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대가 원하니 그렇게 해
첫 번째 가게는 포목점이었다. 늦은 저녁 시간이라 귀족 여인들은 거의 없고 상인과 평민들이 한가롭게 구경을 했다.
“저것이 상등이옵니다.”
호위무사의 말에 세자는 삿갓을 벗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 대단하구나.”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처음에는 촛대 세 개였던 상등이 두 개의 촛대를 이어 붙여 다섯 개의 황 촛불이 탔고, 수많은 수정 조각이 그 빛을 사방으로 반사시켰다.
사람들이 밤하늘의 별이나 여름날 호숫가의 반딧불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빛나기 때문이다. 상등의 빛은 멀리 있는 별빛이나 깜박이는 반딧불이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세자는 상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동궁에도 걸어야겠어.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대전에 걸어야 되는 거 아닐까?
궁궐의 모든 물건은 예법에 따라 정해지고 만들어진다. 여인들의 몸에 붙이는 장신구 하나에도 의미가 있는데 이런 물건은 더 할 것이다. 아주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가능한 일.
그래도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어.
“점주를 불러라.”
“네.”
늦은 시각이라 점주는 이미 집으로 들어갔고 부점주가 남아서 손님을 상대했다. 상인과 즐겁게 담소하던 부점주가 점원의 말을 듣고 세자에게 다가왔다. 마침 세자는 상등을 충분히 보았다고 생각해서 삿갓을 다시 쓰려던 참이었다.
“목 공자님?”
부점주는 삿갓이 덮기 전의 찰나의 순간에 낯익은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을 못 들었는지 삿갓을 눌러 쓴 남자를 가리듯이 하며 덩치가 큰 남자가 쓱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얼핏 봐도 귀공자를 호위하는 무공 고수다.
“무엇이라고 했나?”
호위무사가 딱딱하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딴생각을 하다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부점주입니다.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부점주는 모르는 척 노련하게 물었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목 공자님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겠지, 하면서.
“상등을 하나 사고 싶다.”
삿갓 손님이 입을 열자 부점주가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음성이 달라. 목 공자가 아닌가?
하긴 생각해 보니 다리를 크게 다쳐 치료 중인 목 공자가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는 없다. 그리고 이미 친숙한 포목점에 들어와서까지 삿갓을 계속 쓸 필요도 없고.
너무 짧은 순간이라 자신이 잘못 본 모양이라고 생각한 부점주는 얼른 미소를 지었다. 내색했더라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상등은 파는 물건이 아니옵니다만.”
“이 가게 안에 있는 것은 모두 파는 것이 아니냐?”
말도 안 되는 억지지만 상인 된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가 갔다.
나라도 떼어오고 싶겠어. 다른 상가에서도 다들 똑같은 생각이지만 차마 말을 못 꺼내는 거지. 음성을 들으니 매우 젊은 남자로 목 공자가 확실히 아니군.
“그렇습니다만 예외도 있습니다.”
부점주는 영업용 비굴함을 드러내며 소심하게 응수했다. 상인은 어떤 물건이든 팔 자세여야 한다고 안부자가 늘 말했지만 아씨가 처음으로 만든 상등은 안부자도 팔 생각이 없을 것이다.
“내가 못 사는 물건은 없다.”
이제 부점주는 이 사람이 정신이 좀 나간 파락호가 아니면 어마무시한 권력을 가진 귀공자라고 생각했다. 호위무사를 봤을 때 아무래도 후자 같다. 누구일까?
그는 중문 상가에서 잔뼈가 굵은 성도 토박이다. 웬만한 귀족 집안의 내부사정까지도 대충 알고 있다. 하지만 목 공자와 닮은 이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오면 점주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며칠 후 심부름꾼을 보내시면 답을 드리지요.”
“여기는 안씨가 주인이 아니냐?”
“맞…… 습니다만.”
“되었다. 직접 안씨에게 연락하지.”
“……!”
부점주는 귀공자 일행이 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직접? 안씨? 뭔가 생경한 불편함이 뒷목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 이유가 저 젊은이의 말 때문인지 스치듯이 본 얼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게 밖으로 나온 세자는 천천히 안씨 상가들을 지나치며 걸었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한 빛은 사람들의 발길을 유혹하듯이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저 밝은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 저 즐거움까지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세자가 익위사에게 물었다.
“안씨가 어떤 자냐?”
“상인이옵니다. 무식한 안씨 집안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장사를 잘해 거부이옵니다.”
“무식한데 어떻게 거부가 되지?”
세자도 예외 없이 이 의문을 던졌다.
“신용 때문입니다.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약속을 못 지키게 되면 미리 말하고 원하는 대로 위약금을 내준다고 합니다.”
“허!”
세자가 감탄사를 뱉었다.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
내가 북행궁의 시녀가 된 지 며칠이 지났다. 내관복을 입은 목선후를 부축해서 한적한 후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대비마마의 어깨를 안마해 주기도 하면서 제법 그럴듯한 모습의 시녀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북행궁은 깜깜한 밤에 보던 때하고는 사뭇 달라서 초겨울 은은한 햇살 아래 빛나는 청석과 잘 닦인 마루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나는 대비마마 침소의 상방에 누워 있는 목선후 옆에서 밤늦게까지 간병하다가 조금 떨어진 시녀의 방에 가서 혼자 잤다.
