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담을 넘다
“이 어미도 진정할 테니 너, 당분간 별당으로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거라. 알았니?”
“네.”
첫날밤에 대한 기대가 와르르 무너진 내가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북행궁에서 손끝만 스쳐도 찌르르하는 상황을 이미 경험했고, 다음은 눈빛만 마주치면 침대로 뛰어들 차례였는데.
참 운도 없지. 어머니가 하루만 늦게 알았으면 좋았을걸.
“이 어미가 방법을 생각해 낼 때까지 얌전히 있도록 해라. 너에게 무슨 변고가 생기면 어미는 하루도 더 살고 싶지 않으니 명심하고.”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안았다. 아니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어머니의 말을 믿는다. 내가 죽는다고 어머니가 따라 죽는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마음은 죽을 것이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 심정을 십 년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느낀 사람이 나다.
“어머니, 염려 마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오 여사님이 나간 후 동그란 구리거울 앞에 앉아 제비꽃처럼 가냘프고 사랑스러운 안안용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겉모습은 안안용이지만 너는 한때 날리는 수능 명강사였어.
자, 수능 명강사답게 문제를 만들고 답을 찾아보는 거야.
머릿속에 문제지가 형성됐다.
어머니의 우려와 나의 갈등을 문항으로 정리해 봤다. 수능은 오지선다형이지만 이것은 OX 문제다. 핵심 질문 5개를 뽑았다.
1. 목선후 때문에 안씨 집안과 가족들이 위험에 빠져도 상관없을 만큼 목선후를 사랑하니?
2. 목선후가 왕자의 칭호를 받은 후 왕실의 모든 규제로 너를 옭아매도 상관없을 만큼 목선후를 사랑하니?
3. 목선후가 후궁을 들이면 너는 견딜 수 있니?
4. 목선후가 옆에 없으면 네 삶의 의미가 사라지니?
5. 목선후를 못 보면 죽을 만큼 슬플 것 같니?
정직하게 대답해 봐.
원래의 안안용이 어떤 답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5번 문항을 제외하고 모두 X였다.
어머니의 말대로 이혼하면 이 시대 여인에게 큰 굴레지만 내게는 든든한 안씨 집안이 있고 번창하는 사업이 있다. 중문의 안씨 상가는 올 하반기 매출이 백 퍼센트 뛰었다. 이 이득으로 다른 가게를 더 사면 삼 년 후 향시에서 동생들 중 누구도 합격하지 못한다고 해도 살길이 있다.
사랑은 어떨까?
나도 한때는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절절한 사랑도 언젠가는 변한다는 진리에서 나만은 예외라고 믿었다.
그러다 갑자기 전남친에게 뒤통수를 퍽! 맞았다.
평일 오후 네 시 이후로는 시간이 안 나기 때문에 점심시간에 그의 회사 앞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어렵사리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
“헤어지자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 사람이 어떻게 그래? 그동안 나를 사랑했던 거 맞아?”
남자가 상처 입은 듯이 소리칠 때 나는 어이가 없어서 처음에는 입만 벙긋했다.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데.
나는 이미 상처를 받았지만 너만은 고이 떠나가라고 심사숙고 끝에 부드럽게 말하려고 오장육부가 떨리고 있는데, 뭐 어째?
저런 놈이 꼭 면죄부까지 받고 싶어 한단 말이야. 사실 그가 회사 동료와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후였다.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한때는 애틋한 정도 있어서 구구절절 따지지 않고 나름 쿨하게 헤어지자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동안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참고 참았던 내 본성을 드러냈다. 허리에 손을 얹고 테이저건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다다 쏘아붙였다.
“낮부터 수업 준비에 밤까지 수업하느라 끼니도 제대로 못 때우는데 네 점심 시간 맞춰서 와 준 게 쉬운 거라고 말하는 거야?
내가 말을 간단히 한다고 해서 헤어지는 것도 쉬울 거라는 논리는 어떻게 나오는 건데? 성인으로서 사귀었으니 헤어질 때도 성인답게 헤어지면 안 되는 거야?
울며 매달리면서 헤어짐을 애도해야 연애했던 시간이 아깝지 않은 거냐고. 나는 연애할 때도 헤어질 때도 최선을 다했어.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봐. 그래 봤자 깨달을 머리도 없겠지만.”
내 말에 남자는 분노를 넘어 공포를 느낀 듯 고개를 살살 흔들며 사라져 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서 기분이 좋았고 그가 나 같은 여자와 끝나서 다행이라고 안도할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양가감정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연애를 접고 다시 수능 영어에만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연애는 나랑 맞지 않는다면서.
이런 경험을 했던 내가 가족보다 사랑을 선택할까? 아닐 것이다.
***
김인수는 힘든 뇌수술을 이겨 냈다. 그는 정말로 죽음의 문턱에 발을 걸쳤다.
혈종은 컸지만 뇌가 부어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간신히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음번에 뇌출혈이 발생하면 수술하기 어렵다고 했다. 김 원장이나 닥터 조도 이미 알았다.
중환자실에서 다시 일반 병실로, 다시 아버지의 병원으로 돌아오기까지 김 원장와 닥터 조는 번갈아 가며 인수의 곁을 지켰다.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인수가 알아주길 바란 것도 아니고, 신을 감동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표현도 하지 못하는 아들이지만 옆에 있고 싶었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인수는 김 원장의 병원으로 돌아와 다시 코마 상태를 유지했지만 부모는 점점 시간이 다가옴을 느꼈다.
