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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46화 (46/92)
  • 46화. 원하지 않는 길

    “앗! 아버지, 참으세요. 제가 잘 타이를게요.”

    안신이 얼른 아버지의 팔을 막았다. 큰 동생의 좋은 점은 너그럽고 화통한 성격이다. 테스트해 보면 아이큐는 몰라도 이큐는 매우 높을 것이다.

    “매영 좋아.”

    막내인 안국이 혀 짧은 소리로 말했다.

    “매영이 뭐니?”

    내가 묻자 어머니가 대신 답해 주었다.

    “목 서방 말이다.”

    “아! 그 매애혀영. 매형 좋지. 나도 좋아해, 안국아.”

    문제는 만날 수가 없다는 거지. 연락도 없고. 그런 상태로 가 놓고 말이야. 그딴 매형 버려 버렷!

    “매형 대신 누이가 안아 줄게. 이리 와.”

    등급외 안국이 팔짝팔짝 뛰어왔다. 막내란 얼마나 좋은 직위인가. 뭘 해도 예쁘게 보이니. 아들들에게 엄격한 아버지와 어머니도 안국이에게는 무한한 하트를 발사한다.

    “매형이 왜 좋아?”

    안국이를 무릎에 앉히고 물었다. 둘이 언제 나도 모르게 만났지?

    “매영이 바담개비 줬어.”

    “바람개비?”

    안국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복도에 있는 유모한테 달려가서 바람개비를 들고 신나게 돌리면서 달려왔다.

    바람개비의 날개는 종이를 두세 장 붙여서 두껍게 했다. 작은 나비가 바람개비의 날개가 돌 때 같이 날개를 펄럭였다. 논어 제7에 끼워져 있던 그림처럼 나비가 살아 움직이듯이 섬세한 선이 눈에 확 띈다. 겨우 며칠 아이가 가지고 놀다가 버릴 종이 바람개비에 이렇게 정성을 들였구나.

    왕자님이 만들어 준 바람개비를 후후 불면서 안국이가 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조그맣고 동그란 머리통 위에 입을 맞추는데 하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인님, 급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안부자는 집에서 손님을 만나지 않고 손님이 와도 되도록 낮에 일을 끝내는 사람이다. 이미 오래 진행되어 온 습관이라 시종이 모를 리 없다. 그러니까 정말로 급한 일이다.

    무엇인가를 예감한 아버지가 일어서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깊고 풍부한 표정을 담은 안부자의 눈빛에 내 가슴이 떨렸다.

    ***

    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마차의 마부석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내가 그의 등급을 알아보기 전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내 얼굴에서 고귀하고 성스러운 빛이…… 났다고 하기에는 주변이 너무 어둡구나.

    “도착하기 전까지 입으셔야 합니다.”

    그가 건네준 저고리와 치마를 받아 들고 좁은 마차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언제 도착하는지 모르니까 되도록 빨리 갈아입으려고 마차 안에 들어가 앉자마자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마차 안은 더 어두워서 더듬거리며 비단옷을 벗고 무명으로 된 저고리와 치마로 갈아입었다. 다 갈아입고 자갈길을 굴러가는 마차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목선후는 어떤 상태일까?

    현대라면 그 정도의 부상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의 나처럼 파상풍 예방 접종을 했다면 완벽했을 거고. 목선후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안심하면서도 불안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꽤 오랜 시간을 달려간 후 마차는 커다란 문을 지나 거대한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목선후같이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휘장 사이로 살짝살짝 손가락을 집어넣어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건물 안에 들어간 후에는 극도로 조심하느라 손가락 대신 눈동자를 댔다.

    안씨 저택이나 목씨 저택도 크지만 이곳은 여염집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청석이 깔린 뜰과 처마 끝에 높이 달린 등롱. 무엇보다 사람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마차는 다시 문을 하나 지났다.

    “내리시지요.”

    마부의 말에 마차에서 내리니 손에 초롱을 든 여자가 기다리다가 다가왔다. 내가 갈아입은 옷과 같은 옷이다.

    그렇다면 여기는 북행궁이고 이 옷은 시녀복이구나, 짐작이 갔다.

