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닮은 사람은 가족이기 쉽지
풍만한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는 안부자가 하는 말은 피가 얼어붙게 무섭다.
“아버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피할 길이 있을까요?”
어린 동생들과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를 어쩌냐. 나는? 신이 또 빙의하게 해 줄까? 여기서는 아무 희생도 하지 않고 먹고 놀기만 했는데?
급 후회스럽다. 착하게 살걸.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위안이 되는 말을 기대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드디어 만수절 아침.
올해 왕의 생일인 만수절의 가장 큰 행사는 어전시라는 과거시험이다.
이 나라의 과거시험은 3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데 현대의 수능만큼은 못하지만 상당히 체계적이고 공정한 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공정하냐면 그건 아니다.
1차 관문은 신분과 나이 제한은 없으나 성별 제한은 있는 향시다. 능력만 있다면 거지도 백 세 노인도 응시할 수 있지만 여자는 응시하지 못한다.
1차인 향시에 합격하면 한 달쯤 뒤에 2차 시험인 전시를 치른다. 전시에 합격한 자 중에서 상위 열 명이 왕 앞에서 어전시를 치르게 되는데 이는 초고난도의 논술시험이라고 볼 수 있다.
왕이 직접 질문도 하므로 화술도 좋아야 했다. 물론 외모도 조금은 영향을 미친다.
이 어전시에서 상위 1, 2, 3등이 영광의 자리에 올라 즉시 관직에 나아간다.
어전시 현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삼성 육부의 수장들과 왕실 어른들뿐이므로 백성들은 궁궐 정문 앞에서 누가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될지 기다린다. 올해 향시와 전시에 합격한 자들과 가족들은 대부분 간다고 한다.
하지만 안씨 집안에서는 누구도 나가서 구경하지 않는다. 돈 많고 무식한 안씨, 라는 말을 꼭 듣게 되기 때문이다. 동생들은 피 끓는 십대라서 그런 말을 들으면 참지 못하고 싸울 게 뻔하다.
제일 웃긴 게 무식한데 돈이 많다고 흉본다는 것. 반대로 목씨 집안처럼 유식한데 돈이 없으면 청렴하고 고고하다고 칭송을 듣는다.
무식하면 돈이 없어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거야? 현대인인 나는 도무지 이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다.
신시(오후3-5시)가 가까워 오자 환성에 있는 사람들 중 절반은 궁궐 앞으로 몰려간 것처럼 시내가 조용해졌다.
어머니는 동생들에게 별미를 해 주고 나는 별당에 앉아 오랜만에 책을 읽어 보기로 했다. 별당 서재에 가서 아무거나 책을 한 권 뽑았다.
論語 第七(논어 제7)?
한자에 무식한 나는 논어는 한 권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한 권을 일곱 권으로 쪼개 놨다고 생각해서 앞뒤로 살피다가 얼마나 얇은지 알아보려고 팔락 종이를 넘겼다.
책갈피에서 종이 하나가 툭 밑으로 떨어졌다.
논어 제7에서 떨어진 종이는 책 크기로 한 번 접혀 있었다. 천천히 종이를 폈더니 그림이다.
눈을 깜박여서 초점을 다시 맞추고 봐도 그림. 그가 그렸다. 천천히 앉아서 시선을 열려 있는 문밖으로 돌렸다.
가을 햇빛에 물든 팽나무 잎사귀가 이러저리 바람에 흔들렸다. 그러다 한 잎 두 잎 툭툭 떨어진다.
“아씨, 차를 드릴까요?”
떨어지는 낙엽을 멍하니 보고 있는 내게 말순이 조용히 다가와서 물었다. 얼굴이 해쓱하다.
어쩌니, 말순아. 네 짝사랑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어.
팽문이 그저 머리만 좋은 평민이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드물다. 향시 커트라인이 6등급인데 팽문은 4등급이니까 죽어라 공부를 했을 뿐만 아니라 타고난 머리도 좋다고 봐야 한다. 나같이 실력 빵빵한 과외선생을 두었을지도 모르고.
