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51화 (51/92)
  • 51화. 세자의 등장

    ***

    정오의 따뜻한 겨울 햇살이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 사복 호위무사들이 십여 명 둘러싼 화려한 마차가 안씨 포목점 앞에 섰다.

    먼저 기막히게 잘생긴 사내가 내리더니 그 뒤로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따라 내렸다. 칼을 찬 무사들과 젊은 여인 둘이 두 사람을 호위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 맞은편. 과자점 앞에서 그 모습을 보던 과자점 점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잘난 사내는 목 공자라는 안씨네 사위 아닌가? 웬 젊은 여인을 데리고 왔지? 누이인가? 학식 깊고 청렴한 목씨 가문에 딸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그나저나 기똥차게 예쁜 여자네.

    그때 안에서 나오던 단골손님이 넋 나간 점원의 얼굴을 보고 툭 팔을 쳤다.

    “왜 그래? 대낮에 귀신이라도 봤어?”

    “그건 아닌데요. 방금 안씨 포목점에 들어간 사람들이요. 아무래도 안씨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길 건가 봐요. 이미 생겼든지요.”

    사실 세자는 어두울 때 와서 임 승휘에게 상등을 제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마마마는 후궁이 저녁에 궁 밖을 나갈 수 없다면서 한 시진만 낮에 다녀오라고 허락했다.

    세자는 상등을 본 다음 날 측근 수하를 안부자 집으로 직접 보내 상등을 주문했다. 안부자는 두말없이 주문을 받고 이번이 처음이라 값은 정해지지 않았으니 나중에 말씀드리겠다며 제작 기간으로 보름을 달라고 했다. 수정을 구해서 깎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서.

    보름 후에는 볼 수 있는데 굳이 나올 필요 있냐 싶었지만 임 승휘에게 궁 밖으로 나올 수 있다고 이미 약속을 한 터라 시강원이 쉬는 날 임 승휘를 데리고 포목점에 들른 것이다.

    잠행 때와 달리 화려한 비단 도포에 황금 동곳으로 상투를 틀고 커다란 옥패를 단 세자의 모습은 한 걸음 뒤에 따라오는 임 승휘의 아름다움마저 퇴색시켰다.

    목선후보다는 더 풋풋하고 부드러운 선을 가지고 있으나 목선후가 가진 날카로움과 품위는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목선후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이 매우 닮았을 뿐 동일인이 아님을 알 만했다.

    하지만 대로 반대편에 있는 과자점 점원은 그렇게까지 자세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오해했다.

    일각도 안 되어 중문 상가 전체에 안부자의 미남 사위가 예쁘고 어린 첩을 장인의 가게에 뻔뻔하게 데리고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안부자를 시기하던 가게 주인들에게 이보다 더 통쾌한 소문은 없었다. 소문이 진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부자를 흠집 낼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는데 하필 금지옥엽 외동딸에 대해서라니.

    이보다 재미있고 신나고 후련한 소식이 어디 있나? 점주들은 자신들의 가게의 문틈 사이로 내다보거나, 가게 앞에 나와서 보거나 안씨 포목점 근처까지 가기도 했다. 어떻게든 그 두 사람을 직접 보고 싶었다. 두고두고 말할 수 있도록.

    기대감으로 포목점을 얼씬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정작 포목점 안은 평온했다.

    이미 목 공자를 매우 닮았으나 목 공자는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는 점주와 부점주는 가게 문을 임시로 닫고 문지기를 세웠다.

    칼을 찬 호위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안에 있는 손님들은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후다닥 나가버려서 가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세자 일행뿐이었다.

    “세자 저하께 인사 올립니다.”

    점주를 따라서 모든 점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알고 있었느냐?”

    “예.”

    점주가 상등문제를 안부자에게 말했을 때 마침 세자궁에서도 사람이 나와 상등을 주문하고 간 뒤였다.

    안부자는 점주에게 그가 세자였음을 귀띔했다. 세자가 다시 찾아올 수도 있었고 사위와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포목점 점주는 알아야 했다.

