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대체 누구예요?
한 번 더 절을 하고 물러 나올 때까지 줄곧 바닥만 응시했다. 내 얼굴 가죽을 내가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건 나 같은 소시민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안씨 가문의 중문 상가 스무 개가 사라지면 부유함은 사라지겠지만 목숨은 보존할 수 있다.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다섯 동생들의 목숨도 안전하다.
좀 힘들겠지만 세상이 원래 그런 거니까 뭐,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달리 방법이 없으면 여기서 학당을 열어 다시 한번 건물주가 되는 꿈도 꿀 수 있다. 그러니까 최악이 온대도 그다지 절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나 이건 아니지. 이건 밑이 안 보인다. 내가 목숨을 걸고 노력해도 안 되고 안씨 가문과 목씨 가문이 합해서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다.
내가 알기로 이 나라 왕실은 퍼펙트하게 건재하다. 얼마 전에 세자빈의 오라비라는 자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생생하게 체험하지 않았던가? 그 굴욕적인 장면이 떠오르자 혼란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마중물은 개뿔. 오늘 나는 비단 보따리 대신 시한폭탄을 받아 왔다.
자신이 한심해서 어깨가 축 늘어졌다.
***
마차에 앉자마자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확 빼서 옆에 앉은 목선후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반지가 조금 커서 잘 빠졌다. 묵직한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지자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되돌아왔다.
옆에 앉은 목선후의 표정은 올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조금 숙연한 표정이 그를 더 우아하고 세련되게 만들었지만 오늘은 눈에 안 들어왔다.
목선후, 둘도 말고 딱 한 가지만 묻자. 주제를 드러내는 키워드. 딱 한 단어면 돼.
“공자님은 대체 누구예요?”
마차가 울퉁불퉁한 길을 가는지 우리의 상체가 흔들려서 내 질문도 퉁퉁거리며 그의 코앞으로 굴러갔다.
마차는 어둡고 좁았다. 지난번에는 휘황찬란한 보석 때문에 세로토닌이 흘러나와서 숨막힘을 견디게 했지만 지금은 보석 대신 독사과를 한입 삼킨 상태다.
솔직히 말해 줄 줄 알았다.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운명공동체 아닌가. 때로 사랑보다 운명이 더 끈끈하고 질긴 법이고.
목선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미안하오. 대답할 수 없소.”
그냥 거절도 아니고 일만 분의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는 사실 때문에 진정하려던 내 감정은 다시 뜨거워졌다. 그동안 얌전히 뒤집어쓰고 있던 안안용의 껍질을 벗어 버렸다. 짜증과 분노를 표출했다.
“왜요? 내가 말하고 다닐까 봐서요?”
“그대는 모르는 게 낫기 때문이오.”
나를 바보 멍충이 안안용으로 생각하는구나. 좋아한다고 고백해 놓고 중요한 비밀에는 접근 금지란 말인가?
“이미 나를 끌어들였잖아요. 내가 알든 모르든 여기에 대한 책임은 같이 지는 거 아닌가요? 나를 좋아한다면서요. 내가 첫 번째라면서요.”
“안용…….”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으면 지금 마차에서 뛰어내릴 거예요.”
아, 이래서 자동차가 멈추지 말아야 할 장소에서 멈추고 조수석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오는 거구나. 내가 운전하는 십 년 동안 그런 사람을 딱 두 번 봤다. 주로 한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였다. 그 사람들은 분명 부부나 연인이었을 거야.
“안 돼. 얌전히 있으시오.”
평소보다 낮고 단호한 목선후의 음성이 내 분노에 불을 붙였다.
“되나 안 되나 두고 보죠.”
휘장을 젖히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커다란 손이 내 양어깨를 억세게 잡아서 돌렸다. 아이고, 이놈의 두부살.
속절없이 목선후의 품으로 들어가는 상체를 비틀어 최소한의 간격을 벌렸다.
그러느라 숨이 가빠서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안안용의 폐는 탁구공인 게 분명하다. 조금 흥분했더니 탁구공이 깨지려 했다.
“목선후, 숨, 숨이 안 쉬어져.”
고통스럽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는 생각에 그를 이름으로 부른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현대의 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괜찮아, 괜찮으니 숨을 쉬어.”
목선후가 나를 가슴에 안고 등을 문질렀다. 소용없었다. 헉, 헉. 숨이 목구멍 끝까지 찼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때 목선후가 얼굴을 내려서 내 입에 숨을 불어넣었다. 고대판 인공호흡?
일단 숨을 삼킨 후 뱉으려 하자 입술을 뗀 목선후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눈빛을 보자 날숨이 뱉어졌다.
다시 부드러운 입맞춤을 하며 숨을 불어넣고 또 눈을 들여다보고. 숨을 불어넣고 눈을 들여다보고.
등급을 감싸는 황금 고리는 찬란하게 빛나서 사방에 빛을 뿌려댔다. 그 신기한 모습을 보자니 신선한 바람이 코로 들어오는 것처럼 상쾌해졌다.
천천히 내 숨이 잦아들자 목선후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깊은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부서질 듯이 강하게 내 상체를 당겨 안으며 눈을 감고 말캉한 혀로 내 입술과 혀와 입안의 살들을 적시고 어루만졌다. 목선후의 긴 속눈썹과 곧은 코가 내 뺨을 짓눌렀다. 저돌적이고 노련한 키스에 내 뇌 안쪽에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숨이 막혔다. 숨이 막혀서 얼굴을 좌우로 흔들자 목선후의 입술이 뺨을 지나서 짓궂게 귓불을 씹었다.