정오가 조금 활발하고 대범하다면 말순은 섬세하고 부드럽다. 정도 많고. 내가 다른 건 다 도와줄 수 있지만 남녀 간의 사랑은 본인들 몫이니 어쩔 수 없다.
“차보다 과일주 한 잔 가져올래?”
“네.”
논어 제7에서 떨어진 종이에는 장미넝쿨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나는 목선후가 이 그림을 언제 그렸는지 알았다.
나는 이날을 사진을 찍은 듯이 세세하게 기억한다. 안씨 학당의 담벼락에 늘어져 있던 장미넝쿨과 붉고 큰 장미 꽃송이들을. 코끝을 맴도는 진한 장미 향기와 팔에 꽂힌 장미가시의 날카로움을. 하지만 그날의 일을 목선후가 그림으로 남길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림 속에서 중문을 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은 누가 봐도 안안용이다.
서사가 있어 보이는 가녀린 뒤태가 시선을 끈다. 그날은 더운 날이어서 머리를 모두 위로 올려서 쪽을 찌고 푸른 비취 방울이 줄줄이 매달린 비녀를 꽂았었다.
가늘고 긴 목덜미에 한두 가닥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둥글고 단정한 어깨선에서 물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린 비단 소맷자락. 여인의 형체를 이루는 가느다란 선 하나하나가 매혹적이다.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1등급이라고 실력만 아까워했는데 그림도 혼자 보기가 미안할 정도다. 그림 속에는 여인 혼자인데 흡사 목선후도 그 옆에 있는 듯 그린 사람의 존재감이 확연하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여인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여인이 저 문을 나가는 게 싫다.
아니, 그건 지나친 해석이야.
그는 내 팔에서 장미가시를 뽑으면서 손끝도 닿지 않으려고 했었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하면 달라지기는 했다.
우리는 키스까지 했으니까.
심장 안쪽이 간질간질하다. 나도 모르게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눈을 감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종이를 얌전히 접어서 논어 제7에 다시 끼웠다.
말순이 술을 가져오자 정오까지 불러서 한 잔씩 마셨다. 내 방으로 돌아올 때 옆구리에 논어 제7을 끼고 왔더니 말순이 갸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시치미를 떼고 빙긋 웃어 주었다.
***
신시가 지난 후 어전시 최종 합격자 3인의 이름이 공고되었다. 장원과 방안은 예상대로였는데 3등인 탐화가 뜻밖의 인물이었다.
“세자빈마마의 사촌 오라비인 장진욱이 탐화가 될 줄이야.”
호부상서의 말에 병부상서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그맣게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 실력이…… 음, 흠.”
세자빈의 오라비인 장진한은 모친상 때문에 이번 과거를 볼 수 없어서 장씨 가문에서는 사촌인 장진욱만 과거시험을 보았다.
올해 어전시 시험관은 삼성 육부의 수장 중에서 호부와 병부, 형부상서가 빠졌다. 이들 집안 청년 중에 몇 명이 응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전시를 치른 열 명의 생원 중 제일 아래가 장진욱임은 모두 알았다.
“전하께서 어인 일이실까요? 누구보다 학문이 깊으니 모르실 리 없는데. 어쩐지 장진욱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지요. 미리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 열 개의 답안지는 왕의 손에서 최종 결정이 났다.
“전하께서 뜻이 있으시겠지요. 일단 조용히 합시다. 요새 전하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십니다. 그거 아십니까? 만수절인데 한 번도 웃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십니까?”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속삭이는 두 사람에게 형부상서가 다가왔다.
“자자, 얘기는 그만하고 정전으로 갑시다. 연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전시 수험생들을 포함한 고위관리들이 정전에 가자 미리 초대된 가족들이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가 반갑게 일어섰다. 장원과 방안보다 탐화의 자리가 제일 떠들썩하고 흥겨웠다. 그럴 수밖에. 가족들도 장진욱이 10등을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잠시 후 세자와 세자빈이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왕과 왕비가 납셨다. 대비마마는 초가을 날씨에 가벼운 풍한이 들어 북행궁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 자리에는 세자빈의 오라비인 장진한도 참석했다. 그는 아버지와 나란히 허리를 굽힌 채 가운데 통로를 절도 있게 걸어오는 세자를 바라보았다. 누이 앞에 서 있는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목선후와 닮았다.
