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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49화 (49/92)
  • 49화. 그 여자는 누구예요?

    임승휘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정이시옵니까?”

    후궁이 된 뒤로 법도에 어긋난다고 친정도 아직 못 가 봤다. 이건 괜찮을까? 문제가 되면 데리고 나간 세자 저하야 뒷말 좀 듣고 말겠지만 자신에게는 중벌이 내려질 것이다.

    회임한 세자빈 마마를 의식해서 더 중한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저하, 소첩은 두렵습니다. 궁 밖으로 나갔다가 들키면 소첩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옵니다.”

    “세자빈도 예전에 나랑 잠행을 같이 나갔었다. 큰 문제 아니다.”

    “소첩은 세자빈 마마와 비교가 안 되옵니다.”

    임 승휘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세자는 이런 임 승휘가 좋다. 임 승휘는 현실파악도 잘하고 분수에 맞게 행동한다. 게다가 세자빈처럼 강성하고 야심 많은 친정이 없어서인지 단순하게 세자만 보고 산다.

    “어마마마께 허락을 받아주마.”

    세자궁에 후궁은 임 승휘 하나다. 역대 어느 때 세자궁보다 단촐하다. 세자 입장에서 후궁을 더 들이겠다고 하면 안 될 것도 없는데 세자는 부왕을 닮아 후궁보다는 정사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이런 세자의 성품을 아는 왕과 왕비는 세자의 청은 거의 다 들어주었다. 특히 여인에 관해서는 오히려 장려하는 편이었다.

    “아이, 좋아라.”

    임 승휘가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빛냈다. 친정은 못 가더라도 바깥 공기를 마실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

    안씨 포목점 점주가 출근하자마자 부점주는 어제 왔었던 손님에 관해서 보고를 했다. 그 손님이 자신이 말한 대로 안부자에게 직접 가서 상등을 팔라고 할지도 모르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누구인지 몰라서요. 환성에서 제가 모르는 귀공자는 없는 줄 알았는데 있더라고요…….”

    “어떻게 생겼던가?”

    “삿갓을 쓰고 있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음성만으로 짐작컨대 십칠, 팔 세 정도입니다. 제게 하대를 하는데 그게 굉장히 자연스러웠습니다. 그 정도 신분이면 어느 집안 누구라고 밝히는 법인데 본인도 호위도 말을 하지 않더군요. 참, 점주님, 목 공자님을 닮았습니다. 확실치는 않지만요.”

    “알았네. 내가 지금 주인님을 뵙고 말씀드리지. 그렇잖아도 갈 예정이었네. 주문이 너무 많이 들어오는데 지난번 같은 비단은 구할 방법이 없으니 문제로군.”

    “잘 다녀오십시오.”

    부점주는 인사를 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중문 상가 중에서 안씨 상가는 연일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내부 진열, 모든 손님은 부처님, 이라는 가게의 지표 때문이다. 이러니 주변 상가의 주인들이 질투할 수밖에.

    질투는 무섭다. 질투는 사람을 죽이고 집을 태우며 나라를 말아먹기도 한다.

    주인님의 신용과 아씨의 상술은 그 자체가 훌륭해서 인기를 얻었지 누군가의 몰락으로 반사 이익을 얻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무 개의 안씨 상가와 품목이 겹치는 상가는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부점주는 호위무사를 구해서 가게마다 세워 둬야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

    안씨네 사랑채.

    포목점 점주와 안부자가 마주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했다. 점주는 어제저녁에 온 이상한 손님에 대한 보고를 제일 먼저 했다.

    목 공자와 닮은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안부자는 눈을 반쯤 감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원래 설이 가까울 때 포목점이 제일 잘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아무 때나 잘됩니다.”

    “음.”

    “이게 좋은 게 아닙니다, 주인님. 어디 고급 비단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겁니까? 최소 몇 달은 걸리지요. 찾다가 없으면 발길을 돌릴 텐데 어떡합니까? 계속 허탕을 치게 되면 발길을 끊을지도 모릅니다.”

