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말할 수 없는 비밀
한인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름이라 창가에는 대나무 발이 운치 있게 반쯤 내려와 있다. 대나무발 사이로 붉은 석양이 줄기줄기 교실 안으로 비쳤다. 하지만 대나무 발은 소리를 막아 주지 못하니 크게 말하면 창밖에서도 들릴 것이다. 음성을 낮췄다.
“저기 말이야. 혹시 높은 데서 떨어지거나, 어딘가 부딪치거나, 아니면 내가 너를 붙잡았다거나, 뭐, 그런 기억 없어? 아주 조금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럼 높은 건물들이 쭉쭉 서 있다거나 자동차가 쌩쌩 지나간다거나 티브이나 핸드폰이나 뭐, 그런 거 생각 안 나?”
말하다 보니 기분이 정말 묘했다. 내가 얼마나 외딴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지 이런 말들이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를 깨닫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에이, 내친김에 영어도 하자.
“Hey, Insu. Who is on first?”
(야, 인수야, 1루수가 누구야? /유명한 미국의 코미디)”
인수가 특별히 좋아했던 코미디다.
이제 한인수는 걱정스러운 표정이 됐다. 저 애가 드디어 미쳤구나, 하는 눈빛이다. 하긴 얘가 한인수라면 영어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겠구나.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한인수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을 계속했다. 한인수도 김인수처럼 키가 크고 말랐다. 얼굴도 진짜 많이 닮았다.
어쩌면 내가 떨어진 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도 수백 년이 흐른 후에 한인수의 후손 중에 김인수 같은 아이가 태어날지도 모른다.
의사 부부의 외아들로 태어나 엄청 머리 좋은데 반항기 가득한 아이가 돼서 어느 영어 학원 옥상에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살을 막으려는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같이 다른 세계로 빙의하고.
“네가 나에게 한 짓을 좀 봐. 네 부모님께 저지른 불효는 빼고도 나는 무슨 죄니? 너 잘 가르치고, 신경 써 주고 그랬잖아. 나 같은 영어 쌤이 어디 있니? 근데 내 앞에서 뛰어내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응? 너 진짜 쌤 배신한 거야.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니?”
아, 젠장. 말하다 보니 억울해서 눈물이 흐른다.
“내가 그 건물 칠, 팔, 구 층을 곧 사려고 했단 말이야. 대출 좀 많이 받겠지만 어차피 결혼 생각 없으니까 열심히 일해서 갚으려고 했어. 너는 부모님이 두 분 다 의사니까 집 걱정 안 하고 살았겠지만 난 아니야. 나는 아무도 나를 챙겨 줄 사람이 없어. 부모님 계시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아? 나쁜…… 놈.”
마지막에 꼭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나쁜 놈. 알고 보니 나는 김인수를 원망했다. 김인수를 이해하는 척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질투했다. 그런 부모라도 고아보다는 낫다고.
김인수는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거기서 편하게 건물주로 살 작정이었는데 여기서는 언제 죽을지 모르게 됐단 말이야. 훌쩍.”
내 눈물에 놀란 한인수가 유체이탈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안용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내가 잘못했어.”
“그래. 네가 잘못한 거 맞아.”
팽, 코를 풀었다. 왜 꼭 울면 코까지 나오는 건지. 모양 빠지게.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혹시 지난번처럼 아픈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는 이제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한인수가 철저하게 친구처럼 대하니까 나도 김인수를 잊어버리고 한인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너 어렸을 때 많이 아파서 죽을 뻔했잖아. 놀다가 갑자기 이렇게 하면서 숨을 못 쉬고 쓰러졌었어.”
한인수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그렇다면 안안용은 정말 어딘가 아팠구나. 어린 시절에 심장 발작을 일으켰단 말이지?
이건 뭐, 엎친 데 덮친 격이잖아.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걸.
여기서는 어차피 수술도 안 되는데.
하지만 지금 나는 건강하다. 대비마마를 몰래 만나러 갈 때 탔던 작은 마차 안에서만 숨이 막혔었다.
그 외에는 무척추동물 같기는 해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논다. 이 모든 게 세심하고 철저하게 안안용을 돌보는 오 여사님 덕이다.
“아니야. 다 나았어. 이제 괜찮아.”
“다행이다. 조롱박 들고 팔 운동을 한다고 안열이가 말하던데?”
“일전에 안신이가 납치당했을 때 칼 맞을 뻔했거든. 힘을 좀 길러 보려고 해.”
“나는 나중에 들었어. 그때 나도 쓰러졌었어.”
“쓰러져?”
“나도 모르겠어. 정 공자 말로는 내가 이상했대. 말을 잘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는데 다행히 곧 괜찮아졌어. 의원은 내가 잠시 풍 맞은 거 아닌가 하더라.”
풍? 뇌졸중 비슷한 거?
“어떻게 이상했는데?”
“다시 깨어났을 때는 그냥 딴 사람처럼 행동했대.”
딴사람 같았다고? 뭔가 찌르르 감이 왔다. 이거다, 이거.
“그리고?”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더니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했어.”
“얼, 얼마 동안 그랬는데?”
“아주 잠깐이었대.”
이쯤 되면 구십구 프로 확신이 들었다. 내 예상대로 평소에는 한인수였다가 무슨 계기가 되면 김인수가 되는 거였다. 맞아. 이러니까 조금 설명이 되네. 사람이 9층에서 뛰어내렸는데 죽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럼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꼭 나를 불러. 알았지? 약속해. 정 공자에게도 말해 두고.”
