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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37화 (37/92)
  • 37화. 실패

    김원장은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상처받기 싫으면 그렇게 살면 안 되지.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노력한 만큼 받는 거라고.

    나는 틀리지 않았다. 누구도 나보고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오직 저놈. 아들이라는 놈. 자식이 둘만 있어도 포기하고 싶은 저 아들놈. 저놈이 문제다. 김 원장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리고 아들의 눈빛을 외면했다.

    그랬는데.

    막상 9층에서 떨어져 온몸이 부서진 아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냥 알았다. 자신이 틀렸음을. 머리로 이해는 안 되지만, 말로 설명할 수도 없지만.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아들이 살아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그래서 비록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지만 자신이 변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인수야, 네 방에서 이거 찾았다. 걸그룹이라며? 좋아했었니? 그래서 얘들 요새 어찌 지내는지 좀 알아봤다.”

    김 원장이 인수의 한 손을 잡고 핸드폰을 들이댔다. 경쾌한 걸그룹의 노랫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한 곡이 끝나자 노래 대신 사진을 보여 주었다.

    “보이니? 얘가 빠져서 이제 다섯 명이래. 완전히 빠진 건 아니고 성대결절이 와서 당분간 쉬어야 한다더라. 너는 이 중에서 누구를 제일 좋아했니? 아빠는 가운데 이 애가 좋아. 네 엄마 젊었을 때와 비슷해.”

    “그 가수가 들으면 기분 나빠 해.”

    그때 아내인 닥터 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아내는 인수에게 시간을 내기 위해서 대학병원에서 작은 안과 병원으로 이직했다.

    “초밥 사 왔어.”

    두 사람은 간이 테이블을 펴서 초밥 상자를 늘어놓았다. 코로 연결된 호스로 영양을 공급받는 인수를 보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무슨 맛인지 모르고 밥알을 씹고 장국을 마신다. 누워 있는 아들 앞에서는 맛을 느끼는 것도 죄스럽다.

    “오늘은 내가 여기서 잘게. 자기가 집에 들어가서 자.”

    아내의 말에 남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두 시간만 인수에게 얘기해 주고 가. 그동안 친구랑 한잔하고 올게.”

    “많이 마시지 마.”

    “맥주 한 잔만 마실 거야.”

    당직 의사가 있지만 인수에게 또다시 심정지가 올까 봐 늘 긴장하며 사는 김 원장이다. 남편이 나간 후 아내는 잘생긴 아들의 얼굴을 닦아주고 머리도 빗어 주었다.

    그리고 아들이 찜해 놓은 영화를 티브이에 띄우고 같이 감상하기 시작했다.

    ‘SF? 다른 건 안 되겠니?’

    ‘제가 좋아하는 거 본다면서요.’

    ‘알았다. 알았어. 그냥 같이 보자.’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며 아들의 손을 잡았다. 내 목적은 영화가 아니라 아들과 같이 있는 거야.

    늘 무엇인가 일다운 일에 몰두하고 일 분 일 초도 아끼며 살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 아들과 함께 있는 일임을 몰랐다.

    이 낭비적인 순간이야말로 정말 필요한 시간이었는데.

    ‘인수야, 사랑은 낭비적인 거구나, 그렇지? 그럼 오늘 엄마는 너를 위해서 내 시간을 낭비할게. 내 영화 취향도 낭비하고.’

    ‘내가 깨어날 때까지?’

    ‘응. 아무리 오래 걸려도.’

    아들의 손등에 엄마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티브이에서는 광활한 우주에서 공중전이 벌어졌다. 일인용 우주선을 탄 주인공이 상대편 우주선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기관총을 쏘아댔다. 상대편은 뒤돌아보면서 피하고.

    ‘인수야, 저게 말이 돼? 저렇게 소형 전투 우주선이 날아다닐 때는 첨단 기계가 알아서 총을 쏠 거거든. 빈약한 사람 눈으로 보고 쏘는 게 아니라. 엄마가 안과 의사야.’

    ‘엄마, 그렇게 따지면 영화를 어떻게 봐. 이왕 낭비한 김에 엄마의 논리도 낭비해 봐.’

    그런 거야? 닥터 조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입을 벌렸다. 갑자기 아무런 의미가 없던 CG 범벅의 우주 판타지 영화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

    집에 도착해서 목선후와 헤어져 내 방에 돌아와 씻고 간식을 좀 먹고 침상에 누웠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 모양이구나? 어디 가셨니?”

    “나리는 중문 상가에 가셨어요. 오늘 정산하는 날이잖아요.”

    안부자는 업무 보고를 받고 정산을 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 중문 상가를 직접 방문했다. 월중에는 가게의 점주나 부점주가 안부자를 만나러 집으로 찾아왔다.

    “하루에 끝나시려나?”

    문제가 없으면 하루에 끝나기도 하지만 보통은 이틀, 길면 사나흘이 걸렸다. 그동안 안부자는 중문에 있는 객잔에서 잠을 자면서 점주들과 논의를 했다.

    “왜 가까운 데 집을 두고 객잔에서 주무시지?”

    내 질문에 정오가 복숭아를 깎으며 종알거렸다.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주려고요. 아무나 안씨 집 대문을 넘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평소에는 나리를 만나기가 진짜 진짜 어렵대요.”

