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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43화 (43/92)
  • 43화. 목씨로 살겠습니다

    “지금은 말씀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답답하기는. 자네는 이 나라 최고의 의원이야. 그리 자신이 없나? 내 손자가 걷느냐 말일세.”

    “마마, 사는 것이 먼저이옵니다.”

    “그, 그 정도인가?”

    “송구하옵니다.”

    대비마마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귀한 손자가 목숨이 위태롭다니 비통했다. 스무 해나 존재도 몰랐다가 뒤늦게 찾은 탓에 더 애틋하고 아까운 손자다.

    지금까지는 조정의 안정과 왕실의 평화를 위하여 목선후의 일을 이대로 묻어 두었다.

    당사자인 손자도 그럭저럭 잘살고 있는 듯했고.

    잘못 본 거였어. 너무 안일했어. 이 아이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했어.

    세상의 눈에서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어제의 일이 어떻게 왕의 귀에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한밤중에 무석이 와서 왕의 말을 전했다.

    오늘 밤 북행궁으로 밀행을 나올 테니 그동안 잘 부탁드린다, 라고.

    ‘소식을 들으시고 전하께서 크게 상심하셨습니다.’

    ‘나도 그렇다. 나도 가슴이 찢어진다고 전해라.’

    대비의 대답을 듣고 무석이 떠났다.

    지나간 과거는 다 아름답고 놓친 사랑은 무조건 완벽하다. 죽은 선후의 생모에 대한 왕의 사랑은 그래서 한 점 더러운 것이 없다.

    그 여인은 과부였다.

    과부만 아니었어도 후궁의 말석은 차지하게 뒀을 것을.

    위의 두 형이 난잡하고 무능해서 폐위된 후에 세자가 된 셋째 왕자마저 과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게 되면 불안한 왕실에 반역의 깃발을 치켜들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선왕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떠나보낸 첫사랑을 왕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고 그 여인의 아들인 선후도 손에서 놓지 못할 것이다.

    이왕 놓지 못할 바에야 떳떳하게 앞에 내세우면 어떨까? 선후가 공격 받을까 봐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왕 대신 나라도 나서 봐?

    대비가 긴 속눈썹을 드리우고 하얗게 들뜬 입술로 뜨거운 숨을 내쉬는 목선후의 이마를 짚었다. 서서히 열이 내려갔다.

    대비는 오늘 밤 왕과 진지한 논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저렇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본다면 왕 역시 마음이 달라지리라.

    ***

    늦은 밤 북행궁.

    “감히 그 아이를 다치게 하다니! 그놈의 목을 쳐야겠다.”

    북행궁의 긴 복도를 걸어가며 왕이 소리쳤다. 누가 들을지 몰라 그 아이, 그놈이라고밖에 못 하는 자신이 싫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무석이 간청했다. 전하께서 이토록 화가 난 모습은 근래 처음이었다. 하루 종일 아들을 보지 못하고 마음을 졸인 터라 더 심한 듯하다.

    김 상궁이 기다리다가 왕을 약 향이 짙게 풍겨 나오는 내실로 인도했다.

    대비마마의 침실 상방에 목선후가 죽은 듯이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방금 돌아온 장자의 얼굴을 보자 왕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이십 년 전의 묵은 상처가 헤집어지고 피가 새로이 흘렀다. 이 아이마저 어미처럼 보낼 수는 없어.

    “어마마마. 이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나도 그리 생각합니다.”

    이십 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조정은 안정되어 있고 왕권은 든든하다. 못 할 게 뭐야. 이십 년 전의 한을 푸는데 아까울 게 어디 있어.

    왕이 목선후의 손을 잡고 앉았다. 너무나 닮은 두 사람을 보고 대비가 한숨을 쉬었다. 세자보다 더 닮았구나. 더 잘생겼고. 게다가 소년 수재였다지.

    어쩌면 생각보다 더 큰 문제가 될지도 몰라.

    그 순간 무엇인가를 느낀 듯 목선후가 긴 속눈썹을 깜박이더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동자에 초점이 어리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작게 생기다가 사라지는 보조개.

    왕이 응답하듯이 보조개를 지었다.

    “전하…….”

    “전하가 아니라 아비다. 선후야, 감히 너를 이리 만든 안씨 집안을 도륙해야겠다.”

    걱정을 감추고 근엄한 표정으로 목선후를 을렀다. 절반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선후가 잘못되면 안씨 집안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지 마십시오.”

    “나를 막을 방법이 없지는 않다. 네가 왕자가 돼 준다면 참아 보겠다.”

    진심으로 협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시체처럼 누워 있는 아들과 다리를 감싸고 있는 천에 배어 나온 붉은 피를 보자 이성이고 논리고 날아가 버렸다.