내가 목선후와 같은 방에서 자지 않은 이유는 벽 속의 사람들 때문이다. 몇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낯선 사람들이 하루 24시간 두 눈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마음 편히 잘 배짱은 없어서다.
내 속셈도 모르고 대비마마는 내가 외로울까 봐 조수정이라는 시녀를 붙여 주고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 내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니까 조수정은 시녀인 나를 시중드는 시녀인 셈이었다.
겨자색 시녀복을 입은 조수정을 만난 곳은 대비전 앞에서였다.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온 나를 궁금하게 여기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고 순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팟! 등급이 떴다.
팔 등급?
대비마마의 말단 시녀가 팔 등급이라고? 이게 시녀들 평균치인 건지 조수정 지나치게 높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녀는 과거시험에 부정을 저지르고 유배를 간 남우효랑 동급이다. 이 시녀가 공부를 제대로 하고 과거를 봤다면 향시에 합격했을 것이다. 아까웠다.
목선후에게 부탁해서 집에는 잘 있다는 소식을 보냈다. 내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나 나를 데려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적당히 설명을 했으리라.
오전 산책을 마치고 잠시 쉰 후에 목선후와 나란히 긴의자에 걸터 앉았다. 그는 내가 그의 겨드랑이에 폭 안겨서 자신의 목에 내 숨결이 닿는 상태를 좋아했다.
지금 꺼내야 하는 말이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좀 불편하지만 그가 원하는 자세를 해 주었다.
“저기, 의논할 게 있는데…… 요.”
“무엇이오?”
한 팔로는 나를 껴안고 반대 팔로는 서신을 읽으면서 무심한 어조로 묻는다. 이럴 때는 내가 한 마리 고양이가 된 거 같다.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생각날 때마다 옆에 식빵 자세를 하고 있는 고양이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듯이 목선후는 가끔 내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을 준다.
어이, 목 집사. 할 말이 있다옹. 마음을 열고 들어 보라옹.
“저기, 시녀인 조수정은 죽을 때까지 시녀로 있어야 돼?”
목선후의 굵은 눈썹이 꿈틀하자 제 발 저려서 덧붙였다.
“요?”
목선후는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는지 그렇잖아도 크고 까만 눈동자가 더 짙어졌다.
물기를 머금은 비단 옷자락처럼 착 감기는 검은 눈동자.
빠져들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딱딱하고 건조했다.
“그런데 관심이 없어서 모르오.”
“……!”
신박한 거절이었어. 하지만 문은 최소한 세 번 두드려야 되는 법. 다시 서신을 읽기 시작하는 목선후에게 간절하게 말했다.
“좀 알아보면 안 될까요? 참 똑똑하고 착한 소녀라서요.”
“나보고 시녀에 관해 알아보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목선후가 품에 안긴 나를 밀어냈다. 그런다고 밀 건 또 뭐야?
밀린 김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디 가오?”
“배고파서요. 점심이 됐는지 물어보려고요.”
“아직 말이 안 끝났소.”
나는 끝났어. 바디랭귀지를 읽었거든. 본심을 파악할 때는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무의식적인 제스처가 더 중요하댔어.
“안용, 돌아오시오.”
고집스럽게 문을 향해 계속 걷자 끄응차, 하는 소리를 내면서 목선후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약은 놈. 벽 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것을 내가 질색하는지 알면서도.
할 수 없이 돌아와 그의 팔 아래로 고개를 집어넣어서 그의 목발이 돼주었다. 겨드랑이에 끼인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그가 속삭였다. 이마에 따뜻한 숨결이 닿는다.
“알아보겠소.”
“정말?”
“왜 그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대가 원하니 그렇게 해.”
어, 이렇게 달콤한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봐.
이유를 몰라도 내가 원하니 들어주겠대. 그냥 지나치는 말인데도 가슴이 벅차다. 헐떡이면서 물었다.
“그럼, 앞으로도 내가 원하면 뭐든 해 줄 건가요?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
목선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미안, 너무 나갔나 봐. 내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그러지.”
그러고는 내 얼굴을 잡고 고개를 내려 키스했다. 목발이 되어 남자의 겨드랑이에 껴있는 채로 키스하기는 처음이었다.
왜 그전에 안 해 봤는지 억울할 정도로 좋았다. 불편한 자세라 뭔가 더 애틋하고 절절하고 숭고하게 느껴졌다. 이상한 장소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커플을 비난하는 기사가 종종 인터넷 뉴스에 떴었다.
그걸 이 고대로 와서 이해할 줄이야. 함부로 남을 비난하지 말자.
마침 들어오려던 시녀가 문을 열고는 우리가 서 있으니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점심이 준비되었사옵니다.”
“갑시다.”
키스의 여운에 빠져 있는 나와는 달리 시녀 앞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목선후다.
***
다음 날 세자는 시강원에서 돌아와 곧바로 후궁인 임 승휘(承徽, 종4품)에게 갔다. 임 승휘는 세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해 놓고 눈을 빛내면서 상등에 대한 설명을 기다렸지만 세자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끙끙댄 후에.
“별이 모여 있다고 생각하면 돼. 그보다 더 밝아. 밝기만 한 게 아니라 반짝거려. 눈이 부실 정도로.”
“저하, 그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잘 모르겠사옵니다.”
세자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문득 떠올랐다.
“같이 가자, 가서 네 눈으로 직접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