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52화 (52/92)

52화. 민아의 재치

***

세자가 화재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안부자는 한 가지의 이득과 한 가지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안씨 상가의 불길이 빠르게 잡혔다. 상가가 미리 준비한 물과, 늘 조심하고 있던 점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거기에 세자의 호위무사들도 일조를 했다.

궁 안에서 안온하게만 살아온 세자라 불을 보고 겁이 나서 도망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대하게 자신의 무사들에게 불을 끄는 데 합류하라고 명했다.

세자는 포목점을 나와서 거리에 서서 불이 나는 모습과 안씨 상가의 점원들이 합심해서 불을 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불길과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임 승휘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세자의 뒤에 바싹 달라붙어 되도록 불길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마침 사위가 첩을 데리고 포목점에 왔다는 전갈을 받고 말을 타고 달려오던 안부자의 지휘로 우왕좌왕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불을 껐다.

불길이 번지는 길을 미리 차단시키던 궐향의 수하들은 불이 잡힐 즈음에는 잽싸게 모습을 감췄다.

불은 이각(삽십 분) 만에 잡혔다. 불이 잡히자 안부자는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했다. 지난번처럼 지붕이라도 무너질 위험이 있어서다. 찻집 점주가 검은 동굴처럼 처참한 가게 앞에 새끼줄을 쳤다.

북풍이 세게 불었는데도 상가 한 개만 탔으니 천운이었다.

오늘 안부자는 한 해에 당할 불운을 한꺼번에 몰아서 당한 거라고 사람들이 수군댔다. 상가 한 개가 사라진 것과 사위의 배신,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불운한 일인지 토론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안씨 상가의 상등을 모두 철거하라는 요구를 하자는 말도 나왔다. 이 의견은 점점 살이 붙어서 상인들은 안부자를 보는 즉시 상등 철거를 요구하고 거절하면 경시서령에게 청원서를 넣기로 합의했다.

***

한 시진 후.

“괘씸하다. 방화라니.”

포목점에 다시 들어와 안부자와 점주로부터 내막을 듣던 세자는 화를 내며 경시서령을 불러오라 명을 내렸다.

삼년상을 마치자마자 뒷돈이 제일 쏠쏠하다는 경시서령이 된 장진한은 호조 안에 있는 경시서청에 앉아 있다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세자 저하께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 기회에 실력 발휘를 해서 자신이 누이동생 덕에 요직에 등용됐지만 원래부터 실력이 빵빵한 사람임을 천하에 보여 주고 싶었다.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달려와 보니 중문 상가에는 아직도 매캐한 냄새가 흘렀다.

“저하, 소신 경시서령 장진한 대령하였습니다.”

안씨 포목점에 들어온 장진한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고개를 들고 보니 세자 옆에 꽃 같은 젊은 여인이 나란히 앉았다.

누, 누구지? 웬 여인이 세자 저하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거지?

그러다 최근에 세자 저하가 총애한다는 후궁이 생각났다. 도대체 이 여인이 여기서 무얼 하는 거야? 후궁을 데리고 궁 밖으로 나오다니 세자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장진한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려고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세자는 그가 세자빈의 오라비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경시서령, 일어나시오. 우리가 친척이지만 오늘은 공무로 불렀소. 그러니 개인적인 회포는 나중에 풀고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합시다.

“네, 저하.”

“내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불이 나는 것을 보았는데 방화라는군. 범인도 안다 하오. 중문 상가의 중요성은 경시서령이 더 잘 알 것이오. 오늘처럼 건조한 북풍이 부는데 큰 불이 나면 환성 전체가 위험하오. 다행히 준비가 잘 돼 있어 불을 끄긴 했으나 매우 위험하였소. 그러니 범인을 즉시 잡도록 하시오.”

세자는 눈앞에서 큰불을 보았기 때문에 꽤 흥분한 상태였다. 비록 호위들과 임 승휘의 안달에 불 가까이 가지도 못했지만 수백 명의 사람들이 물을 나르며 불을 끄는 모습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특히 안씨 상가의 점원들은 개미 떼처럼 질서 정연하고 부지런했다. 한겨울 북풍 중에 불이 번지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고 모두 입을 모았다.

지난번에는 안부자의 사위가 크게 다쳤지만 이번에는 지난번 일을 귀감으로 삼아 철저히 주의했기 때문에 부상자도 없다고 했다.

“저하, 범인을 안다고 하셨사옵니까?”

장진한이 세자 옆에 앉아 있는 후궁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게 안에는 세자와 후궁, 그리고 안부자와 점주, 부점주가 있었다.

그때 점주 뒤에 숨어 있던 조그만 여자아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작은 얼굴에 검댕이 묻어 더 작고 초라하게 보이는 민아를 보고 장진한이 인상을 썼다.

어디 사람이 없어 어린 계집애가 나선단 말이야?

“말씀 올리옵니다. 소녀는 이 포목점 점주의 여식이옵니다. 지난번 포목점이 불났을 때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어 주의해서 보고 있었는데 오늘 찻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잡으려고 했는데 그만 놓쳤사옵니다.”

“그자가 누구냐?”

장진한은 이 조그만 계집아이의 말 따위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세자의 눈치가 보였다. 가만히 보니 세자는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아닌가.

“연씨 포목점에 있는 두 여인이옵니다.”

아이는 어른의 질문에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증거가 있느냐? 네 두 눈으로 그 여인들이 불을 지르는 것을 보았느냐?”

