙 돌아 다시 앞으로 나오니 목선후의 말대로 팽문이 중문을 사이에 두고 하인과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인은 팽문의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가서 어느새 같이 웃었다. 고대판 007에게 누가 이기랴. 처음에는 작은 의심이 섞여 있던 하인도 팽문이 말할 때마다 빵빵 터졌다.

    목선후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가면서 보니까 팽문과 하인은 이제 십년지기 친구처럼 나란히 서서 주방 쪽을 보며 명절 음식을 나열했다.

    떡을 다섯 가지나 한다는 둥. 생선만 해도 어른키만 한 항아리에 가득 있다는 둥.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그들이 고향의 요리를 말하고 있을 무렵에는 우리는 이미 방으로 들어와 있었다.

    희미한 유등의 심지를 돋우자 방 안이 환해지면서 우리의 그림자가 벽에 크게 나타났다. 나는 방문 앞에 있는 겨울용 휘장을 쳤다. 이러면 밖에서 안의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

    목선후는 휘장을 치고 돌아서는 나를 숨 가쁘게 끌어안았다. 나도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우리의 입술이 부딪치고 말캉한 혀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원래도 잘하는 키스였는데 참고 참았던 열정이 불을 붙여서 거칠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거칠음이 더 좋았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마법의 가루를 뿌린 듯이 몸이 가벼워졌다. 달콤한 타액을 나누고 서로의 향기에 취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키스에 몰입하면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타인과 몸과 마음까지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안용의 폐는 원래대로 탁구공만 해졌는지 나는 숨이 차고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속에 빠진 것처럼 코끝과 목구멍이 맵고 썼다. 마음은 하늘을 나는데 몸은 바닥을 기었다.

    “잠, 잠깐.”

    그를 밀어내자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붉어진 얼굴의 목선후가 난처한 듯이 눈썹을 찡그렸다. 억지로 참는 사람의 뜨거운 불만이 가득했다. 노골적인 표현이 또 밉지 않다.

    “싫어서가 아니에요. 헉, 헉. 숨이 막혀서 그래.”

    “알아. 하지만 참아 봐요.”

    내 뒤통수를 잡은 목선후가 고개를 숙여 이마와 이마를 맞댔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통째로 내 머릿속으로 복사/붙여넣기를 하려는 것 같다. 아니면 자신의 에너지를 나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빛이 거의 없는데도 그의 등급을 감싼 고리는 환상적으로 밝게 빛났다. 그래, 저 고리가 무슨 뜻인지도 언젠가는 밝혀야 되는데. 왜 그에게만 그런 고리가 있는지를. 왜 고리가 빛나면 내게 힘이 생기는지를.

    “딴생각 말고.”

    이마를 밀며 주의를 주는 목선후에게 내가 입을 삐죽였다.

    내가 무슨 딴생각을 한다고.

    이윽고 내 숨이 편안해지자 목선후가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아직 그 정도로 다리가 낫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려오려고 버둥거렸다.

    “공자님 다리 무리하면 안 된댔어요.”

    “다 나았어요. 자신의 여자도 못 드는 사내는 사내라고 할 수도 없지.”

    웃어야 돼 말아야 돼? 현대에서는 전혀 안 먹힐 소릴 여기서 듣네.

    목선후는 내 심정도 모르고 뿌듯해져서는 절룩거리지도 않고 나를 침상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바로 몸을 겹쳤다. 나는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옷이 성가셔서 성급하게 중얼거렸다.

    “옷 먼저 벗어야…….”

    아우, 방정맞은 이놈의 입. 다행히 그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노골적인 내 말은 못 알아들었다.

    목선후는 체중을 내게 온전히 싣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한 손으로는 내 뺨을 둥그렇게 감쌌다.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그의 말간 눈동자와 미소 띤 입술이 보였다.

    억누를 수 없는 환희와 간질거리는 부끄러움과 달콤한 기대감으로 순식간에 몸이 뜨거워졌다.

    목선후의 손이 귓불을 만지작거리자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의 허리를 더듬었다. 맨살을 만지고 싶었다. 이 시대 남자 옷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벗겨야 되는 거야?

    맞다. 옷고름. 가슴에 손을 대자 손바닥 밑에서 단단하고 뜨거운 근육이 몸의 주인과는 분리된 존재처럼 저 혼자 불끈거렸다. 깜짝 놀라 손을 확 뗐더니 목선후가 나른하게 웃었다. 순진하고 어린 신부를 놀리는 노련한 신랑처럼.

    “저, 저, 우리 초야를 보낸 거 맞지…… 요?”

    아니라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거 꽤 아프니까.

    “확실히.”

    “다행이다.”

    큭큭큭. 내가 왜 다행이라고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는 이 사이로 음흉한 웃음을 내뱉고는 내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아, 이 자세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하는 자세였구나. 늑골이 늘어나는 듯한 느낌인데 그리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하는 배와 하체 때문에 야릇한 기분이 증가했다.

    “어, 어머니가 오시면 어떡해요?”

    “일선이 막아 줄 거요.”

    “일선이 누군데요?”

    우리 집에 일선이라는 하인이 있나? 내가 일선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자 목선후가 가슴 아픈 표정을 했다.