    북행궁은 초롱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외에 어둡고 고요해서 가까이 있는 건물의 처마끝도 잘 보이지 않았다. 초롱이 조금만 멀어져도 내 발 앞도 안 보일 정도의 두터운 어둠이었다.

    어둠에 싸인 청석 뜰에 흐르는 적막감 때문인지 어떤 자유도 허용할 것 같지 않은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초롱을 들고 조신하게 앞에서 걷던 시녀가 중문을 또 하나 지났다. 도대체 몇 개째 문을 지났는지 모른다.

    드디어 등롱이 처마 끝에 줄줄이 달린 전각 앞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초롱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환했다. 시녀가 초롱을 마루 끝에 두고 마루 위로 올라갔다. 넓고 잘 닦인 대청을 지나 오른쪽 방 앞에 서더니 그제야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봐야 눈꺼풀을 반쯤 내려서 내 가슴께를 봤을 뿐이지만.

    “들어가시지요.”

    “감사합니다.”

    시녀가 열어 주는 문 안으로 들어갔더니 탕약 냄새와 뜸이 타는 냄새가 방 전체에 짙게 배어 있었다.

    커다란 방 중간쯤에 장지문이 있고 그 앞에서 드디어 아는 얼굴과 만났다.

    팽문.

    거의 한 달만이다. 가을의 시작에 헤어졌는데 낙엽마저 다 떨어져 헐벗은 나뭇가지에 까치밥만 남았을 때 다시 만났다.

    저 문 뒤에는 목선후가 있는 거겠지? 가슴이 퉁퉁 뛰기 시작했다. 이 위압적인 북행궁의 분위기와 어둠 속에서도 그를 본다는 기쁨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아씨,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잘 있었니? 공자님은 어떠시니?”

    내가 너무 태연하게 묻자 팽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눈물 콧물 쏟으면서 서방님은 무사하시니, 라고 대성통곡이라도 하리? 이만한 일에 우는 여자였으면 수능 명강사라는 타이틀을 따지도 못했을걸.

    학생들의 등급을 볼 수 있고 강의도 잘했지만 본인 멘탈 관리도 잘해야 했다. 그건 어떤 일을 하든 마찬가지다. 현대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관리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나는 안씨 집안의 귀한 외동딸인 안안용하고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지금 나는 살아 있는 남편을 보러 왔으니 슬픔보다는 기쁨과 기대감에 차서 뺨에 열이 올랐다.

    팽문이 장지문을 잡아당겨서 열었다.

    ***

    궐향은 북행궁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목선후의 상태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는 잘 알았다. 한 달이 지나자 목선후는 목발을 짚고 걸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순순히 회복되어 가는 중이라 마음이 놓였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주군, 장진한이 만수절 이후 고기 냄새를 맡은 개처럼 왕실 종친의 뒤를 여기저기 캐고 다닙니다. 눈치를 챘나 봅니다?”

    “20년 전의 일을 아는 자는 몇 사람 되지도 않는데다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풍월문에 있다. 장진한이 아무리 노력해도 증거를 찾지 못할 것이다.”

    “저기, 증거가 달리 필요하겠습니까? 세자 저하와 공자님께서 나란히 서면 끝! 인데요.”

    “세상이 넓은데 닮은 사람이 없겠느냐?”

    “주군, 너무 닮았어요. 이전에도 닮았지만 지금은 판박이에요. 판박이. 쌍둥이 같다니까요. 정말로 숨기고 싶다면 공자께서 환성 밖으로 나가시던지, 얼굴을 갈아엎든지 해야 될 겁니다.”

    “뭐? 얼굴을 갈아? 이놈의 자식이.”

    푸슉!

    갑자기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앗!”

    수하가 몸을 날려 피하자 단도가 벽에 박혀 파르르 떨었다.

    “에이, 주군, 뭐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죽을 뻔했잖습니까?”

    “뽑아 와.”

    수하는 투덜거리면서 벽에 박힌 단도를 뽑아서 궐향에게 가져다주었다.

    “아직까지는 장진한 혼자지만 곧 장씨 집안 전체가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대비마마께서 먼저 터뜨리시면 좋겠구나.”

    “장씨 집안에서 벌떼같이 들고 일어설 겁니다.”