장진한은 제법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아이가 버벅거리거나 아예 대답을 못 하리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아이는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증거는 없사옵니다. 직접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너는 증거도 없이 다른 포목점을 고발하고 있다. 그 가게는 너희 가게와 경쟁 상대겠지?”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전문가다웠어. 스스로 대견해서 너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세자 저하도 내 일 처리에서 허점을 발견하지 못하실 거야.

안씨 포목점 지붕 위에 앉아서 아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궐향의 수하가 소리 없이 가슴을 쳤다. 궐향과 수하는 세자의 호위 중에 무공 고수가 있어서 기척을 죽이고 들어야 했다.

수하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쓰윽 그었다.

‘그 두 여인을 소인이 잡아올까요?’라는 뜻이었는데.

‘저 돼지 같은 장진한을 죽여 버릴까요?’라고 알아들은 궐향이 쌍심지를 켜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 순간 장진한은 고민했다. 이미 소녀의 말에는 모순이 있음을 콕 집어 줬는데도 세자는 아무 말이 없다. 어쩌란 말일까? 실무에 경험이 없는 장진한이 우물쭈물하는 동안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녀가 비록 어리지만 세상에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는 줄 아옵니다. 지난번 포목점에 불이 났을 때도 그 두 여인이 있었고, 이 점은 부점주님이 확인하셨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오지 않던 여인들이 오늘 안씨 상가에 왔는데 또 그 장소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 여인들이 불을 내지 않았다면 그 여인들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자의 소행입니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그 여인들은 관련이 있사옵니다. 여인들을 찾아서 물어보심이 마땅한 일이 아닐지요?”

세자도, 임 승휘도 장진한도 입을 떡 벌렸다. 점주와 부점주만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 주변에 있는 자들은 나이가 적거나 많거나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란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이 어린 평민 여아가 그들보다 절대 못하지 않았다.

임 승휘가 눈을 빛내며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몇 살이냐?”

“열 살이옵니다.”

임 승휘는 자신이 열 살 때 어땠는지 기억해내려고 애썼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가끔 수놓기 싫어서 도망갔던 거나, 새 옷을 입고 좋아서 동경 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던 모습만 떠올랐다. 이 아이는 정말 영특하구나.

“저하, 아이의 말이 일리가 있으니 그 두 여인을 불러서 물어보시는 건 어떠하옵니까?”

세자는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방화범을 잡는다면 너무 통쾌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어마마마와 세자빈에게 해 주면 재미있어 하겠지. 무엇보다 인명 피해가 없는 것이 신기했다. 불이 나면 누군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 일도 나중에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시서령은 들으라. 아이가 말한 두 여인을 이리 데려오라. 그들이 내 앞에서 무어라 말하는지 들어 보겠다.”

사람이라면 죄를 지었다고 실토하는 대신 변명하고 부정하고 남 탓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보통의 경우에서다.

국본인 세자에게 하는 거짓말은 들키면 처벌이 사형까지도 가능한 대역죄에 해당한다. 왕권의 지엄함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러니 그 두 여인은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평민의 가게에 불을 지른 것이 죽을죄는 아니니까.

장진한은 세자와 후궁의 짝짜궁에 분노가 일었지만 낯빛을 감추고 인사를 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안부자가 세자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황공하옵니다, 저하. 저하의 은혜를 잊지 않겠사옵니다.”

“내게 약속한 것이 있지 않소? 상등 말이오. 기대하겠소.”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안부자는 세자를 힐끔 보고 자리로 돌아왔다. 사위인 목선후와는 많이 달랐지만 좋은 왕이 될 자질이 충분했다. 하지만 숨겨진 왕자와 마주치면 어떤 행동을 할까? 그때도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안부자는 불안한 내심을 감추었다.

***

경시서령과 세자의 호위들이 들이닥치자 연씨 포목점 안채에 숨어 있던 두 여인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끌려왔다.

미처 옷을 갈아입지도 못해서 도망치다 찢긴 소매와 헝클어진 머리가 그대로였다. 여인들은 입구에 서서 안을 보는 순간 두려움에 주저앉았다.

위엄 있는 젊은 세자와 좌우에 선 무시무시한 무사들. 무사들이 차고 있는 커다란 칼. 자신들을 지목했던 어린 계집아이와 자신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부점주를 보자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직감했다.

“들으라, 세자 저하 앞에서 거짓을 말하면 삼족을 멸한다. 그러니 잘 생각하고 답하라.”

장진한이 엄숙한 표정으로 겁을 준 다음 장진한을 따라온 경시서청의 서기가 붓을 들고 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저는…… 연씨 포목점의…… 점주 주대인의…… 처제이옵고…… 이 아이는 제 딸이옵니다.”

여인이 얼마나 심하게 떠는지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였다. 딸이라고 한 십대 중반의 소녀는 엎드린 채 고개도 못 들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그렇게 대담한 짓을 한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늘 연씨 찻집에 갔느냐?”

“그, 그렇습니다.”

“불을 질렀느냐?”

여인이 고개를 들어 중앙에 앉은 세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목 공자라는 사람과 닮았다.

여인이 처음 안씨 포목점에 불을 내고 돌아왔을 때 연씨 포목점 문 뒤에 숨어서 일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았다.

멀리서도 얼굴이며 풍채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은 젊은이가 불을 끄고 뒤처리를 했다. 그때 안부자의 외동딸인 그의 아내도 보았다.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이 그때의 사위라고 생각하는 건 여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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