    그런 아버지가 안안용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니 내가 제대로 크는 게 어려웠겠어. 다행히 안부자는 아들들에게는 엄하다.

    지난번 가출했을 때 안신이는 어머니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안부자에게 맞아서 다리가 부러질 뻔했다. 다음에 안신이가 또 가출을 한다면 아예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저녁에는 어머니랑 식사해야겠다.”

    “공자님께서는 혼자 드시게요?”

    “응. 아버지가 안 계시니 나라도 어머니랑 같이 먹어야지.”

    진실은 목선후와 마주 보며 밥을 먹을 용기가 없어서다.

    “공자님 저녁 식사를 특별히 신경 쓰라고 해. 옻은 절대 안 된다고 다시 말하고.”

    “네.”

    경쾌하게 대답을 한 정오가 나가고 나는 어머니가 계시는 안채로 향했다.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이 잘 정돈된 뜰과 오솔길을 비추었다.

    안채의 중문에 도착했을 때 한 하인이 뛰어오더니 나를 보고 우뚝 멈췄다.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아씨! 마님께 급하게 전할 말씀이 있어서.”

    “어? 그럼 가 보게.”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하인은 나를 지나쳐서 마당을 가로질러 방문 앞으로 뛰어갔다. 뒤이어 말순이 뛰어 들어왔다. 말순은 약간 까무잡잡한 얼굴인데 얼마나 놀랐는지 하얗게 탈색이 됐다.

    “아씨, 큰일 났어요. 포목점에 불이 났대요! 상등에서 옮겨붙었나 봐요. 어떡해요.”

    “뭐?”

    포목점은 다른 어떤 장소보다 타기 쉬운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안씨 상가는 대부분 고급품만 취급하기 때문에 포목점에도 시중에서 파는 옷감 중에서도 최고급 비단만 쌓여 있었다.

    화재의 위험이 크다고 했었는데 내가 우겨서 상등을 달았다.

    정말로 상등에서 불이 붙은 거야? 화재보험도 없는 시대라 가게에 불이 나면 끝이다. 그동안 매출이 많이 올랐다고 하지만 화재로 인한 손해와 비교가 안 된다. 인명피해도 있을 수 있다.

    민아도 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이미 돌아가 있을 텐데.

    “연기가 멀리서도 보일 정도래요. 어떡해요, 아씨.”

    “공자님께 달려가서 포목점에 같이 가자고 해. 어서.”

    “아씨, 아씨께서 가신들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괜히 아씨 몸만 상하실 거예요.”

    “잔말 말고 어서 뛰어가. 바로 대문으로 오시라고 해. 나는 어머니께 가 볼게.”

    어머니의 방 앞에 서자 평소와 다름없이 화려하고 우아한 차림으로 방에서 나오는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 어떡해요.”

    어머니는 내 모습을 힐끔 보고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옷고름이 느슨해졌구나. 이제 너도 한 남자의 아내니 몸가짐을 조심하지 않으면 남편에게 누가 된다.”

    내 옷고름을 다시 매는 어머니의 손끝이 떨렸다. 내색하지는 않으시지만 충격을 받으신 거다.

    안씨 상가는 거리 한편에 나란히 붙어 있다. 만약 불이 포목점에서 옆 가게로 옮겨붙으면?

    옆 가게가 뭐였더라? 가구점!

    미쳐.

    ***

    어머니와 내가 마차를 타기 위해 대문으로 가고 있을 때 하인이 달려왔다.

    “공자님과 도련님들은 말을 타고 먼저 가셨습니다. 힘을 쓸 수 있는 하인들도 뒤따라갔고요. 공자님께서 마님과 아씨는 오지 않으시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됐네.”

    나는 하인을 물리고 어머니와 함께 마차를 탔다. 안씨네 마차는 크고 편해서 평소에는 답답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숨이 막혔다. 휘장을 걷으니 희미하게 낯선 바람이 코로 스며들었다.

    “어떡해요, 어머니. 여기까지 연기가 나요.”

    어머니는 침착하게 내 손을 두드리더니 언제 들고 탔는지 작은 찬합에서 말린 과일을 한 조각 꺼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네가 놀라서 쓰러지면 더 큰일이다.”

    “예? 제가 왜 쓰러져요?”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차분하게 가자는 말이다.”

    어머니도 긴장했는지 말을 아꼈다. 여기서 상등을 단 내 잘못이라고 주절거리면 어머니 마음만 더 어지럽게 할 것이다. 내 자책은 내가 안고 가자.

    119에 불났다고 전화하면 전문장비를 가지고 능력 있는 소방대원들이 달려오는 나라는 어디 갔나. 그런 세상에서 왔다는 게 이제는 꿈만 같다.

    징징거림을 멈추자 저절로 어머니와 비슷한 표정이 됐다. 내가 진정하자 어머니가 편하게 마차 벽에 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네 할아버지는 작은 가게의 점원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세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단다. 그러다 운이 좋게 할아버지의 성실함을 알아본 한 상인의 도움으로 손님이 없어 망해 가는 가게의 임시 점주가 됐지. 할아버지가 맡은 뒤로 가게는 번창했고 상인은 그 가게를 할아버지에게 팔았다. 땅 한 뙈기도 없는 가난한 청년이 가게의 주인이 된 거지.”

    마차 휘장이 바람에 날리자 무엇인가 타는 냄새는 좀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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