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대역죄는 피해야지
게다가 모두 안씨네 사위가 첩을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오히려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계획대로 찻집에서 불을 질렀다.
아무리 담이 커도 이 사람이 세자인 줄 알았더라면 방화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여인은 시야가 아득해지고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 자리에서 쓰러져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세자가 근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이 나라의 세자다. 사실대로만 말하라.”
세자 저하시구나. 진짜 세자 저하셔. 세자 저하가 가까이 계신데 내가 불을 질렀어.
그 순간 세자를 시해하려 했다는 대역죄는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따라 불을 지른 딸부터 집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살려야한다. 형부의 탐욕과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가족을 죽게 만들 수는 없다.
“아이고, 소,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형, 형부가 시켰습니다. 그냥 조그만 불을 내면 된다고 했습니다. 정말 세자 저하신 줄 몰랐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계시는데 소인이 어떻게 그런 무서운 짓을 했겠습니까? 안부자를 겁주려고 그랬습니다. 상등을 걸어서 손님을 다 빼간다고 형부가, 형부가 그랬습니다.
찻집에 불만 조금 내라고요. 여, 여기 계신 분은 세자 저하가 아니라 목 공자라고 했습니다. 이 집 사위 목 공자라고요. 세자 저하신 줄 절대로 몰랐습니다. 정말이옵니다. 살려주시옵소서. 흑흑흑.”
한바탕 쏟아낸 여인이 큰 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임 승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염치도 없이 여기가 어디라고 큰 소리로 우는 거야? 정말 파렴치한 여인이야. 임 승휘의 표정을 본 세자가 손을 흔들었다.
범인이 밝혀졌고 잡혔으니 더 이상 신문할 필요가 없었다. 세자의 뜻을 간파한 장진한이 칼을 찬 수하들을 시켜 여인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서기가 알아서 형부로 넘길 것이었다.
“살려주십시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세요.”
끌려나가던 여인이 크게 울부짖는 바람에 밖에 있던 상인들이 상황을 알게 되었다. 화재는 상등 때문이 아니라 방화라는 사실과 더불어 방화범이 잡혔다는 사실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곧이어 칼을 찬 하급 관리들이 연씨 포목점의 점주를 형부로 끌어갔고 그 모습을 중문 상가의 모든 상인들이 지켜보았다.
상인들은 방화범이 연씨 포목점의 점주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다른 상인들도 안씨 상가의 호황에 배가 아팠지만 불을 지를 생각까지는 못했다. 불이 잘못 번지면 자신들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안부자가 미웠으면 그랬을까, 이해는 하면서도 상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 연씨를 용납할 수는 없었다.
각자의 가게로 들어간 상인들은 결국 상등이 안전함을 인정하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안씨 상가의 상등을 철거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더 늦지 않게 자신들의 가게에도 상등을 달아야 손해를 줄일 수 있음도 수긍했다.
그런데 상등을 어떻게 만들지? 안씨 철방으로 바로 가서 주문할 수도 없고, 다른 철방에 주문하려면 만드는 방법을 알려 줘야 하고.
가장 빠른 방법은 안부자에게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비싼 값에라도 상등을 구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안부자가 자신과 경쟁하고 있는 가게들을 위하여 상등을 만들어 줄까?
나 같으면 절대 안 만들어줄 거야. 이런 결론을 내린 점주들은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어금니만 깨물었다.
그래도 사위 문제는 아직 남아 있지. 상인들은 아직 안부자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마음이 놓였다. 안 그랬으면 배가 아파서 오늘 밤 제대로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안씨 포목점 밖의 사람들은 포목점 안에 있는 사람이 세자 저하임을 몰랐다. 그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고 그 닮은 사람이 이 나라의 세자라는 사실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
장진한은 범인을 형부로 보낸 뒤로도 안씨 포목점에 남았다. 자신은 여기서 세자 저하의 칭찬을 받고 세자 저하를 모시고 왕궁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잔뜩 꿈에 부푼 장진한은 방화범 여인이 목 공자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 했음을 생각지 못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세자가 불쑥 물었다.
“목 공자가 누구냐?”
세자의 질문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장진한은 자신이 목선후의 주변과 과거를 캐고 있다는 것을 눈앞에 서 있는 안부자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목선후는 그의 사위인 데다 자신은 아직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안부자가 알면 조사도 어려워지고 안부자와 원수를 맺게 된다. 안부자 같은 부자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욕할 수는 있어도 원수를 맺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 적어도 아직은 아니다.
장진한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안부자가 앞으로 나서서 허리를 굽혔다.
“세자 저하, 목 공자란 어사중승의 둘째 아들인 목선후로 소인의 사위이옵니다.”
“그런가? 그런데 왜 나를 보고 목 공자인 줄 알았다고 하는 것이냐?”
정신을 차린 장진한이 미소를 띠고 가볍게 말했다.
“조금 닮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감히 그런 불경한 생각을 입에 담다니 그 여인이 제정신이 아니옵니다. 저하,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래도 나를 닮았다니 궁금하군. 사위가 어디 있느냐? 데려와 보거라.”
세자의 명령에 안부자가 또 허리를 굽혔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의 사위는 지난 화재 때 크게 다쳐서 치료 중이옵니다. 그래서…….”
장진한이 안부자의 말을 끊었다.
“세자 저하께서 데려오라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 끌고라도 데려오게.”
“송구합니다. 소인도 그러고 싶으나 사위와 딸은 아주 먼 곳에서 요양을 하고 있습니다. 용한 의원을 찾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지금 기별을 하면 수일 내로 올 것이옵니다. 당장 기별할까요?”