깨어나든지, 죽든지. 어느 쪽이든 결정되는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인수는 어디 한 곳만 잘못되어 코마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다. 9층에서 떨어지면서 온몸이 부서졌고 내장까지 손상되었다. 끊임없이 수술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이번 뇌수술은 가장 위험한 수술이었고 이번에 수술에 성공했지만 다음 수술에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다음 수술이 마지막 수술일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만약, 이대로 보내야 한다면…… 어떡할 거야?”
김 원장의 물음에 닥터 조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미 마음의 각오를 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인수랑 같이하고 싶은 거 다 하려고.”
식물인간 상태의 아들과 같이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닥터 조는 어떤 사람이 이런 상태의 가족을 데리고 여행을 하거나 강의나 파티에 참석했다는 기사를 여러 번 읽었고 기사의 주인공에게 연락을 해서 정보를 모아 두었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지금부터 하나씩 사 둬야겠어. 자동차도 개조하고.”
혼잣말처럼 닥터 조가 조용히 말했고 김 원장은 고개만 끄덕였다. 자신은 감히 시도하려고 생각지 못했는데 아내는 이미 계획을 짜 놓았다.
***
나는 안채에 갇혔다.
안씨 저택은 이십여 개의 전각이 마름모꼴로 모여 있는데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남쪽에 사랑채가 있고 북쪽에 안채가 있다. 서쪽에 학당과 동생들의 처소가 있고 동쪽에 나와 목선후가 지내던 별당이 있다.
지금 안채에서 나가는 모든 문에 하인이 서 있다. 나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갈 때 어머니께 달려가 알리기 위해서다.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뿐이니까.
시댁과의 연회 날 이후 목선후와 나는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목선후는 아직 별당에 있지만 내일 설날이 되면 시댁으로 갈 예정이다. 어머니가 그에게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혹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예 무시하는지 여기 있는 나는 모른다.
정오도 말순도 나보다는 어머니를 더 무서워해서 입을 꼭 다물고 있고 어머니의 태도가 하도 강경해서 아버지도 어쩌지 못하는 것 같다.
방에서 창문을 열고 보니 저물어가는 햇빛 속에서 까치가 한 마리 낮은 담벼락 위를 콩콩 뛰어갔다. 내 머리 높이의 담벼락을 보면서 뭔가를 받치고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잠깐 생각해 봤다.
그때 말순이 간식을 들고 중문을 넘어오는 게 보였다.
“아씨, 방금 찐 떡하고 식혜예요.”
집 안에는 설 명절을 준비하느라 하루 종일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다. 방금 만든 요리들을 맛보는 것으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는 모양이다. 현대에서 쓸쓸한 명절을 보내다가 여기서는 제대로 된 명절을 보낸다고 기대했었는데. 가족끼리 제일 떠들썩하고 즐거운 섣달그믐에 혼자 처량하게 창밖만 내다보고 있다.
어머니는 백여 명의 가솔들을 이끌고 설 준비를 하느라고 아침에 안채를 나가신 후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따뜻할 때 어서 드세요.”
말순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주방이 바빠서 소인도 가서 도와야 해요. 혼자 계시게 해서 죄송해요.”
“괜찮아. 공자님과 팽문에게도 가져다줘.”
“네, 아씨.”
말순이 나간 후 떡을 깨물며 한인수가 왜 4등급으로 바뀌었는지도 알아봐야 하고 목선후도 봐야 하니 이렇게 안채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다. 담을 넘어야지.
나는 따뜻한 떡과 식혜를 먹고 힘을 비축한 다음 문에 서 있는 하인이 안 보이는 쪽 담을 살펴봤다. 마침 돌담 중간에 툭 튀어나온 돌이 있어 딛고 넘기 딱 좋게 보였다.
어차피 섣달그믐 밤인 오늘 밤은 모두 바쁘다. 나를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나는 치맛자락을 올리고 발을 돌에 올려보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담을 넘으려 하는데 불안하고 두근거리는커녕 모험심에 피가 끓어올랐다. 이게 담을 넘는 행위 때문인지 목선후를 만나러 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무거운 엉덩이를 가뿐하게 들며 담 위를 두 손으로 잡으려 했지만.
나는 안안용이 무척추동물임을 잊어버렸다. 엉덩이가 들리기는커녕 버티고 서 있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결국 돌담에 몸을 기대며 땅으로 내려왔다. 올린 다리를 다시 내리기도 힘들었다.
조롱박 운동으로 팔 힘은 좀 세졌는데 다리는 여전히 약하구나. 현대에서 내가 잠시나마 파쿠르 동호회 회원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숨을 헐떡이며 돌벽에 두 손을 짚고 사다리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궁리해봤다.
그 순간 귓가에 아주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너무나 듣기 좋은 이 목소리는.
“어디 가려고?”
몸을 돌리자 목선후가 서 있었다. 희미한 별빛 아래 유백색 심의를 입고 검고 긴 머리를 편하게 묶어서 더 수려하게 보이는 내 남편. 잃어버린 엄마를 찾은 아이처럼 내 영혼이 소리 없는 환호를 질렀다.
“어떻게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