    점주나 부점주가 그렇게 부주의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닮은 얼굴만 보고 목선후처럼 대하면 안 된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세자는 단번에 의심을 품고 조사를 시작할 게 뻔하다.

    점주와 부점주는 세자가 목선후와 닮았음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자신들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왕실과 관련돼서 좋을 건 없으니까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다.

    “상등이 여기 있는 게 제일 크다지?”

    “그러하옵니다. 이것은 다섯 개의 촛대가 있지만 다른 가게는 세 개만 있사옵니다.”

    “어떠냐? 네 보기에는?”

    세자가 임 승휘에게 물었지만 임 승휘의 얼굴을 보자 대답이 필요 없었다. 수정에 반사된 빛으로 얼굴은 더욱 반짝이고 붉은 입술은 더 붉게 검은 눈동자는 더 깊고 신비스럽게 보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을 봐도 이런 표정은 못 지으리라.

    “이미 하나 주문했으니 동궁에서 볼 수 있느니라.”

    “소첩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정녕 몰랐사옵니다.”

    새소리처럼 아름답고 가냘픈 음성이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눈치 빠른 점주가 상등을 보기 좋은 장소에 탁자와 의자를 옮기고 세자와 임 승휘에게 권했다.

    왕족들은 아무거나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점주는 차나 간식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작은 화로를 두 개 가져와 두 사람의 발 근처에 놓았다.

    아무리 두텁게 입어도 겨울은 겨울이라 밖에 나오면 발이 시렸다.

    세자는 일국의 국본이 왔는데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 같다. 세자의 마음속에 안부자와 안씨 상인들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

    “얼굴값을 한다느니, 배은망덕이라느니, 처가살이하는 주제에 염치를 말아먹었다느니, 아주 가관도 아닙니다, 주군.”

    안씨 포목점 맞은편 지붕 위의 궐향에게 수하가 보고를 했다. 궐향은 안씨 포목점 지붕 위에 있다가 세자 호위 무사들의 무공이 높아서 들킬까 봐 장소를 옮겼다.

    안씨 포목점 옆 안씨 가구점 점원은 사명감을 안고 말을 타고 안씨 저택으로 떠났다. 안씨 어르신 사위가 첩을 데리고 왔다는 기가 막힌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궐향은 맞은편에서 그 모습까지도 보고 있었다.

    “신기해. 사람들이 이렇게 이성이 없다는 게. 어떻게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지?”

    “너무 닮았잖아요.”

    “어쨌든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못 들어야 하는데 말이야.”

    “기대 마십시오. 저 많은 시종들이 다 귀머거리도 아니고.”

    “아니, 도대체 왜 오신 거야? 주문한 거 기다리지 않고?”

    궐향의 말에 수하가 입을 삐죽거렸다.

    “여인을 모르시니 그런 말씀을 하시죠. 내 여자를 기쁘게 하고 싶다는 순정을 주군은 절대 모르실걸요.”

    “알고 싶지 않다. 덕분에 계획이 다 틀어졌어.”

    생각보다 세자와 목선후가 만나는 날이 빨리 다가왔다.

    아! 저놈의 상등! 쓸데없이 인기가 많아서는.

    궐향이 혀를 찼다.

    ***

    ‘저 사람들, 누구지?’

    안씨 포목점 문 앞에 서 있는 낯선 무사를 보고 민아가 주춤하는데 작은 손이 뒤에서 민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언니.”

    뒤돌아보니 떡을 받아갔던 아이다.

    아이에게 이끌려 조용한 골목으로 간 민아에게 아이가 발꿈치를 들더니 귀에 입을 댔다.

    얼굴도 손도 입술까지도 차가운 아이가 한 말은 민아의 머리통을 꽝 쳤다.

    “아까 두 여인이 집에서 나왔는데요. 안씨 상가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해요. 포목점은 안 들어가고 가구점과 유기점에는 들어갔다 나왔고요. 지금은 찻집에 들어갔어요. 한 여자는 살구색 옷을 입었고 한 여자는 여우털 목도리를 두르고 있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안씨 상가 중에는 다루는 없지만 차 도매상은 있다. 일상적으로 마시는 차보다는 손님 접대용이나 귀족들이 마시는 고급차를 주로 다룬다. 매장에는 말린 찻잎이 보관된 커다란 방이 바로 옆에 붙어 있다.