    “안용, 다른 건 다 잊어요. 지금은 나만을 봐. 그대가 보고 싶어 가슴이 다 타 버린 것 같아. 잠도 못 자고 그대 얼굴만 수없이 그렸지. 서재에 가 보면 그리다 만 종이가 산처럼 쌓여 있을 거요.”

    “…….”

    수능 영어라면 침도 안 삼키고 몇 시간이든 떠들 수 있는데. 이런 순간에는 말문이 막힌다.

    입은 막혀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감동했구나. 이토록 단순한 고백에 내 마음이 움직이는구나.

    에디트 피아프가 노래했다. ‘내 몸이 당신의 손아래서 떨고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문제되지 않아.’라고.

    그래요, 에디트, 그 어떤 것도 문제 되지 않아요.

    나는 머리를 들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다급한 손길로 옷이 벗겨지고 차가운 겨울 공기가 피부를 스친다고 느낀 순간 목선후의 넓고 단단하고 뜨거운 가슴이 나를 안았다.

    그의 손아래서 떠는 것. 내가 빙의한 후 가장 멋진 일이었다.

    ***

    깊이 잠든 안안용을 오랫동안 내려다보던 목선후가 방을 나서자 팽문이 다가왔다. 팽문 뒤에서는 안부자가 그믐달이 떠오른 새벽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곧이어 닭이 홰를 치고 뿌연 안개처럼 아침이 달려올 것이었다.

    새해 첫날이니 꼭두새벽부터 일어날 것 같지만 사람들은 섣달 그믐밤을 즐기느라 늦게 잠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평소보다 더 늦게 일어난다. 주방을 담당한 하녀들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지난밤 안부자는 아내가 안채로 돌아오는 것을 막았다. 안용이에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라면서. 어차피 할 일이 많아 거의 밤을 새운 터라 아내는 기꺼이 사랑채에 있는 안부자의 침상에서 쉬기로 했다.

    아내를 재운 후 안부자가 팽문의 안내를 받고 안채로 들어온 시각은 새벽. 불 꺼진 방에서 목선후가 단정하게 옷을 입고 나왔다.

    “장인어른.”

    다가온 목선후가 허리를 굽혔다. 안부자는 달빛에 빛나는 사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잘난 사위였지만 그만큼 위험한 사위이기도 했다.

    오늘 목선후가 목씨 집안으로 돌아가면 그 뒤의 일은 온전히 목선후에게 달렸다. 다시 안씨 집안의 사위로 돌아올지, 아니면 새로운 신분으로 새 삶을 살지.

    앞날의 변수가 너무 많아 산전수전 다 겪은 안부자도 미래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목 서방. 오늘이 자네와 내가 평범한 장인과 사위로 만나는 마지막 날이네.”

    “……네.”

    “이후의 일은 내 손을 떠났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네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가족을 데리고 풍월문에 의탁할 거야. 풍월문주와 나의 계약이 일찍 이루어지는 셈이지.”

    “모든 일이 잘 해결될 테니 심려 마십시오. 장인어른께서 풍월문에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집안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목씨와 안씨 집안을 지키겠다는 사위가 대견했지만 장인은 속내를 감췄다.

    “그러면 좋고. 내 바람은 남은 가족은 몰라도 안용이는 자네가 끝까지 보호해 주면 좋겠네. 일이 잘되어 자네가 왕자로 복위한 후에도 말일세. 하나 자네 장모가 걱정하듯이 안용이는 신분이 낮아서 왕실에서는 왕자비를 따로 들이겠다고 할 수도 있네. 또는 후궁을 들일 수도 있고. 그런 상황이 오면 안용이를 그냥 우리에게 보내주게. 미안하네만 내가 애를 그렇게 안 키웠어.”

    잠깐 목이 멘 안부자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내가 삼종지도를 가르치지 않았어. 안용이는 자네 곁에 있는 다른 여인을 못 볼 걸세. 말라 죽을 거야. 죽는 것을 보지 말고 보내주게. 내가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것뿐일세.”

    첫딸을 어렵게 얻었을 때 그는 하루 종일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다녔다. 도성에서 안부자가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지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렵게 첫 아이를 낳은 뒤로 딸아이가 복을 가지고 왔는지 사업은 더 번창하고 줄줄이 다섯 아들을 낳았다. 자식들이 아비를 닮아 공부와는 담을 쌓았지만 아비인 자신이 잘살고 있으니 아이들도 잘살 것이라고 믿었다.

    안부자에게 안안용은 그의 치열한 삶을 비추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은하수다. 비록 평민이지만 어느 공주보다도 더 귀하고 예쁘게 키웠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한 딸에 대한 그의 사랑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두서도 없이 이것저것 당부했으니 이해하게. 이제 가 보게.”

    뒷짐을 진 안부자가 몸을 돌렸다. 보내고 싶지는 않지만 보내야만 하는 사람의 안타까움과 비련이 서린 몸짓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쉽게 떠날 것이었다.

    “평안하십시오. 조만간 뵙겠습니다.”

    목선후가 안부자의 등에 절을 한 다음 팽문과 함께 중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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