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왕의 뜻
그런 내 표정을 힐끔 보더니 목선후가 얄밉게 덧붙였다.
“그 그림이 거기에 끼워져 있었군. 찾아도 없더니.”
어디에 끼워놓았는지를 잊어버렸구나. 목적어를 분명히 해야지. 기억 못 한 게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인 줄 알았잖아.
“그 여인은 내가 좋아하는 여자요. 얼굴은 혼례식에서 처음 봤지.”
“첫인상이 어땠어요?”
목선후가 말하기를 주저했다. 별로였구나. 뭐, 그때는 내가 아니었으니까 괜찮아.
“흠, 흠. 그건 말하기 어렵겠소.”
“알았어요.”
“뭘?”
“말하기 어렵다면서요? 첫인상이 안 좋았다는 뜻이지, 뭐.”
“쯧쯧, 속단하기는.”
목선후가 고개를 숙이더니 내 뺨에 입을 맞추고 내 귓불에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속삭였다.
“어서 빨리 밤이 됐으면 했지.”
화르륵 열이 올랐다. 동시에 내가 아닌 안안용에게 느낀 그의 감정에 질투심이 일어났다. 인간은 모순덩어리가 맞다. 그리고 방금 그가 나를 놀린 것에 유치한 복수가 하고 싶어졌다.
“나한테 물과 소금만 줘 놓고?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알아요?”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곤란한 일이 생겼을 거요. 집안사람 모두가 그대가 나를 할퀴는 것을 봤거든. 관례상 내가 벌을 주지 않았다면 시모인 어머니가 벌을 줘야 하는데, 어머니를 곤란하게 하는 일이었지. 늘 불안에 떨면서 나를 키우셨는데 혼인 후까지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소. 그런데 그대는 끊임없이 어머니를 힘들게 했지.”
“아주 나쁜 년이었네.”
나 말고 안안용. 내가 과거형으로 말했다는 것을 모르지?
내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 목선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저렇게 욕하면서 좋아하다니 이상한가 보다.
뭐,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눈이 그쳤네요. 공자님, 우리 밖에 나가요.”
목선후의 다리는 적당히 걷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어의가 말했다.
“누구 명이라고.”
목선후가 일어서기 편하게 내 어깨를 빌려주려 했지만 그는 나를 가볍게 밀고 목발을 잡았다.
“많이 움직여서 빨리 나아야지.”
보조개가 패이는 미소가 눈부시다.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저절로 미소를 되돌리게 된다. 이 사람이 내 남편이라니 나 참 운이 좋구나.
아니지, 현대에서는 부모님이 하루 한날 돌아가시고, 건물주 되기 직전에 추락사했으니 꽤 불운한 편이었지. 지금 그 보상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지.
딴생각하느라 문턱에 걸린 나를 목선후가 잡았다. 과거로 빙의해서 또 하나 어려운 점이 문턱이다. 평생 집이든 건물이든 문턱이 없는 곳에서 살다 왔는데 여기는 문턱이 없는 곳이 없다. 하도 많이 문턱에 발가락을 찧어서 가운데 세 개의 발가락이 파랗게 멍들 지경이다.
이상하게 이런 사소한 일에 서툴러서 고생을 한다. 사소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행동 교정이 안 되는 것이다.
“문턱 주의! 문턱 주의!”
내가 중얼거리자 목선후는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눈이 갠 하늘은 끝없이 높았고 목선후의 웃음소리는 섹시해서 가슴이 떨렸다.
***
목씨 저택 사랑채.
오랜만에 아버지와 바둑을 두던 목이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전하의 뜻이 무엇일까요?”
“무슨 말이냐?”
어사중승이 수염을 훑어 내리며 되물었다. 흑돌을 손에 쥔 채로 목이후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어전시에서 장진욱을 탐화로 뽑으신 것도 어사대에서 왜 탄핵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이 많았습니다.”
힐끔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탄핵을 해야 할 어사중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장진한을 경시서령으로 발탁하셨습니다. 경시서령이 비록 종5품이지만 경시서가 어떤 곳입니까? 환성의 시전을 감독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막중한 일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노련한 관리도 뇌물의 유혹과 상인들의 회유를 견디지 못하는 곳인데 이제 약관이 넘은 장진한이라니요. 그는 삼년상을 끝낸 지 며칠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세자빈 마마의 오라비다. 더 이상 말이 필요 하느냐?”
“또 있습니다. 소문에는 세자빈 마마의 부친인 장현봉 대인이 좌복야로 내정되었다는데 사실입니까? 좌복야 다음은 최고위직인 중서령인데 전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놓고 세자빈 마마의 친정인 장씨의 세를 불리시다니요. 오히려 눌러야 할 판에 말입니다. 젊은 유생들이 청운각에 모일 때마다 떠들썩하답니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모르니까 묻지 않습니까? 소자는 장진한같이 탐욕스러운 자가 경시서령이 되었으니 사돈인 안씨 상가가 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면 선후가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사주팔자 때문에 과거도 못 보고 저렇게 살고 있는데.”
동생을 생각하면 목이후는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무 아까운 아이라서.
“나는 전하의 뜻이 너무 분명히 보여서 놀랐다.”
“전하의 뜻이라고요?”
목이후가 눈을 빛내며 상체를 내밀었다.
