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너무 많이 변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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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한쪽의 낮은 침상 위에 목선후가 눈을 감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내가 올 것을 대비해서인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서 나는 재빨리 목선후에게 다가갔다.
“공자니임.”
황 촛불에 어른거리는 속눈썹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작게 불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유령처럼 창백했던 뺨은 예전처럼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파랗던 입술은 하얗게 말랐지만 핏기가 비쳤다. 회복된 거 맞지?
“공자님, 나예요.”
아무 반응이 없어 무릎을 꿇고 반가움과 불안감에 잘게 떨면서 손가락을 코끝에 대보았다. 따뜻한 숨결이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싼다.
자는 거구나. 예상대로였지만 확인하기 전에는 불안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다리 상태를 보고 싶어서 다리 쪽의 이불을 살며시 걷었다. 통이 넓고 얇은 침의바지를 입었는데 바지 속으로 한쪽 다리 전체를 단단하게 묶고 있는 흰 면포가 보였다.
손을 내밀어 붕대를 살며시 쓸어 보았다. 엄청나게 부어 있거나 열이 끓고 있지 않는 걸 보니 안정적으로 낫고 있는 거다. 후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그리운 목선후의 음성이 들렸다.
“다리만 볼 거요?”
“네. 나는 다리만 보러 왔어요. 그 위로는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이제 다리를 봤으니 가야겠어요.”
이불을 덮어 주고 뒤돌아서며 일어섰다.
“안용, 화내지 말고 이리 오시오.”
그래도 꿋꿋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달달 떨렸지만 치마를 입어서 목선후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좀 더 애처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얼굴도 다쳤소. 얼굴은 안 봐 줄 거요?”
얼굴을! 그건 안 되지! 휙 돌아서려다 멈췄다.
아니, 아니야. 이건 함정이야. 그날 다리만 다쳤었어. 그리고 난 삐쳤어.
“안 볼 거예요.”
“그렇다면 가시오. 그대가 이대로 가면 안씨 집안은 어찌 될지.”
헉!
농담이라도 소름이 쭉 끼쳤다. 바람개비를 만들어 줬다고 좋아하던 귀여운 안국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휙 돌아섰다.
목선후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불이 흘러내리자 얇은 비단 침의를 입은 상체가 드러났다. 심의나 도포를 입었을 때도 어깨가 넓고 단단한 줄 알았지만 촛불 가까이에서 보니 눈을 뗄 수 없게 근사했다.
두툼한 근육과 단단해 보이는 빗장뼈. 근육이 짜깁기된 듯한 어깨의 끝.
검고 긴 머리는 목 뒤에서 한 번 묶었고 관자놀이께의 잔머리가 몇 가닥 흘러내려서 부상 때문에 날카로운 턱선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목선후, 메두사였냐. 내 몸이 움직이지 않아.
“안용, 이리 오시오. 기어이 내가 가야겠소?”
“와 봐요.”
문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안 그러면 기선제압이고 줏대고 뭐고 다 팽개치고 달려가서 저 가슴에 안길 것 같았다.
목선후가 정말 일어나려는 것처럼 상체에 힘을 주고 허리를 들었다. 불편하고 이상한 자세였다. 보기 안쓰러웠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내가 도와주려고 했다. 진심으로.
그럴 겨를도 없이 벽처럼 보였던 곳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목선후를 도와 침상 옆의 의자에 앉히고 붕대로 감은 발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올려놓았다.
한쪽에 있던 방석까지 가져와서 발밑에 괴는 섬세함까지 발휘한 뒤에 역시 나를 보지 않고 다시 벽 뒤로 사라졌다.
나는 너무 놀라서 숨까지 멈추고 있다가 남자가 사라진 후에야 숨을 뱉었다.
북행궁에 사람들이 안 보인 이유는 모두 벽을 파고 들어가 있어서였나? 뱀파이어도 좁긴 하지만 관 속에 누워서 자는데 여기 사람들은 벽 속에서 서서 자는 것일까?
물론 아닌 줄 안다. 벽 너머에서 귀인을 지키고 있던 호위였을 거다.
그래도 현대인인 나는 프라이버시가 깨지는 이런 상황이 오면 당황해서 숨이 멈추고 피가 얼어붙는다.
간신히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목선후가 성한 쪽 허벅지를 탁탁 치고는 내게 손을 뻗었다.
좀비가 걷듯이 비틀거리며 걸어가서 성한 쪽 무릎을 슬쩍 옆으로 치우고 그 옆에 앉았다.
목선후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더니 팔을 뻗어 자신의 가슴에 나를 기대게 했다. 따뜻한 그의 피부를 느끼자 온몸의 솜털이 부르르 떨며 일어나고 통증과 같지만 통증은 아닌 어떤 감정이 가슴을 채웠다.
멋쩍고 어색해서 바로 어제 만난 사람처럼 가볍게 말을 걸었다.
“푸, 약 냄새.”
“그대에게서는 장미꽃 냄새가 나는군.”
나를 더욱 굳세게 안으면서 말한다.
거짓말이다.
이 시대 장미수는 무공해 유기농 장미꽃에서 추출하는데 천연제품이 대개 그렇듯 향이 약하다. 바디코롱을 열 배쯤 희석시킨 정도다. 그러니 온몸에 떡칠을 하듯 발라도 한 시간 후면 냄새가 사라진다.
나는 저녁마다 목욕을 하고 장미수를 바르지만 잠들 때 벌써 냄새가 희미해짐을 느낀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밥을 먹다가 갑자기 온 거라 목욕도 못 했다.
어쩌면 이 남자는 자신의 그림 속에 있는 여인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보고 싶었소. 아주 많이.”