장진한은 맞은편에 서 있는 어사중승 부부를 눈알이 빠질 정도로 주시했다. 안 닮았다. 물론 모든 가족이 닮지는 않는다.
모든 가족이 닮지는 않지만 닮은 사람은 가족이기 쉽다. 더구나 저렇게 생긴 사람은 흔하지 않다.
매끈하고 곧은 콧날과 날렵한 턱선, 희고 깨끗한 피부와 짙은 눈썹. 맑고 큰 눈동자를 감싼 시원한 눈매. 오직 왕실에서만 볼 수 있는 용모였다.
잠시 후 마지막으로 왕이 들어왔을 때 장진한은 확신했다. 목선후는 왕실의 핏줄이다.
전하든, 종친이든, 누구의 피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런 자가 어떻게 왕실과는 거리가 먼 어사중승의 아들이 되어 있을까? 어떻게 된 사연일까?
연회가 끝날 때까지 장진한은 모든 가능성을 타진해 봤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비슷한 소문 부스러기도 들은 기억이 없다.
연회 중에 장진한이 세자빈 옆자리로 다가가자 세자빈이 미소를 띠고 상체를 기울여서 작고 사랑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오라버니, 세자저하를 뵈오니 어떤가요? 오라버니가 말씀하신 그 사람이 닮았나요?”
지금 세자는 왕보다 한 단 아래에 앉아 왕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왕비가 간혹 미소를 지으며 세자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가까이 앉아 있는 왕과 세자를 보자 장진한의 확신은 더 커졌다. 하지만 누이에게는 속내를 감추고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저하의 용준용안(우뚝한 코와 용의 눈)을 누가 닮겠습니까? 제 착각이었습니다.”
“호호호, 그럴 줄 알았어요.”
세자빈이 상아처럼 하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
만수절이 지났다. 상등을 밝혀 환성 시내를 은하수처럼 빛나게 해 준 안씨 상가는 작년 만수절 기간에 비해 두 배의 수익을 얻었다.
가구점의 가구는 윤기가 흘렀고 과자점의 과자들은 더 먹음직스럽고 유기점의 유기들은 눈부시게 반짝였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상가에 오는 이유는 순수하게 물건을 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안씨 상가는 구경하기 위해 들렀다. 고대판 아이 쇼핑 되시겠다.
“언젠가는 모든 상가들이 상등을 다는 날이 오겠지만 당분간은 안씨 상가를 따라오는 가게는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밉지 않게 남편을 흘겼다.
“교만해지면 망하는 건 시간문제라더니. 자화자찬이 심하시네요. 상등은 안용이 생각이었다면서요.”
“누이는 정말 대단해요!”
넷째가 젓가락을 들고 웃었다. 입에서 밥알이 튀어나왔다. 귀여운 녀석. 요새 동생들의 누이 부심은 하늘을 뚫고 있다. 아무도 우리를 무식한 안씨 집안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한다.
“그것뿐이 아니에요, 어머니. 마지막으로 우리 가게에서 구입한 비단으로 옷을 해 입은 집마다 우리 가게를 소개해 달라고 귀찮을 정도로 조른대요. 너무 많이 알려지면 흔해진다고 안 알려 준다던데요. 여자들은 정말 무서워요.”
둘째 안중이도 거들었다.
“민아는 언제까지 우리 학당에 다니는 거예요?”
갑자기 셋째인 안문이 툭 끼어들었다. 오호라, 민아에게 관심이 있구나? 나이도 비슷하고 딱 좋네. 귀여운 안문이의 얼굴을 보며 장난처럼 물었다.
“왜? 그만 다닐까 봐 걱정이야?”
안문이 입을 쭉 내밀었다.
“아니, 안 왔으면 좋겠어. 계집애가 너무 잘해서 열 받는다고.”
아버지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휙 위로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