    “하나도 무섭지 않다.”

    “당연히 주군이야 무섭지 않죠. 주군은 아무도 노리지 않으니까요.”

    “목 공자도 무서워하지 않을 거다.”

    “어떻게 아세요? 솔직히 글만 읽는 선비잖아요. 살면서 단 한 번도 남과 싸우지 않았다에 제 손모가지를 겁니다.”

    “그러게, 지나치게 조용해. 그러다 어느 날 한꺼번에 터질까 봐 걱정이다.”

    “터질 게 아예 없다니까요. 원래 그런 분. 앗!”

    수하가 풀썩 뒤로 몸을 눕히더니 단도가 지나가자 아예 일어나서 방을 나가 버렸다.

    “아니, 왜 나한테만 그러셔. 다리 다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본인이 더 짜증을 내네. 쳇, 풍월문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

    수하가 사라지자 궐향은 벌렁 드러누웠다. 겨울이 다가왔다. 풍월문이 있는 골짜기는 벌써 얼음이 두껍게 얼었을 거다.

    이렇게 오래 풍월문을 비운 경우가 없어서 한편으로는 염려된다. 곡식과 난방용 땔감을 충분히 준비했는지, 약초나 채소를 말려서 창고에 채워놓았는지, 가을에 사냥을 해서 고기를 훈제해 놓았는지.

    자신이 풍월문에 있다고 해서 이런 일을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감독은 꼼꼼히 했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 놓았지만 처음이어서 그런지 불안했다.

    여기 올 때의 계획은 그저 잠깐 들렀다 가는 거였다.

    목선후의 얼굴만 보고.

    와서 보니 목선후가 곧 혼인을 한다는데 신부는 딴 남자와 도망칠 궁리를 했다.

    사정을 파악한 뒤 궐향은 한인수를 만나 두 개의 길을 제시했다.

    도피 비용은 보태 줄 수 있으니 원래대로 안안용과 사랑의 도피를 해라. 깨끗하게 도망가서 목선후와의 혼인을 완벽하게 깨라. 버려진 신랑이 어떤 미련도 갖지 않도록.

    사랑의 도피를 못 하겠으면 가족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그녀와 사랑의 도피는 못 한다고 사내답게 깨끗하게 고백하고 안안용이 비난을 하면 비난을 받고 뺨을 때리면 뺨을 맞으라고. 그러면 가족이 굶지 않을 정도로는 도와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당신은 누구요? 안부자 어르신이 보냈습니까?”

    “그런 셈이죠. 안씨네 아씨는 안부자 어르신의 금지옥엽이오. 당신과 도망을 가든 남아 있든 결국 마지막에는 안부자 어르신의 책임이 되는 거 아니겠소? 내 말이 틀렸소?”

    궐향의 능글맞은 미소를 보는 한인수의 눈은 사막처럼 황량했다.

    거대 상단의 촉망받는 후계자였던 한인수는 두 가지 길 중 어느 쪽도 택하지 못했다. 안안용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혼자 숨어 버렸다.

    혼인 당일까지. 아니, 혼례복을 입을 때까지도 안안용은 한인수를 기다렸다. 오지 않는 연인.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딸을 보내는 아버지와 무식하다고 소문난 집 딸을 돈을 보고 혼인하는 가난뱅이 남자.

    안안용은 이 세 남자에게 분노했고 그 분노를 초야에 눈앞에 있는 목선후에게 터뜨렸다. 혼인은 처음에는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결국 혼인 생활을 못 견딘 안안용이 무슨 사달을 낼 줄 알았는데 하루 이틀 버티더니 오히려 갈수록 좋아졌다. 안안용의 변화를 본 궐향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이번 어전시에서 세자빈 집안의 장진욱이 탐화가 되었다고 들었을 때 궐향은 직감했다. 왕이 목선후를 전면에 등장시키기 위해서 사전 포석을 깔고 있음을.

    목선후의 신분을 회복시키려면 왕비와 세자와 세자빈과 그 뒤의 세력들을 달래야한다. 현재 가장 득세하고 있는 세력은 세자빈의 친정인 장씨 집안이다.

    그래서 훗날 목선후의 등장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장진욱에게 탐화라는 보상을 미리 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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