    아들은 목선후로 살면서 군문에 투신하거나 조정의 말단관리가 되어 나라에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사내가 아무 하는 일 없이 살 수는 없다면서.

    그런 위험하고 힘든 일에는 나서면서 왜 왕자의 신분은 마다하는지 답답해서 가슴을 치고 싶다.

    “그냥…… 목씨로 살게 해 주십시오.”

    아비 심정도 모르는 불효자 같으니라고!

    “그러냐? 그러면 안씨 집안을 없애도 되는 것이지?”

    붉은 얼굴의 왕이 짙은 눈썹을 치켜떴다.

    ***

    며칠 후.

    오 여사님이 출타하신 틈을 타서 한인수를 만나러 가려고 나섰더니 정오와 말순이 말렸다.

    “아씨, 안 돼요.”

    “왜? 말리지 마.”

    하녀들의 손을 부드럽게 밀고 학당으로 향했다. 그들의 걱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나는 제일 먼저 한인수를 만나 저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로 했다.

    목선후와의 관계와 주변의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있다가는 끔찍한 일이 생길 것 같은 꽤 근거 있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며 살아온 21세기 여성이다. 문제가 생겼는데 막연히 어떻게 되겠지,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사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한인수를 만날 수 있었다. 목선후의 체면을 생각해서 참았다. 당분간 동생들의 학업에 올인하기로 했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있는 한인수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목선후는 치료를 잘 받고 있다는 간단한 연락만 보내 오고 끝이다.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어느 정도 나았는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북행궁이나 왕궁에 가서 내 남편을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형편은 못되니 속만 부글부글 끓고 걱정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시댁에서는 이미 사정을 알고 있는 듯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장양란만 나를 못된 동서, 못된 며느리라고 욕하고 있을 것이다.

    “아씨, 만나시더라도 내일 낮에 만나세요. 지금은 해 질 녘이고 곧 어두워질 거예요.”

    “내일은 어머니가 계시잖아.”

    안씨 집안에서 내가 이길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 없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걱정되면 너희들도 따라와.”

    이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별당을 벗어나 학당으로 향했다.

    학당에 가서 혹시나 하고 교실을 들여다봤더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교실 뒤편의 선생 숙소로 걸어갔다.

    정 공자와 한인수는 대청마루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마루를 사이에 두고 좌우에 커다란 방이 하나씩 있는 일자 형식의 전각이었다.

    “아씨? 어쩐 일이십니까? 도련님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정 공자가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아니에요. 한 공자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

    한인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빛이 스러져가는 오후의 햇살처럼 스산하면서도 날카로웠다.

    그동안 학당 근처로도 안 오더니 무슨 일로 갑자기 왔는지 의심하는 거다. 그럴 만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두 사람은 키스를 하고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는데 같은 집 안에 있으면서도 찾아오지 않았으니 섭섭하고 배신감을 느낄 만했다.

    한인수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한 공자님, 할 얘기가 있어요.”

    한인수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교실로 갑시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호기심과 염려가 가득한 세 사람을 교실 밖에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실 문이 닫히는 것을 막으려 하는 정오의 손을 밀어냈다. 어차피 창문이 좌우로 뚫려 있는 커다란 교실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저리 걱정인지 모르겠다.

    안씨 학당은 현대의 교실처럼 삭막한 공간이 아니다. 창가에는 잘 손질된 분재 화분이 운치 있게 놓여 있고 창 밖에는 푸르고 고아한 소나무가 구불구불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중후한 색깔과 조각이 섬세한 서탁이 일곱 개 각각의 자리를 넓게 차지했다. 자리만 다르지 선생과 학생의 서탁이 크기와 모양이 같았다.

    각 서탁 앞에는 두꺼운 방석이 깔렸는데 하나만 분홍색인걸 보니 거기가 민아의 자리인 모양이다.

    먹과 종이향이 무게 있게 배인 공간에서 우리 둘은 마주 보고 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니?”

    한인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1등급이다.

    경험상 내가 보는 등급은 현재의 능력이거나 가까운 미래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동생들은 등급외니까 현재의 능력이고 민아처럼 글자도 모르는데 5등급은 미래의 능력이다.

    목선후처럼 젊은데 일 등급인 경우는 애매하지만 그가 소년 수재였다니 현재의 능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한인수는 모르겠다. 이 일 등급이 현대의 수능 일 등급을 의미하는지 이 고대 사회의 일 등급을 의미하는지 분간이 안 된다. 짐작은 가지만 확신이 없다.

    지금까지는 현대의 수능 일 등급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김인수라고 생각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김인수는 아직 각성하지 않았다. 언젠가 각성하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리라 생각하고 기다렸다.

    그래서 확인이 필요했다.

    “인수야, 우리가 마지막 만났을 때 일어난 일을 기억해? 지난번에 명필방 앞에서 만났을 때 말고 그 이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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