“겨울에 물동이에 물을 채울 때는 삼 할은 적게 채워야 한다. 가득 채우면 물이 얼면서 항아리가 깨지거든.”
“아!”
“지금 항아리에 물이 꽉 차다 못해 넘치고 있구나. 겨울이 되었는데 말이다. 못 보는 자가 바보지.”
목이후가 숙연해져서 흑돌을 쥔 손을 폈다. 손바닥의 땀이 배어서 돌이 반질반질했다. 항아리는 장씨 세력이고 물은 그들이 누리는 영광이며 겨울은 물이 얼 때, 즉 전하께서 장씨를 칠 때가 아니겠는가?
장씨 세력을 치기 위해서 세자빈의 아버지와 오라비에게 중직을 맡기다니 전하의 심계가 무서웠다. 이십 년 태평세월은 공짜가 아니었다. 이것이 선왕께서 셋째 아들에게 망설이지 않고 왕위를 물려준 이유였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보니 눈앞의 대국처럼 조정의 상황이 분명한데, 이 전엔 왜 몰랐을까? 정말 까맣게 몰랐다. 주변의 동료 중에서도 아무도 눈치를 못 챘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목이후가 아버지에 대한 감탄과 자신에 대한 한탄으로 한숨을 쉬었다.
“왕실보다 더 강한 세력이 있으면 나라가 흔들리므로 강한 세력은 언제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장현봉이 현명하다면 낙향하고 미련하면 남겠지.”
“하면 우리는 어떡하면 됩니까?”
자신만만하던 목이후가 어깨를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는 조용히 인내하면 된다. 일을 앞에 나가서 할 때가 있고 뒤에서 조용히 지켜볼 때가 있는데 지금은 조용할 때다. 알겠느냐?”
“네, 아버지. 명심하겠습니다. 선후에게도 언질을 줄까요? 장진한을 조심하되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요?”
“그럴 필요 없다. 그 애는 알고 있을 것이다.”
“네.”
목이후는 땀에 배인 흑돌을 수건에 문질러 닦은 다음 조심스럽게 참나무 바둑판에 올려놓았다.
“어? 이런!”
지금까지 여유 있던 어사중승이 당황해서 아들을 쳐다보았다. 목이후가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시느라 대마를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맞다. 네가 내 대마를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구나. 방심했다.”
“소자는 줄곧 대마를 잡을 생각만 했습니다.”
“하하하! 잘했다. 너의 집요함이 마음에 든다.”
백돌을 던지면서 어사중승이 크게 웃었다.
***
눈밭을 산책한 후 목선후를 쉬게 하고 젖은 옷을 갈아입으려고 내 방으로 돌아갔더니 수정이 기다리다 반색했다.
“아씨, 대비마마께서 곧 환궁하신대요.”
“정말?”
“네. 김 상궁님께서 그러셨어요.”
목선후는 대비전의 시녀들은 대비의 허락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대비전에 처녀로 살아야 한다는 정보를 들고 왔다. 너무 끔찍했다.
이 똑똑한 소녀가 대비전에서 평생 바닥만 닦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픈 정도를 떠나 부당하게 여겨졌다. 그렇다고 당장 내가 무얼 해 줄 수도 없고, 약속할 수도 없다. 이 나라의 법을 바꾸지 않는 한 수정에게는 희망이 없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나는 새 시녀복으로 갈아입고 수정과 함께 대비마마 처소로 걸어갔다. 회랑을 걷는 동안에 눈을 찌르듯 저녁노을이 타올랐다. 내 가슴도 집에 갈 생각으로 뜨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발소리가 컸는지 대비 전 입구에서 수정이 내 팔을 가만히 잡고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정신을 차리고 조신하게 마루를 걸었다. 대비마마의 처소 밖에 늘 서 있던 시녀가 안 보여서 일단 문 앞에서 기다렸다. 안에서는 대비마마와 김 상궁의 음성이 들렸다.
“오늘 저녁은 애들이랑 같이 먹어야겠다.”
“네, 마마. 아씨에게 안마도 해 달라고 하세요.”
“선후를 돌보느라 바쁜 애에게 그런 것까지 요구하면 이 할미를 싫어할걸. 그리고 그 애 손가락은 힘이 없어. 하나도 안 시원해.”
온 힘을 다해서 안마를 했는데 별로였어?
수정이 입을 벌리려고 하기에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중문으로 몇 걸음 되돌아가서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내 방으로 다가갔다.
“대비마마, 안용이옵니다.”
“들어오너라.”
안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김 상궁이 잔잔한 미소를 띠고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아직까지 김 상궁의 등급을 보지 못했다. 어찌나 솜씨 좋게 시선을 피하는지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눈동자를 들여다보지 않는 한 시선이 마주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
“어서 드십시오. 수정이는 가서 저녁 식사를 올리라고 전해라.”
“네.”
수정이 물러가자 여전히 살짝 고개를 숙인 김 상궁이 나를 인도하며 말했다.
“공자님께서도 곧 이리로 오실 것이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김 상궁이 안내해 준 방석 위에 앉았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팽문의 부축을 받은 목선후가 들어왔다. 손자의 얼굴을 본 대비마마의 얼굴이 햇빛처럼 환해졌다. 안부자나 오 여사님이 나를 보는 시선과 별로 다르지 않다. 대비마마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이때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