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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55화 (55/92)
  • 55화. 이혼하면 된다

    너무 놀라 눈을 깜박이며 다시 봤다. 여전히 4등급이다. 지난번에는 분명 1등급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한인수의 팔을 붙잡았다.

    “인수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누구냐, 너는.

    “무슨 말이야?”

    우리는 정 공자와 안문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나는 한인수의 등급이 변했기 때문에 완전히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처음이다.

    “사소한 일이라도 좋아.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없었어. 너, 괜찮아? 얼굴이 파래.”

    “아! 없었구나.”

    실망한 나는 가까스로 몸을 돌려서 대청마루를 내려왔다. 나를 배웅하기 위해서 정 공자도 마루를 내려왔는데 한인수는 너무 놀랐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그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4등급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등급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죽을 각오로 노력하면 한두 등급 오를까. 오르기도 어렵지만 낮아지는 것도 어렵다. 선천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비록 밝기가 변하고 고유의 색이 생기기도 하지만 등급 자체가 변하는 일은 드물다.

    쉽게 변하는 거였으면 동생들의 상태를 보고 내가 그렇게 절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인수는 1등급에서 4등급으로 변했다. 사람이…… 바뀌지 않고서야.

    그럼, 바뀐 것인가? 완전히 한인수가 된 것인가?

    “누이, 가자.”

    안문이 내 손을 잡고 흔들 때까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혼란스러운 얼굴로 학당의 중문을 나서자 달려오던 정오와 말순과 마주쳤다.

    “아씨, 여기 계셨네요. 내내 찾아다녔어요.”

    “나는 안문이를 찾으러 온 거야.”

    안문아, 미안하다. 사실 네가 여기 있다는 것도 몰랐단다. 우리가 사랑채로 가자 시댁 식구들이 떠날 준비를 했다.

    시끄럽고 다정하고 예의를 차리는 작별인사를 마치고 시댁 식구들이 떠난 후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안채로 이끌었다. 부드러운 내 손을 강하게 움켜쥔 어머니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시어머니와 다정하게 얘기하던 오 여사님이 아니다. 얼굴이 도자기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사소한 자극으로도 파삭 깨져 버릴 듯하다.

    방으로 들어간 어머니는 정오와 말순까지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문을 꼭 닫았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앉았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목소리를 극도로 죽였다. 낯선 오 여사님의 행동에 불안해졌다.

    “안용아, 너 말이다.”

    “네, 어머니?”

    어머니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너, 말이야. 목 서방이 그, 그, 숨겨진 왕자님인 거 알고 있었니?”

    역시나. 어머니도 드디어 알게 되셨구나.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맞는가 보구나. 아이고. 이를 어쩌니.”

    차마 크게 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오 여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한 손을 들어 내 뺨을 부드럽게 쓸고 내 머리도 쓰다듬었다. 마치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애틋하게.

    그러더니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눈에 습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내가 소맷자락으로 어머니의 눈을 살며시 닦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비단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폭삭 가리고는 어깨를 떨며 소리를 죽이고 흐느꼈다.

    오 여사님처럼 활달하고 거침없는 사람이 숨죽여 우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도 무너져 내렸다. 나는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오 여사님이 울음 섞인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내, 내가, 흑흑, 끝까지 말려야 했는데, 흑흑. 세자 저하를 목 서방인 줄 알았다고, 흑흑, 상인들이 그러기에 알아챘다. 오죽했으면 왕실에서 숨겨서 키웠겠니? 남의 성을 주면서 말이다. 흑흑.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아무래도 등급외를 일 등급 위로 올려 놔야 되는 거 아닌가 싶다. 방금 시댁과의 연회에서 들은 몇 마디 얘기를 가지고 추론한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결론을 바로 내렸을까? 오 여사님, 진정한 천재세요.

    “어머니, 이제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오 여사님 귀에 대고 다정하게 위로했다.

    어머니, 우리 뒤는 돌아보지 말고 앞을 보고 나가요. 하면 된다! 세 번 외치자고요. 되돌리기에는 늦었어요.

    갑자기 오 여사님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없긴 왜 없니? 이혼하면 된다!”

    ***

    김원장과 닥터 조는 아들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여 기도했다. 제발 누구든지 우리를 좀 도와주세요. 신이 있다면 제발.

    두 사람이 손을 놓자 코마 상태의 아들은 이동 침대차에 누운 채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추락 사고의 후유증으로 뇌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는데 더 이상 수술을 미룰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서 오늘 뇌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코마 상태이므로 수술 중 죽을 확률이 반반이었다.

    “넌 수술에 참관하지 않겠다면서 여기서 기다리려고? 제수씨, 제 방으로 가시죠.”

    수술실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흰 가운을 입은 친구가 다가왔다. 김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문 하나만 지나면 수술을 받는 인수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김 원장은 자신을 벌주듯이 길고 썰렁한 통로에 서 있는 것을 택했다.

    이 통로도 일반 환자의 보호자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만 동문이 많이 근무하는 대학병원이라 가능했다.

    원하면 얼마든지 수술에 참관해도 된다고 했지만 부부는 고개를 저었다.

    “제수씨, 여기는 앉을 데도 없는데 제 방에 가시죠.”

    남편의 친구가 닥터 조에게 다시 권했지만 닥터 조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인수 대신 내가 저기 누워 있다면 좋았을걸. 흰 벽을 두 손으로 짚으며 닥터 조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하도 많이 울어서 눈물이 마른 줄 알았는데. 어디서 이 많은 눈물이 나오는 것일까.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려서 차가운 병원 바닥 위에 동그란 물 자국을 만들었다.