나비의 날갯짓 같은 아주 작은 속삭임이 귓바퀴를 돌았다. 고개를 숙인 목선후가 내 이마에 입술을 누르더니 손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검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는 황 촛불에 더 짙게 타올라서 그 열기가 내 뺨을 달궜다. 내가 확 달아오른 얼굴로 허둥대자 목선후가 한여름 수국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그대는 내가 보고 싶었소?”
대답 대신 허리를 비틀었다. 내 엉덩이 옆에 목선후의 단단한 골반뼈와 근육이 느껴졌다.
그 순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목선후가 내 목덜미를 잡아당겼고 입술이 부딪쳤다. 성급한 키스가 폭포수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떨어져 내렸다.
한 호흡도 허용하지 않는 무자비한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러는 중에도 달콤한 전율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흘렀다.
원래 안안용은 탁구공만 한 폐를 가졌는데 언제 배구공만 해진 거야?
허벅지를 누르던 팔까지 들어 올려 그의 목에 감았다. 이성을 던져 버리고 키스에 열중하느라 내 몸은 엉거주춤 서더니 목선후보다 더 위에서 내려다보게 되었다. 이제 그의 손은 내 허리를 움켜쥐고 등을 눌러댔다. 한 몸처럼 붙어 있고 싶다는 듯이.
계속 그의 아픈 다리가 신경 쓰였고 허리도 아팠기 때문에 결국 키스를 멈추고 떨어졌다. 가슴이 너무 심하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뒤돌아섰다.
흥분과 열기로 떨리는 손도 마주 잡았다.
벽 속에 사람이 있는, 프라이버시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곳에 온 주제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전히 이성을 잃고 키스에 몰두했다. 심장이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으로.
“헉, 헉. 내, 내가 약한 거 잊었어요? 헉, 헉.”
내 폐가 배구공처럼 커졌음을 알게 하면 안 된다. 그건 비장의 한 수로 남겨놔야지.
“이 정도 입맞춤도 못 하면 어떻게 그대를 안지?”
이 끈끈하고 농밀한 소리가 점잖은 목선후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 실화냐?
“다리나 낫고 걱정해요.”
열기를 식힐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대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요. 나는 이미 오래 참았으니…… 읍.”
달려가서 그의 입을 막았다. 방에 도청기가 설치된 것을 갑자기 알게 된 스파이처럼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쭉 펴서 아까 남자가 나왔던 벽을 가리켰다.
너는 몰라도 나는 참기 힘들어. 현대에 있을 때도 간지럽고 이상해서 리얼리티 티브이 프로그램은 하나도 안 봤다고.
하루 종일 서서 수백 쌍의 눈을 마주하는 직업을 가지면 프라이버시가 너무나 중요해진다. 때로는 돈과 시간보다 더 중요해서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돈과 시간을 희생하기도 한다.
벽 속이나 문밖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신경 쓰였다. 몰래카메라 수십 대가 돌아가고 있는 이 느낌. 정말 싫다.
나와는 달리 목선후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고 안씨 별당에서는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얼떨떨했다.
장지문 밖에서 작은 헛기침 소리가 나더니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저녁 식사를 올리겠사옵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짙은 감정에 젖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방황했다.
“밥이래요.”
진짜 궁중 음식을 먹어보는 거다. 현대에서 재현한 음식이 아닌 오리지널 찐 궁중 음식.
“배고프오? 나는 좀 더 그대와 둘이…….”
“배고파요.”
안 고파도 먹어야 돼. 내가 언제 또 궁중 음식을 맛보겠어?
“들어오너라.”
실망한 듯이 어깨를 들썩한 목선후가 왕족처럼 익숙하게 명령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왕족처럼 우아하고 권위가 있었다.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그는 너무 많이 변했다.
***
중문 상가의 중심가를 평범한 복장을 한 몇 남자가 걷고 있었다. 가운데 한 사람을 두고 세 사람이 품자 형식으로 주변을 방어했다.
최근 환성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만수절도, 어전시도 아니었다. 안씨 상가였다.
상등은 저녁에 해가 떨어지면 수없이 많은 별들이 지상에 내려와 한데 뭉친 것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었다.
겨울이 되면서 가게 문을 닫아 놓기 때문에 밖에서는 더 이상 상등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과자 하나라도 사서 나오면 되니까.
안씨 상가는 동전 한 문짜리 물건을 사는 손님이라도 똑같이 친절하게 응대했다. 안안용이 ‘모든 손님은 부처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왕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되므로 ‘손님은 왕’ 대신 쓰기 시작한 말이다.
여기가 서양이었더라면 ‘모든 손님은 예수님’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공자님, 여기가 안씨 상가의 시작이옵니다.”
삿갓을 쓴 남자에게 공손하게 말하는 자는 옆구리에 긴 칼을 찼다. 일당 백이라는 세자 익위사다. 세자는 가끔 잠행을 나오는데 이번에는 그 유명한 안씨 상가를 들러볼 생각이었다.
안씨 상가의 상등에 관한 소문은 왕궁에 사는 세자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
들어보니 이 상등이라는 기이한 물건을 궁궐에 사는 사람을 빼고는 다 본 모양이었다. 오늘 상등을 보고 세자빈과 후궁에게 이야기해 주면 좋아할 것이다.
“들어가자.”
“네,”
“모두 다 들어오면 번잡하니 둘만 따라 들어오너라.”
“공자님, 그러시면.”
“지금 위험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왕권이 안정되고 내외적으로 정치적 갈등이 없는 지금 세자는 잠행을 나갈 때 사복 호위무사 네 명만 데리고 다녔다. 가게 안에 체구가 크고 칼을 찬 무인이 넷이나 들어가면 너무 눈에 띈다. 잠행을 나온 보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