아으, 가려워.
내 목이 저절로 뒤로 젖혀지고 드러난 쇄골에 목선후의 키스가 이어졌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구름 속에 둥둥 떠 가는 감각만 남았다.
이건 뭐지? 너무 좋잖아?
“목선후.”
“…….”
“목선후!”
쪽. 쇄골 아래 가슴에서 입술을 떼는 소리가 났다.
“음?”
“멈추지 마.”
내 가슴골에서 큭큭큭 억눌린 웃음소리가 났다.
안안용, 미쳤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당연히 제정신이 아니니까 하지.
용포를 본 순간부터 내 정신은 우주로 날아갔어. 나를 누르던 중력이 사라졌다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차가 섰다. 자갈길을 구르는 마차 바퀴의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사라지자 쪽쪽 하는 입맞춤 소리가 너무 크게 났다.
민망해서 얼굴을 남자의 목에 묻었다. 부끄러워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혀를 씹으며 자문자답했다.
21세기도 아닌데 이렇게 욕망에 휩쓸리면 뒷감당을 어떻게 할 거야?
현대에서도 이런 말은 안 했잖아.
그거야 현대에서도 이렇게 키스를 잘하는 남자는 못 만났으니까. 진짜 시간과 장소와 시대마저 잊게 만드는 키스였어.
잠깐, 이 남자 왜 이리 키스를 잘하는 거야? 경험이 많은 거야?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있었던 거야?
나이를 따져 볼 때 아무리 많아도 너보단 적겠지. 양심이 좀 있어라.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것에 지친 나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었다. 눈앞에 매끈한 턱과 약간 부푼 입술이 보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도, 도착했는데 왜, 왜 팽문이 우리를 부르지 않죠?”
마부석에 팽문이 있었지.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리 때문에 팽문은 아무것도 못 들었을 거야. 그랬을 거야. 그래야 돼.
“어떻게 부르겠소?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알 텐데.”
고대 사람들은 하인에 익숙할지 몰라도 나는 정말 이럴 때는 부끄러워 미치겠다. 평소에 냉정하고 근엄해 보이는 목선후도 고대의 귀족 남자라 하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목선후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문질렀다.
“이제야 부끄러운 거요? 내 이름을 막 부르면서 입을, 읍!”
두 손바닥을 겹쳐서 목선후의 입을 막고 눈알을 부라렸다.
“난 숨 막혀 죽을 뻔했어요. 무슨 정신이 있었겠어요? 진짜 죽을 뻔했다고요. 다시는 이 마차 안 탈 거예요. 다시는 그분도 안 만날 거고요. 다시는 나한테 가자고 하지 마요. 알았어요?”
“안용.”
“무서워 죽겠어요. 정말이에요.”
목선후가 조금 과장스럽게 나를 안고 등을 두드렸다.
“괜찮소. 괜찮아. 내가 말했잖소.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해 주겠다고.”
“정말이죠?”
“저런, 나는 죽어도 좋으니 그대는 살겠다는 말이오? 과부는 싫다더니?”
굳이 네가 죽어야 한다면 따라 죽고 싶지는 않아. 정상적인 현대인은 다 그래.
과부가 되면 본격적으로 명문 학당을 세워서 삼등급 이상 강사들을 고용하고 칠 등급 이상 학생만 받아서 단번에 이 나라 최고의 학당으로 만들 거야.
향시 합격률 90프로 이상이 된다고 생각해 봐. 꿈의 학당 아니겠어?
마차에서 내릴 즈음에 나는 꿈의 학당 생각으로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내 피에는 수능 명강사의 DNA가 들어 있다.
***
“마마, 아씨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김 상궁의 말에 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후가 제 아비를 닮아서 입이 무거워.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겠지. 그러니 그 애가 얼마나 놀랐겠나.”
“그렇사옵니다.”
“손이 참 시원하구나. 지난번보다 더 시원해.”
나이를 먹으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엄청난 일을 벌이고는 어린애처럼 아씨가 주물러 댄 자신의 손을 보며 웃고 있다. 김 상궁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대비마마에게는 정확히 말하지 못했지만 아씨의 표정이 정말 안 좋았다. 마차에 탈 때는 사신이라도 만난 듯 파랗게 질린 눈빛이었다.
두 분이 집에 돌아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김 상궁은 걱정스러웠다.
***
김 원장은 마지막 회진이 끝난 후 오 층 병실에 있는 아들에게 들렀다. 오 층에는 일인실이 네 개 있는데 김 원장은 그중 하나를 자신의 침실로 꾸몄다.
바로 아들의 병실 옆방이라 아들에게 사소한 변화만 있어도 알 수 있도록.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아내가 말했지만 그는 아내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다.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힌 아픈 기억.
그날. 아들이 뛰어내린 날, 김 원장이 인수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너 같은 건 이 세상에 필요 없어.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렷!’
꼭 그날만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꼭 그날만 때린 것도 아니었고. 늘 자신의 감정에 푹 빠져서 눈앞에 있는 아들의 표정이나 감정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화가 풀릴 때까지 폭언을 한 후에 아들 방의 문을 거칠게 열고 나왔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날은 아들의 표정이 보였다. 눈빛이 읽혀졌다. 상처받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