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걸을 수 있겠나
“그 사람이 누군데?”
“처음 본 사람이래요.”
그래서 정오가 저렇게 놀랐구나. 현대와 달리 여기서는 아무리 급해도 하룻밤 사이에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 이 시대 옷감은 백 프로 수제품이라 왕이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아도 못 한다.
“납품해야 될 비단은 최고급품이라면서? 그런 게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나타난단 말이야?”
“그게요, 아씨. 진짜 신기한 게요. 주고 간 비단은 그보다 더 좋은 거래요. 그래서 웃돈을 받을 수도 있대요. 너무 좋은 비단이라 손님들이 안 살 수 없을 거래요. 그 손님들은 돈이 넘치는 사람들이니까요.”
“우리 가게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일 텐데 누구지?”
아버지 쪽 누군가가 도와줬나? 그때 말순이 급하게 들어왔다.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들썩거리는 걸 보니 급한 내용이다.
“아씨, 아씨. 방금 팽문이 사람을 시켜 소식을 보내왔어요. 공자님께서는, 헉, 헉, 며칠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해서, 그래서 못 돌아오시고요. 치료는 잘 받고 있으니 염려 마시랍니다.”
“사람이 왔다고? 어디 있니? 내가 만나봐야겠다.”
“말만 전하고 가 버렸어요. 소인이 붙잡았는데 뿌리치고요. 아주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지붕 위에서 듣고 있던 그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코웃음을 치면서 기왓장 위에 드러누웠다. 지난밤 주군께서 얼마나 위험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어느 의원인지도 말하지 않았어요. 소인이 물어봐도 못 들은 체하던데요. 무슨 의원이 그리 비밀스러운지 모르겠어요.”
말할 수가 없었겠지. 대비마마의 눈앞에서 어의가 치료하고 있을 테니까.
“어서 식사하시고 포목점에 가 보게요. 정말 기적 같아요. 나리 마님은 이미 가게에 나가 계세요.”
정오가 나를 부축해 침상에서 일으켰다.
“어머니께도 소식 보냈니?”
“그럼요, 점원이 집으로 달려갔어요.”
침상에서 내려오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비틀거렸다.
“아씨, 어디가 안 좋으세요? 아씨까지 아프시면 안 돼요.”
“안 아파. 긴장이 풀려서 그래.”
팽문이 전달한 말만으로는 안심이 안 된다. 그가 정말로 괜찮은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리고요. 나리께서 모든 안씨 상가에 오늘부터 상등을 걸라고 하셨대요. 정말 대단하죠? 이 거리가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안부자의 과감한 결단력은 대기업의 CEO와 비슷하다. 나 같으면 며칠 더 있다가 먼저 포목점을 다시 오픈한 후에 순차적으로 달았을 것이다.
아직도 거리에서는 상등 때문에 불이 났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에 다른 가게에서 또 불이 나면 소문이 진실로 굳어질 테니까.
“커다란 물동이도 다 하나씩 들여놨고요. 그러니 염려 마세요, 아씨.”
민아의 물동이는 스프링클러가 됐구나. 고대라도 있을 건 다 있는 셈이다.
“민아는 오늘 학당에 갔니?”
“네. 조그만 게 얼마나 야무진지요. 제가 포목점에 갔더니 아씨 안부를 먼저 묻고는 학당에 다녀와서 포목점 수리를 돕겠다고 하더라고요. 조그만 여자애가 할 게 뭐가 있다고요.”
그 얘기를 듣자 좋은 생각이 났다. 이 시대는 공급이 딸리기 때문에 가게 안에 물건도 손님 입장이 아니라 점주가 편리하게 진열해 놓는다.
현대의 마트나 백화점의 개념은 아주 아주 먼 훗날 일이다.
미국 최초의 백화점 설립자 스튜어트는 돈보다 고객 중심이라는 이슈로 성공했다. 과연 여기서도 통할까?
우선 포목점을 새로 꾸미는 김에 콘셉트를 좀 바꿔 봐야겠다. 유리가 없어 쇼윈도는 만들지 못하지만 입구에 닻이 되는 상품을 진열해서 눈길을 끄는 방법도 있다.
닻이 되는 상품이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을 멈추게 하는 그 가게의 대표 상품을 말한다. 이번에 타버린 비단이 그런 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말순아, 아침에 어머니가 새 옷을 보내셨다면서 가져와 봐.”
어머니는 아침 일찍 새 옷을 보내면서 오후에는 첫째부터 셋째까지 포목점 일을 돕기 위해 보낸다고 했다. 아버지가 이런 경우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게 하려는 의도다.
“어머니가 일부러 이런 옷을 보내신 거지?”
너무 화사한 진분홍과 진초록 대수포에 여기에 맞는 머리 장식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이 원색의 화려함은 몇 달이 지나도 어색하다. 내가 좋아하는 베이지이나 부드러운 갈색은 여기서는 하인들이 입는 옷 색깔이다.
나는 아침을 먹고 화사한 새 옷을 입고 중문 상가를 돌아다녔다. 경험이 많은 민아 아버지가 다른 안씨 상가를 돌아다니며 차례로 상등을 달았다.
상등이 달리고 촛대에 불을 붙이는 순간 박수가 터져 나왔다.
칙칙하고 암울한 잿빛 세상에 마법처럼 거리 하나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빛은 일시에 모든 시름을 잊게 했다.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등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에 밤하늘의 별처럼 빛이 반사했다.
나 혼자 웃지 않고 있으니 아버지가 다정하게 어깨를 안았다.
“목 서방을 걱정하는 거냐? 괜찮을 거다. 누가 돌보고 있는지 알지 않니?”
“네.”