    “물량이 언제 충분해지겠나?”

    “길쌈 농가를 모두 재촉하면 설 전에는 작년보다 두 배의 물량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예약 주문을 받게.”

    “하, 하지만 길쌈 농가에서 제대로 만들지 못하거나 날짜를 못 맞추면 고객에게는 저희가 신용을 잃게 됩니다.”

    “안용이가 그러더군. 비단을 직접 생산하라고. 언젠가는 그래야지. 올해는 위험부담을 안고 가세.”

    안부자는 과감한 결정을 하는 사람이다. 무슨 결정을 하든 확실한 이유가 있으면 도중에 흔들리지 않고 결과도 온전히 끌어안는다. 그런 안부자의 성품을 아는 점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소인이 길쌈 농가에 자주 들러서 독려하겠습니다.”

    “그러게.”

    포목점 점주가 가고 난 후 안부자는 하인을 불러 철방에 상등을 두 개 더 만들라고 지시했다. 하나는 세자 저하에게 하나는 안씨 집안에 두기 위해서였다.

    목 공자와 닮은 젊은 남자. 호위를 데리고 있으며 하대가 자연스러운 귀공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알아챘다.

    세자 저하께서 포목점에 오셨구나.

    이제 어떡한다. 딸과 사위는 어찌 되려나?

    이런 일을 피하려고 소년 수재인 목선후는 과거도 못 보았고, 외출도 자제했으며 평민인 안안용과 혼인했다.

    정해진 운명은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나?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더라면 오늘날 안부자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아직 못 찾았을 뿐. 안부자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

    아침에 첫눈이 내렸다. 첫눈치고 많이 와서 지붕과 길가에 소담스럽게 쌓였다.

    민아는 학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난번에 엿을 주며 정보를 들었던 아이들 중 한 명과 우연히 마주쳤다.

    솜을 넣어 두툼한 겨울옷을 입은 민아와 달리 아이는 무명 홑겹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양지쪽에 쭈그려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러다 민아를 발견한 한 아이가 찬바람에 빨갛게 부르튼 뺨을 하고는 달려왔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중문 상가의 어느 집 하녀로 일하므로 하루 종일 중문 상가의 골목에서 어머니가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아이였다.

    “언니, 엿…… 또 없어요?”

    “왜?”

    “할 말이 있는데.”

    “먼저 말해 봐.”

    “연씨 집에 처음 보는 여자들이 있어요.”

    “어떻게 알았니?”

    “지나다 봤어요. 측문으로 다니는데 두 사람이에요.”

    민아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책 보따리를 풀어서 꽤 큰 덩어리를 꺼냈다. 오씨 부인이 오늘 아침에 쪘다고 준 떡이다.

    “급하게 먹으면 체해. 체하면 큰일 나는 거 알지?”

    아이의 손에 떡 두 덩이를 다 건네주었다. 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붕과 담벼락에 쌓인 눈을 가리켰다. 눈을 녹여서 같이 먹겠다는 뜻이다.

    “이거 한꺼번에 다 먹으면 배탈 나. 지금은 조금만 먹고 남겼다가 나중에 먹어, 응?”

    “엄마랑 같이 저녁에 먹을게요.”

    돌아서는 민아의 뒤에 대고 아이가 소리쳤다.

    “고기도 먹고 싶어요!”

    조용히 따라오던 민아네 하녀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한두 살 차이인데 어른스럽게 구는 민아도 웃기고 고기를 미리 주문한 아이도 웃겼다.

    “아씨, 그 떡 점주님 드린다고 아끼시더니.”

    “떡보다 더 중요한 걸 얻었거든요.”

    민아가 하녀의 손을 잡고 빙긋 웃었다. 민아네 집은 늦가을부터 하인들까지 모두 솜이 두둑한 겨울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이의 얇은 옷이 눈앞에 아른거려 민아는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옷을 줄 수는 없다. 떡은 먹으면 사라지지만 옷은 남아서 티가 난다.

