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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54화 (54/92)
  • 54화. 화해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내쉰 목선후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앗! 뭐 하려고. 비록 가지를 쫙 편 측백나무 아래이긴 하나 저만큼에 내시복을 입은 팽문이 서 있고 어딘가에는 호위무사가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입술을 피해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불편한 자세에서 하는 키스는 좋았지만 타인의 눈앞에서의 키스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기대듯이 내 어깨를 끌어안은 목선후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설을 왕궁에서 맞이하기 위해서 닷새 후 환궁하겠다는 대비마마의 전교가 내려졌다.

    ***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거의 한 달 만에 가족을 보니 너무 좋았다.

    안신이는 열여섯 살이 돼가니 제법 의젓해졌다. 천자문만 떼면 아버지에게서 장사를 배운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가 돌아올 때엔 천자문을 다 외우고 있었다.

    아직은 등급외지만 어쨌든 안씨 학당에 졸업생이 생겼다.

    그리고 안씨 상가의 방화범을 잡았으며 그 일에는 민아의 공이 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민아는 이미 우리 집 사람이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나는 나중에 민아가 싫다고 하면 동생 중 한 명과 억지로 혼인시킬 생각은 없다.

    우리가 도착한 날 저녁에 맞추어 안부자는 시댁 식구들을 초대했다.

    예법상 우리가 시댁으로 가야 하는데 친정으로 왔기 때문인지 어머니는 내가 본 중에서 가장 귀하고 맛있는 요리를 준비했다.

    장양란은 임신했는지 남편의 팔을 잡고 아주 조심스럽게 뜰을 가로질러 들어왔다. 새 처소를 마련하더니 효과가 있나 보네. 역시 스트레스는 임신에 제일 큰 적이다.

    “어서 오세요, 형님.”

    “동서, 그동안 도련님을 간병하느라 고생했어.”

    일반 의원집에서 먹고 자면서 남편을 간병했다면 진짜 힘들었을 것이다. 장양란은 부잣집 딸인 내가 뼈 빠지게 고생했다고 믿고는 나에 대한 불만을 깨끗이 던져 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새로 마련한 처소와 새 가구가 너무 마음에 들어 그것을 마련해 준 나를 봐주기로 했든지. 그도 아니면 아이를 가졌으니 좋은 생각만 하기로 결심했든지.

    여하튼 동서 시집살이를 벗어나 다행이었다.

    목선후와 내가 시부모님께 절을 한 다음 뒤로 물러나자 장양란이 다가왔다.

    “정말 서방님 다리가 완치되지 않은 것인가?”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눈썹을 팔자로 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씨네 사위는 다리가 ‘다’ 낫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나는 아직 정확한 상황을 모르므로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형님, 임신하신 거 축하드려요.”

    “어머, 어떻게 알았어?”

    얼굴이 달아오른 장양란이 깜짝 놀라며 내 손을 쥐었다. 그거야 에스트로겐의 증가로 풍만한 몸집과 부드러운 핑크빛 피부, 무엇보다 엄청난 보물을 간직한 듯한 표정 때문이지.

    “조심히 걸어오시는 거 보고요.”

    “아유, 우리 집안 첫 아이라고 아버님과 어머님도 관심이 지나치셔. 부담이 돼 죽겠다니까.”

    부담이 되는 이유는 아들이 아니라 딸일까 봐서다. 충분히 장양란을 이해한다. 현대에서도 얼마 전까지 남아선호사상이 심했다는데 고대인 여기서는 오죽하겠나. 심지어 나도 여기서 아이를 낳는다면 남자아이를 낳고 싶다.

    이 시대에 여자로 사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자는 과거도 못 본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셔야죠. 얼른 조카를 보고 싶네요.”

    “고마워, 동서.”

    꽤 친밀한 동서지간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회장에서 나란히 앉았다.

    아버지와 어사중승과 목이후와 목선후, 그리고 안안신 이 다섯 사람은 분리된 방에서 따로 식사를 했다. 어머니 역시 시어머니와 두 사람만 따로 상을 차렸는데 예전과 달리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나와 목선후가 북행궁에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졌을까 의아했다.

    사람은 자신이 잘하는 분야를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요리를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고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외국어를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해하기 어려우니 상대방을 무시하고 우월감을 가진다.

    지금까지 시댁은 가난하다고 친정은 무식하다고 서로의 결점만 비난해왔다. 그 사이에서 목선후와 나는 샌드위치가 되어 납작 눌렸고.

    이제 두 어머니는 상대방의 장점을 보기 시작한 듯하다. 원래 시어머니는 삼첩반상을 고집하고, 지나치게 고급인 음식은 낭비라고 주장했는데 지금은 쉴 새 없이 고급요리에 젓가락을 움직인다.

    그런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오 여사의 눈빛도 부드럽다. 가끔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입을 가리고 조신하게 웃는다.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시어머니의 눈빛에도 상대방을 무시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천지가 개벽했나? 어찌 된 일이지? 목선후의 부상이 계기가 된 것일까? 원인이 무엇이든 내 입장에서는 무척 만족스럽다.

    “동서, 들었지? 중문에 있는 가게에 불이 난 거 말일세.”

    입덧도 없이 식욕만 아름답게 커진 장양란이 고기를 뜯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네. 방화범도 잡혔다면서요. 공자님 다리를 저렇게 만든 사람이니 제대로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날 세자 저하께서 포목점에 납셨다는 얘기도 들었는가?”

    “네?”

    도착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사랑채로 와서 아직 자세한 이야기를 못 들었다.

    “방화범을 그렇게 빨리 잡은 게 세자 저하 덕분이래. 그런데 중문 상가 사람들은 전부 세자저하께서 도련님인 줄 알았다지 뭔가.”