“나는 정말 괜찮아, 안용아.”
그게 아닌데 한인수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줄 알고 꽤 감격한 눈치다. 많이 미안해졌다.
보약이라도 지어서 보내야겠다. 한인수든 김인수든 건강해야 되니까.
꽃처럼 타오르던 붉은 석양도 물러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교실은 이제 사뭇 어두워졌다.
“가야겠다. 손수건은 빨아서 줄게.”
“안용아.”
돌아서는 나를 한인수가 슬픈 음성으로 불렀다. 가을날 마지막 남은 잎새처럼 쓸쓸한 음성이라 나도 감정이 가라앉았다.
“와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를 선생으로 써 준 것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내가 마지막에 너를 실망시켰지. 너는 같이 도망가자고 했는데.”
“어, 어.”
사랑의 도피를 하려 했다니 안안용은 몸은 두부같이 연약하지만 사랑에는 참 용감한 여자였다.
“나마저 없으면 우리 집은 정말 희망이 없었어. 같이 도망갈 자신도 없으면서 너와 혼인하겠다고 했으니 사내로서 너무 부끄러웠다. 다시 만나면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한인수는 외롭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진심으로 나 같은 놈은 잊고 잘살기를 바랐는데. 막상 네가 나를 전혀 모르는 척하니 낙심이 되더라. 명필방 앞에서 말이야. 너는 나를 처음 본 사람처럼 행동했지. 심지어 안씨 저택을 아느냐고 물었어. 이렇게까지 나를 지워 버리고 싶었나 싶었어. 물론 다 내 잘못이란 거 백번 인정해.”
“아! 그때는 사람들 눈치가 있어서 그랬어. 나도 미안해.”
한인수와 안안용은 단순히 미안해, 로 끝낼 수 있는 사이는 아니겠지만 나는 없는 감정을 이끌어 낼 수는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한인수는 그냥 동생들의 선생에 불과하다. 언젠가 김인수의 영혼이 깨어날 때까지는 낯선 타인이다.
“저, 너희 상단 배는 두 척 다 돌아올 가능성이 없는 거야?”
“한 척은 아직 몰라. 폭풍을 미리 알고 항로를 변경했으면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리지만 무사히 돌아오겠지.”
폭풍을 미리 알 수 있을까? 이 시대는 인공위성도 없고 배의 속도는 느리다. 바람을 이용해서 대양을 횡단하는 범선이기 때문에 폭풍에 속수무책이라고 들었다.
“노련한 선원들은 예측하기도 한대. 드물긴 하지만. 그래서 아버지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리고 계셔.”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랄게.”
“고맙다. 네 남편은…… 무사한 거지?”
“무, 물론이지. 하필 그 의원 집이 멀어서 말이야. 다리를 다쳐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대.”
“신랑이 거기 있는데 너는 왜 안 가?”
“만수절이 가까워져서 상가 일이 너무 바쁘잖아. 조금이라도 아버지께 힘이 돼 드리려고.”
내가 말하면서도 말이 안 돼서 목소리에 힘이 없지만 한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안용아, 나도 상가 일을 도울 수 있어. 알지?”
한인수는 거대한 한씨 상단의 후계자였으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는 상가 일이 더 익숙하다. 지금까지는 목선후의 눈치를 보느라 학당 구석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목선후가 없는 지금 아버지의 일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은 게 당연했다.
“아버지께 말할게.”
“꼭 돕고 싶어. 그렇다고 네 동생들을 소홀히 하겠다는 건 아니야.”
“알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두 사람은 각자 원하는 것을 얻었다.
한인수는 안안용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나는 김인수와 한인수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먹장구름이 사라진 듯 우리는 개운한 표정이 되었다.
교실을 나오자 문밖에 세 사람이 나란히 서 있다가 정오와 말순이 얼른 양쪽에서 내 팔을 하나씩 잡았다. 떠밀리다시피 학당을 나와서 별당으로 향했다.
“왜 이래? 어머니 돌아오셨니?”
“아니요. 하지만 곧 돌아오실 거예요. 공자님도 안 계시는데 이러시면 안 되잖아요.”
말순은 은근히 나를 힐난했다. 자신이 팽문을 보지 못해서 낙심해 놓고 누구 탓을 하는 거야?
“우리가 막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공자님께서 나중에 아시면 어쩌시려고요.”
정오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얘들아, 그 공자님에게 이런 사소한 문제는 문제랄 수도 없단다.
별당으로 돌아온 나는 한인수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뭔가 단서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니 커다란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인수가 김인수라고 해도 목선후 문제가 남아 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
보고 싶다. 보고 있어도 더 보고 싶은 게 아니라 볼 수 없어서 보고 싶다. 팽나무 아래 무릎을 안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있으면 목선후가 보고 싶었다.
그의 잘생김이 보고 싶은 건지 그가 합법적인 남편이기 때문에 보고 싶은 건지, 숨 막히게 키스를 잘해서 보고 싶은 건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예전처럼 건강한 모습을 보고 싶은 건지도.
어쨌든 그는 안씨 상가 때문에 부상을 당했고, 신분으로 따지면 안씨 집안 전체와 무게를 재도 무게가 더 나갈 사람이니까.
저울대의 반대편에 혼자 앉아 웃고 있는 목선후를 상상하니 보지 않는 게 나은가 싶기도 하다.
내가 궁금해할 때마다 안부자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말한다.
“목 서방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면 소식이 아니라 사약이 내려왔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