    매장에서 차를 고르면 바로 옆방에서 주문받은 양만큼 가져온다. 더 많은 재고는 따로 창고가 있지만 지금 가게 안에 있는 찻잎만으로도 값이 어마어마하다.

    그보다 불이 나면? 찻잎은 불쏘시개로 쓰는 마른 나뭇잎과 똑같다. 가구점이나 유기점보다 더 잘 옮겨붙을 것이다.

    민아는 어깨에 메고 있던 책보따리를 하녀에게 떠안기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고기를 줘야 한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었다. 그저 늦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달리는 민아의 뒤를 하녀와 아이가 따라 달렸다. 민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포목점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지나쳐 유기점과 과자점을 지나쳐서 드디어 찻집 앞에 도달했을 때는 거의 숨이 넘어갔다. 헉헉, 가쁜 숨을 몰라쉬고 가게 안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겼지만.

    한발 늦었다.

    가게 안에서 흰 연기가 뭉클뭉클 새어 나왔다.

    불이야!

    그 순간 문이 쾅 열리고 사람들이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민아의 작은 몸은 간신히 옆으로 비켜서 압사를 면했다. 화재 초기라 사람들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지만 기겁한 표정으로 앞다투어 찻집을 벗어났다.

    민아는 흰 연기를 헤치고 튀어나오는 사람들 중에서 아이가 묘사했던 옷차림을 찾았다. 그 여인들은 의심을 피하려는 듯 사람들의 중간에 섞여 나왔다.

    민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여인들을 향하여 달려가며 소리쳤다.

    “이 사람들이 불을 냈어요! 이 사람들이에요!”

    이미 한 번 불이 나서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안씨 상가의 점원들이 민아의 외침을 듣고 여인들에게 달려들었다. 진짜 범인이든 아니든 일단 잡아 둬야 했다.

    여인들은 우악스러운 사내들의 손을 피해 죽기 살기로 도망갔다. 옷이 찢어지고 머리가 헝클어졌지만 결국 여인들은 점원들의 손을 벗어나 달아나 버렸다.

    상황이 조금만 여유로웠어도 여인들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이 너무 빨리 번졌다. 찻잎은 불쏘시개가 되어 활활 타올랐고 때마침 부는 북풍에 실려서 옆 가게로 불티가 날렸다. 범인보다 불을 끄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한 점원들은 여인들을 뒤쫓지 않았다.

    민아 역시 빨갛게 날름거리는 불길을 보자 옆 가게로 달려가며 물동이를 찾았다. 수많은 안씨 상가 점원들이 달려들어 물동이에서 물을 떠서 퍼 날랐다.

    찻집의 양쪽에는 과자점과 미곡전(쌀과 곡식을 파는 가게)이 있었으나 궐향과 수하들이 날아온 불티가 번지지 않도록 막았다. 무공 고수인 그들이 없었더라면 과자점과 미곡전까지 불탔을 것이다. 그만큼 북풍이 세게 불었다.

    가게 하나가 타는 것과 세 개가 타는 것은 불의 규모가 완전히 다르다. 건물이 연이어 붙어 있는 중문 상가의 경우 대형 화재로 번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중문은 성벽에 붙은 성문이 아니다. 수백 년 전 환성이 작은 도성이었을 때 만들어진 성문으로 환성이 커지면서 성벽은 허물어지고 문만 남았다. 이 문을 중심으로 고급상가와 주택이 형성되었다.

    스무 개의 안씨 상가의 점원들이 합심해서 불을 끈 결과 찻집은 전소되었으나 과자점과 미곡전은 벽만 까맣게 그을리고 불이 잡혔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중문 상가의 모든 상인들이 안부자를 시기했지만 그렇다고 불이 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잘못돼서 불이 자신의 가게에 번지면 끔찍한 피해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중문 상가의 상인들은 아직 포목점의 화재의 원인을 상등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찻집에 달린 상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중문 상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린 안부자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상인들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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