    그 옷 때문에 저쪽에서 눈치채면 아이가 위험해지고 정보도 끊긴다. 어쩔 수 없다. 대신 맛있는 고기로 줘야지. 민아의 깊은 속을 모르는 하녀는 먹는 게 제일 좋긴 하지, 라는 생각을 했다.

    ***

    첫눈이 내린 날 오후.

    나는 목선후와 침상에 나란히 앉아서 귤을 까먹고 있다가 툭 물었다.

    “논어 제7이 뭐예요?”

    “……!”

    또 놀랐구나. 목선후는 내가 갑자기 툭 물으면 곧바로 대답을 못 하곤 괴상한 표정을 짓는다. 이게 또 엄청 재미있다.

    “나는 논어는 한 권인 줄 알았는데 일곱 권까지 있나 봐요?”

    “논어집주. 일곱 번째 책이오.”

    “엄청 딱딱하게 말하시네. 시녀들에게는 잘도 하더니? 들어오너라. 다 먹었다. 내어 가거라.”

    내가 거드름을 피우며 흉내를 내자 목선후는 눈썹을 모으더니 순식간에 팔을 뻗어 내 손을 낚아챘다.

    장난치고 도망갈까 봐 미리 잡는 거다. 다리 때문에 쫓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놀리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몇 번 장난을 치고 도망갔더니.

    잡힌 손목이 눌려서 금세 빨개졌다.

    “아파요.”

    그래도 놓지 않고 기어이 나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기왕 잡힌 김에 목선후의 멀쩡한 다리를 베고 누워 버렸다. 너무 피곤했다.

    목씨 집안에서 드리는 아침 문안은 힘들었지만 낮에는 나 혼자 마음대로 쉴 수 있었다. 안씨 별당에서는 더 편했고.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새벽닭이 울면 북행궁의 모든 사람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대비마마까지 일어나므로 나도 같이 일어난다. 환자인 목선후만 예외다.

    그 뒤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일한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대부분 유등을 끄고 곧바로 잠을 잔다. 피곤하니까.

    나는 그게 안 된다. 종일 일하고 피곤해서 잠에 곯아떨어지는 하루라니! 이게 사람이 사는 거야? 일개미의 삶이지.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은 못 지켜도 가끔 쉬는 날도 있고 쉬는 시간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게 붙여 준 시녀 수정은 너무 일을 잘하고 너무 잘 참고 너무 잘 잔다. 왜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돼? 따위의 의문은 전혀 가지지 않고.

    나는 일을 안 해도 되지만 수정을 돕고 싶어서 솜이 든 겨울옷을 손으로 빨아봤다. 흉내만 내는데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무척추동물이었다가 이럴 때만 척추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안안용이다.

    그래서 하루 중 목선후와 같이 있는 순간이 몸도 마음도 제일 편하다.

    “아, 편하고 좋다.”

    한 손을 위로 올려 목선후의 허벅지를 문질렀다. 이러면 허벅지 근육이 뭉치면서 내 머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좀 더 짓궂은 짓도 할 수 있지만 벽 너머의 사람들 때문에 참았다.

    “안용, 그 책에 대해서 왜 묻는 거요? 읽고 싶소?”

    “그 책 속에 그림이 있던데요?”

    내가 일어나 앉았다. 그림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빛을 보고 싶었다.

    사이가 안 좋을 때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안안용을 그렸는지 궁금했다. 목선후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근데 그 여자는 누구예요?”

    “여자라니?”

    “공자님이 그린 거 아니었어요? 장미 넝쿨과 여자가 있는 그림.”

    목선후가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아! 그 그리이임. 잊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사진으로 찍듯이 기억하고 있는 그날을 이 사람은 자신이 그림으로 그려놓고도 기억을 못 한다. 사이비 일 등급 같으니라고.

    뭔가 속은 기분이다.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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