    “왜요?”

    “닮아서라네.”

    “뭐가요?”

    “세자 저하와 도련님이 많이 닮았더래.”

    “……!”

    “상가 사람들이 착각할 정도로 세자 저하가 도련님과 닮았다니 참 신기하지. 나야 평생 세자 저하를 뵐 일이 없으니 확인하지 못하겠지만 생각할수록 신기하지 뭔가.”

    맙소사!

    등줄기로 찬물을 부은 듯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한겨울 얼음이 깨져서 차가운 물속으로 빠지는 느낌이다. 숨도 쉴 수 없고,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추는 것 같았다.

    목선후와 세자가 이복형제이니 닮을 수는 있겠지만 착각할 정도로 닮았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버지나 어사중승이나 목선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겠구나. 목선후와 안안용의 정략혼도 두 사람이 결정했으니까 당연히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비마마도 우리 앞에서는 세자의 ‘세’ 자도 입에 담지 않았다.

    나는 잃었다가 다시 찾은 손자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세자를 언급하다 보면 둘이 닮았다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왕실과 관련 없이 살고 싶어 하는 목선후에게 미안한 일이니까. 목선후도 당연히 대비마마의 마음을 알아서 침묵했고.

    허망하다. 나만 까마득히 몰랐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목선후!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숨길 수가 있어.

    아니, 왜 하필 그렇게 많이 닮은 거야. 너무 놀라고 속상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제 우리끼리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 혼자의 생각이었다.

    “동서?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인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님.”

    “그리고 고맙다는 말씀을 어머니께 전해 주게. 자네 없을 때 안사돈께서 아기요람을 보내셨다네. 그렇게 예쁜 요람은 처음 봤어. 내가 정말로 감사드린다고 꼭 말해 주게. 직접 말씀드리고 싶은데 가만히 보니 어머니와 말씀하시느라고 내 차례가 올지 모르겠네.”

    장양란은 따로 상을 받은 두 어머니들이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 것을 보고 미소 지었다.

    “네, 그럴게요. 설에 가면 저도 보고 싶어요.”

    “당연히 보여 주지.”

    이렇게 말하며 장양란은 방금 하인이 내온 새 요리에 서슴없이 젓가락을 꽂았다. 시어머니처럼 장양란도 삼첩반상을 포기한 모양이다.

    나는 새로 내온 따뜻한 음식을 계속 장양란 앞으로 놓아주었지만 여전히 생각은 세자와 꼭 닮은 목선후의 얼굴에서 떠나지 못했다.

    ***

    달도 없이 어두운 저녁인데 안씨 저택 곳곳에는 환한 등롱이 걸려서 그리 심하게 어둡지 않았다. 그래도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초롱을 하나 들고 학당 뒤편의 전각으로 향했다.

    전각의 대청마루에는 두 선생이 커다란 요리상을 앞에 두고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셋째인 안문이가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섰다.

    “어, 누이!”

    뒤이어 두 남자도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나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동생들을 가르치시느라 고생하셨죠.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두 사람도 내게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애들이 잘 따라 했는지, 혹시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는지 여쭤보려고 왔어요.”

    나는 은근슬쩍 안문이 옆에 앉았다. 그래서 왼편에는 안문이가, 오른편에는 한인수가 앉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아씨.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정 공자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사랑채에서 동생들과 아이컨택을 하면서 등급외를 확인했다.

    안문이 역시 여전히 등급외. 하지만 중문 상가 스무 개는 절대 포기할 수 없으니 목표가 불가능해 보여도 멈출 수는 없다.

    나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입니다. 이제 시작이니까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을 아씨가 하시는군요.”

    나만큼 선생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걸.

    학원을 운영할 때 학부형들은 잘하면 학생 탓 못하면 선생 탓을 했다. 축구팀은 잘하면 감독 탓, 못해도 감독 탓이던데 이상하게 학원은 달랐다.

    내가 학부형이 되면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결혼도 하기 전에 죽어 버렸다.

    “한 공자님은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나는 그가 지난번처럼 특이한 경험을 했는지 궁금했다. 사실 동생들의 학업보다는 그것이 더 궁금했다.

    “네, 건강했습니다.”

    “정 공자님께도 부탁드렸지만 지난번 같은 일이 일어나면 꼭 제게도 알려 주시기 바라요. 물론 의원도 부르고요.”

    내가 한인수의 건강을 걱정한다고 오해한 두 남자가 어색한 표정으로 음식을 집었다.

    “안문이는 여기서 뭐 하니? 너 없으면 선생님들이 심심하실까 봐 온 거야?”

    “아니.”

    안문이가 푹 고개를 숙였다. 감이 왔다.

    “민아 때문이니? 민아가 왔을까 봐?”

    풋! 내 말에 정 공자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정 공자를 노려보았다. 사춘기에 들어가려는 아이에게 그렇게 창피를 주면 평생 가는 트라우마가 생긴다고.

    중2병에 걸리면 책임질 거야?

    “민아는 당연히 안 왔어. 매형네 식구만 온 거야. 그러니 가서 인사를 하자. 내 동생들 중에서 제일 잘생긴 안문이가 없다고 매형이 찾는단 말이야.”

    “정말이야?”

    동생들 중에서 제일 잘생긴 거? 아니면 사람들이 너를 찾는 거?

    미안, 둘 다 아니야.

    “그럼, 정말이지.”

    “알았어.”

    안문이가 일어서자 나도 따라 일어섰다. 내가 대청마루를 내려가려고 몸을 돌릴 때 배웅하려고 일어서던 한인수와 스쳤다.

    우리의 시선이 처마에 걸린 등롱 불빛 아래서 얽혔다.

    팟! 등급이 떠올랐다.

    4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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