    ***

    내게 이혼하면 돼! 라고 선언한 어머니는 불도저 같은 행동력으로 안용이가 매우 아파서 안채에서 재워야겠다고 목선후에게 알린 후 아버지도 안채로 오지 말라고 전하게 했다. 안용이가 푹 자야 한다면서.

    남동생들은 막내만 빼고 이미 사랑채에 따로 방을 가지고 있어서 원래 안채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머무는 장소였다. 이 시대 남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아버지는 낮에는 사랑채에서 일을 하다가 밤에는 안채로 들어와 잠을 잤다.

    출장도 많이 가고 밤새워 재고 정리를 할 때도 있어서 안채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은 꼭 미리 하인을 보내서 어머니 보고 기다리지 말라고 전했다. 소문난 잉꼬부부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딸을 위험에 빠트린 아버지에게도 화가 나서 안채 출입을 금했으니 집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남극처럼 얼어붙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동생들과 가솔들은 이유도 모른 채 떨면서 발끝으로 살금살금 집 안을 걸어 다녔다.

    “어머니 이렇게 해결할 수는 없어요. 모두의 의견을 모아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죠.”

    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설득했다. 어머니까지 이러면 정말 대책이 없다.

    “무슨 해결책? 남자들 하는 생각이야 뻔하다. 너의 안위 따위 관심도 없는 게다. 네 인생과 네 행복을 눈곱만큼이라도 생각했다면 네 아버지가 이럴 수는 없다.

    지난번 내기도 넘어가 줬다. 계약서가 있으니 어떡하겠니? 게다가 상대방은 그 무시무시한 무림인이라며? 빠져나갈 방법이 없으니 그건 그렇다 치자. 이건 안 되는 거 아니니? 이 도성에서 너 하나를 시집보낼 데가 없어서 그런 데로 보냈단 말이냐.”

    “어머니, 목 서방도 그다지 나쁜 자리는 아니…….”

    “헛소리! 네가 아무것도 모르니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다. 막말로 목 서방이 왕자가 되어 네가 왕자비가 된다고 하자. 왕자궁에 후궁이 몇이나 될 것 같으냐? 응? 열이면 적은 편이야, 이것아. 오품 관리도 첩이 다섯이다. 네 아버지나 되니까 첩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요. 없는 사람도 있잖아요.”

    “네 아버지는 평민이다. 물려줄 작위도 없고 품계도 없어. 그저 돈 모아서 미련한 자식들 앞길을 닦아 주려는 거야.

    나는 모르겠니? 네 동생들이 향시에 합격하는 게 꿈이라는 걸? 나는 몰라서 네가 학당을 세우고 선생을 데려오는 걸 보기만 했겠니? 나도 다 안다.

    내 속으로 낳은 내 자식들을 모를까? 이런데 네 아버지가 첩이라도 들여서 자식들이 늘어나면 네 동생들이 설 자리가 있겠니? 첩의 자식이 과거라도 합격해서 관리가 되면 어떨 거 같니? 돈보다 권력인 거 너도 알지? 이 집안의 모든 재산을 첩의 자식이 가져갈 수도 있단 말이다. 네 동생들은 알거지가 되고.”

    어머니의 말은 설득력이 끝내줬다. 현대에서 온 나도 어머니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재벌가 왕자의 난이 안씨 집안에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관직 근처에도 못 가는 내 다섯 동생들은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뜻이고. 빌어먹을.

    내가 이렇게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있지도 않은 아버지의 첩이 막 미워졌다.

    “그것뿐이니? 목 서방이 사주팔자대로 역모죄에 걸리면 잘하면 삼족이요 못하면 구족을 멸한다. 이게 농담 같니? 네 아버지 혼자 죽는 게 아니란 말이다. 네 동생들은 어쩌라고. 평생 손수건 한 장도 빨아 본 적 없는 네가 노비가 된단 말이다. 그 꼴 나는 못 본다. 나를 죽이기 전에는 안 된다.”

    어머니가 목이 메이는지 숨을 헐떡였다. 나도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한인수를 쫓아낼 때부터 이상하더라. 한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호형호제하면서 친동기 간처럼 지냈다. 한씨 상단이 망해서 상거지가 됐어도 쫓아낼 사람이 아닌데. 내가, 내가 속았다.”

    뒤돌아보니 씹을수록 씹을 거리가 나오는지 어머니는 반은 흥분했다가 반은 절망했다가 간혹 목이 메이기도 하면서 푸념을 계속했다.

    “다행히 네가 임신을 안 했으니 됐다. 이 나라는 이혼하면 인연이 깨끗이 끊어진다. 사람이야 아깝지만 미련 가질 거 없다. 혼수로 들어간 돈이 억만금이지만 그것도 깨끗이 포기하자. 그냥 이혼장만 써 달라고 해.”

    내가 고개를 저었다.

    오 여사님이 나를 노려보았다.

    “어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상황을 좀 기다려 보세요, 네? 어머니 말씀 정말 완전히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를 믿어요. 시아버지도 믿고요. 저기 궁에 계시는 시아버지도요. 그러니 어머니, 차분히 기다려보자고요.”

    “궁에 계신 시아버지라니!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으면 안 된다. 왜 이리 겁이 없니?”

    어머니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한탄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안용아, 이 어미도 너를 이해한다. 저런 잘난 신랑을 버리자니 아깝겠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 눈에도 아까운데 너는 오죽하겠니.”

    어, 오 여사님.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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