아버지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비마마 빽이 아무리 좋아도 이 시대 의료수준을 뻔히 아는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곁에서 간병이라도 하게 해 주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상등 때문에 불이 나지 않았다고 말해 주던 그가 자꾸 떠올랐다.
***
어젯밤 목선후의 명을 들은 일선은 북행궁을 빠져나와 목씨 가문의 명현당으로 스며들었고 아침 일찍 포목점에 비단을 두고 오면서 한 마디 던졌다.
“일간 들리지요. 필요한 만큼 쓰시오.”
쓱 돌아서는 자신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은인이라고 붙잡는 점주에게 비밀스러운 미소를 던지며 안개처럼 사라졌다. 어둠의 자식처럼 살다가 처음으로 좋은 역을 맡았다.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해서 안씨 포목점은 20년 동안 지킨 고객과의 신뢰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비단을 직접 본 고객들은 처음에 주문한 비단보다 더 마음에 들었는지 돈은 얼마든지 더 줄 테니 두 필씩 달라고 했지만 부점주는 정중히 거절했다.
품질에 비해서 웃돈도 조금만 더 받으려고 했다. 주인님은 처음 주문한 비단이 아니니 웃돈을 주지 않겠다고 하는 손님에게는 웃돈을 받지 말라고 했지만 다음에 또 구해 주길 바라서인지 대부분 웃돈을 많이 얹어 주었다.
신용이 오히려 더 올라갔다. 처음보다 더 좋은 비단을 가져온 데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원금액에서 삼 할을 더 받은 부점주의 입은 좋아서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어제 화재가 났을 때만 해도 안씨 포목점의 중요 고객들은 모두 등을 돌리고, 위약금도 꽤 물어줘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해결되다니 꿈같아서 저절로 어깨가 으쓱거렸다.
비단 상자를 든 시종 둘을 데리고 중문 상가의 거리로 들어서자 주변 상가의 점주와 점원들이 부점주를 구경 나왔다. 초라한 모습을 보려고 나왔는데 개선장군 같은 모습을 보곤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역시 안씨 상가는 뭐가 달라도 달라.”
“그렇게 재고를 여유 있게 확보하다니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야.”
“나 같으면 바닥을 긁어서라도 다 팔았을 텐데 말이야. 그런 고급 옷감이 이런 명절이 아니면 또 언제 팔리겠냐고?”
“그러니까 자네는 안부자가 아니지.”
“하지만 열에 열 사람은 다 나처럼 생각할걸.”
“맞아. 그래도 상등은 이제 못 달겠구만. 보기 좋았는데 말이야.”
“자네, 포목점 아니라고 그런 소리 하는 거지? 안씨 과자점에 상등을 달면 그런 소리 못할걸?”
“무슨 소리. 우리 과자점의 계피 과자는 안씨네도 사 간다고. 옷감이야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하지만 과자는 맛이 좋아야지 조명이 무슨 상관인가?”
과자점 주인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이 떠올라서였다. 솔직히 저 화려한 상등을 달면 개떡도 맛있어 보일걸.
흠흠, 과자점 점주는 헛기침을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씨 포목점이 위기를 넘긴 사실에 연씨 포목점은 분노했다. 그렇게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완벽하게 실행했는데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했다. 저 열 필의 비단을 주문한 사람은 환성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여인들이다. 그들이 등을 돌린 가게는 살아남기가 어렵다. 서서히 손님이 줄어들어 결국은 가게를 팔게 된다.
만약 오늘 비단을 배달하지 못했더라면 안씨 상가가 그 꼴이 됐을 것을. 아쉽다.
하지만 약간이나마 소득은 있다. 상등 때문에 불이 난 줄 알 테니 이제부터 상등은 달지 않겠지.
상등만 안 달아도 손님들을 빼앗길 이유가 없다.
어제 안씨 포목점에 간 두 여인은 처제와 처제의 딸이었다. 실제로 백 리 밖의 시골에 살고 있다. 화재의 원인이 상등으로 되어 있는 한 아무도 그 두 사람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연씨 포목점의 점주는 처음의 분노가 많이 가라앉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찻잔을 들었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사람들이 또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인님, 주인님. 나와 보세요.”
연씨 포목점의 막내 점원이 다급한 음성으로 점주를 불렀다.
연씨 포목점 점주가 문으로 달려 나가 보니 안씨 포목점 옆 가구점에서 눈부신 빛이 흘러나왔다. 달빛보다 더 밝았다. 해가 뜬 뒤로도 저런 밝은 빛을 뿜는 물건은 상등뿐이다.
미친놈들. 바로 어제 불이 나서 가게 하나를 태워 먹고 또 상등을 달아?
제정신이 아니야.
“주인님, 가구점 옆 유기점에도 달고 있어요! 보세요!”
“시끄럽다. 들어와 일이나 하거라.”
연씨 포목점의 점주가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안씨 상가가 모두 불에 타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지, 뭐.
무슨 일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려운 법. 게다가 그 한 번이 성공했다고 여겨지면 성공 확신 때문에 위험에는 눈을 감는다.
연씨 포목점 점주는 위험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마음속으로 다음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아침 일찍 손자에게 온 대비는 밤을 꼬박 새우고 잠시 쉬려던 의원을 붙들었다. 피곤으로 눈 밑이 축 처진 어의는 새벽에 왕자의 열이 조금 내렸다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열이 남았지만 더 악화되지는 않았으니까.
“새벽녘에야 열이 내렸다고?”
“예, 한고비는 간신히 넘겼습니다만 아직 위험하옵니다. 이틀은 더 지나 봐야 안심하겠습니다.”
“다리, 우리 손자 다리는…… 걸을 수는 있겠나?”
묻는 대비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