장진한이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도 목선후 부부가 치료차 먼 곳에 있음을 알았다. 벌써 달포 가까이 보이지 않는다고 수하가 보고해 왔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나 환성 내에는 없었다.
“세자 저하, 어찌할까요?”
장진한이 묻자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임 승휘가 세자에게 속삭였다.
“저하, 화재로 다친 사람을 굳이 보시렵니까? 다 나으면 부르시지요. 소첩은 어서 환궁해야 하옵니다.”
수줍은 듯 작은 목소리였으나 워낙 조용한 분위기라 모두 알아들었다. 후궁의 말을 들은 세자가 쉽게 기억해 내었다.
“아, 그랬지. 한 시진이었는데 많이 늦어졌구나. 괜찮다. 중문 상가의 방화범을 잡았으니 어마마마께서도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세자가 일어서자 호위대가 세자와 임 승휘를 에워싸고 밖으로 나갔다. 안부자와 점주는 가게 앞에서 세자 일행을 배웅했다. 세자의 마차 옆으로 장진한이 말을 타고 따라갔다.
손님들이 떠난 뒤 포목점의 문은 다시 활짝 열렸다.
안부자는 천천히 걸어서 불이 난 가게로 향했다. 가게에 불이 나서 손해를 본 것이나, 방화범을 붙잡은 것은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 문제들은 해결할 방법이 뚜렷했고 해결할 능력도 충분했다.
문제는 목선후.
안부자는 오늘 세자를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보았고 세자와 목선후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확인하고 전율했다.
목선후가 숨겨진 왕자라는 것은 알지만 이토록 이복동생과 닮은 줄은 정말 몰랐다. 또한 장진한의 표정도 읽었다. 장진한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은밀하고도 비열한 웃음을 눈 속에 감추고 있었다.
사람의 속마음을 팔 할은 읽는다고 알려진 안부자다. 그는 자신의 짐작이 이번만큼은 틀리기를 바랐지만 틀리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찻집은 잔불 검사가 끝나서 점주를 비롯한 점원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지난번처럼 뒤늦게 서까래와 지붕이 무너질 것을 대비해서 오늘 하루는 접근을 금하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과자점과 미곡전은 점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을음을 닦아냈는지 벌써 검댕이 희미해졌다.
안부자가 가자 점주들이 나와서 범인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상등으로부터 시작된 이 터무니없는 방화 사건은 의외로 쉽게 해결이 되었지만 그 뒤에는 목선후나 민아 같은 공로자가 있었음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
며칠 후 목선후와 나는 천천히 북행궁의 후원을 걸었다. 크고 따뜻한 손이 내 손을 폭 감쌌다. 모래처럼 자잘한 눈송이들이 고즈넉한 겨울 정원에 소담스럽게 내렸다. 기온은 낮았지만 바람이 없어서 춥지 않았다.
이제 목선후는 목발이나 사람의 부축이 필요 없다. 너무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서 이대로 가면 곧 달릴 수도 있다고 어의가 말했다.
처음에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대비마마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어떤 경우에도 체통을 잃지 않을 것 같은 대비마마가 무릎을 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그래도 너무 조급하게 빨리 움직이면 다시 악화될 수 있대요.”
“어의가 그랬소?”
“어, 네.”
어의가 아니라 정형외과 의사가 그랬지. 살면서 친구나 자신이 발목을 삐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내 주변에는 특히 많았는데 학생들이 자주 다쳐서 왔기 때문이다.
일주일간의 짧은 겨울방학이 끝나면 스키장 때문에 열 명 중 한 명은 꼭 기브스를 하고 학원에 왔다. 여름에는 워터파크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기브스나 재활치료에 관해서 저절로 많은 정보가 쌓인다.
하얀 눈을 가득 이고 있는 측백나무 아래를 지날 때 목선후가 멈춰 섰다.
“안용, 왜 시녀의 방에서 따로 자는 거요? 내 방에서 자지 않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목선후의 눈동자가 주변의 흰 눈 때문에 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보인다. 수려한 이마와 곧고 높은 코를 보다가 시선이 도톰하고 모양 좋은 입술로 내려갔다.
“그게, 그러니까. 우리 집이 아니라서 불편해요.”
사실은 이런 곳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첫날밤이니까. 결혼식도 못 해 봤는데 첫날밤까지 대충 보내고 싶진 않아. 네가 내 심정을 알아? 여성의 낭만을 아냐고.
“내 방보다 시녀의 방이 더 불편하지 않소?”
“아니요. 거기에는 벽 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오지는 않으니까요. 가까이에 대비마마도 안 계시고.”
“아, 그거.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비마마를 위한 조치요. 우리하고는 상관없소.”
나는 상관있는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제 다 나았으니 집에 가면 안 될까요?”
사랑스럽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자, 안안용의 귀염을 봐줘. 그리고 할머니에게 가서 집에 가겠다고 해. 귀여운 손자 역할을 해 보란 말이야.
대비마마는 환궁을 결정하시고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이유는 손자와 헤어지기 싫어서다. 북행궁을 나가는 즉시 손자는 어사중승의 둘째 아들이자 안부자의 사위로 돌아간다.
손자 얼굴을 한 번 보려면 온갖 방법을 다 써서 비밀리에 만나야 하는데 이제 그마저 싫고 억울해한다. 왜 내가 내 손자를 마음대로 못 보냔 말이야, 라는 말이 이마에 크게 쓰여 있다.
대비마마의 환궁 행렬은 수백 명이 움직이는 거대한 행렬이므로 최소한 닷새 전에는 결정해야 하는데 오늘 아침까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여기는 너무 불편한데. 우리라도 먼저 돌아가면 안 될까요? 응? 응?”
뿌잉뿌잉, 까지는 못하지만 그런 심정으로 속눈썹을 깜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