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닭발을 가진 뱀장어
“시원한 것이니 마셔라.”
삼 등급 노부인의 태도는 지난번과 달리 훨씬 인간미가 느껴졌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지난번에는 마셔라, 한 단어였다. 나는 노부인이 준 커다란 금반지가 잘 보이게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꿇어앉았다.
시중드는 여자가 얼음이 둥둥 띄워진 식혜를 각각 쟁반에 담아 한 대접씩 건네주었다. 목선후가 스스럼없이 마시는 모습을 보고 나도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한두 모금만 우아하게 마시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얼음조각만 남아서 달그락거렸다. 목선후의 그릇에는 삼 분의 이나 남아 있는데. 한 번 달고 시원한 맛을 느끼자 그동안 참아왔던 욕구가 기어 나와서 나도 모르게 대접 바닥에 남은 얼음을 주시했다.
얼음 조각을 입안에 물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노부인이 나에게 말했다.
“안마를 잘하더구나. 해 줄 테냐?”
“네.”
나는 최근에 조롱박을 양손에 들고 근력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손가락 힘이 조금 세졌다. 그래서 지난번보다는 덜 세게 주물렀다.
내가 안마를 하는 동안 목선후는 우아하게 앉아서 가끔 식혜를 한 모금 넘겼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수채화가 되는 남자는 노부인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고요 속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꽤 오래 안마를 해서 손가락이 뻣뻣해졌다. 나는 이 안마의 대가로 받게 될 비단 보따리의 크기를 짐작하느라 입꼬리가 저절로 위로 올라갔다.
우리 할머니는 신체 접촉을 좋아했다. 늙으니 아무도 자신의 몸을 만져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다.
손을 잡고 길을 걷거나 소파에 앉아서 어깨를 기대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사소한 일상의 접촉이 없어서 쓸쓸하다고 내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에 나는 할머니들을 만나면 우리 할머니가 아니어도 손을 뻗어서 만졌다. 귀밑머리도 넘겨 주고 손등에 투둘투둘한 핏줄도 쓸어 주고 어깨와 골반이 붙게 나란히 앉아 티브이도 보고 종알종알 사소한 이야기도 했다.
할머니 생각이 난 나는 어깨에서 팔로 안마를 옮겼다. 그러다 손까지 만지게 됐다.
화려한 반지가 눈부시게 빛나는 노부인의 손은 나이에 비해서 젊었지만 그래도 파란 핏줄이 드러났다. 손톱은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고 피부는 매끈했다.
손을 뒤집어 손바닥도 꾹꾹 눌러 주고 손가락 사이도 시원하게 벌려 주었다. 내 장점이자 단점은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는 김에 발마사지도 해 주고 싶은데 눈을 들자 목선후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흠흠.”
목선후의 헛기침에 정신을 차리고 노부인의 손을 얌전히 놓아주었다. 내 손바닥이 미끈미끈했다.
“되었다.”
나는 다시 목선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것을 이리로 가져오너라.”
삼 등급 노부인의 언어에는 빠진 것이 많았다. 주어나 목적어 또는 호칭 같은 것. 그래도 시중드는 여인은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척척 알아서 시행한다.
여인이 비단보따리를 가져오더니 내 앞에 놓고 보따리를 풀었다. 패물이라고 하기에는 부피감이 좀 크네. 얼마나 좋은 것을 주시려고. 기대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드러난 것은 잔뜩 수가 놓여 있는 붉고 화려한 겉옷. 얌전히 접혀 있는 윗부분만 보고도 목선후의 음성이 높아졌다.
“할머니, 안 됩니다.”
“내 앞에서만 입어다오. 한 번만. 이 늙은이의 소원이다.”
갑자기 연약한 척하는 삼 등급 노부인의 변화에 어리둥절해졌다. 아무리 봐도 유언을 할 만큼 늙거나 연약해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최근에 가슴 통증이 심해지셨습니다. 며칠 전에 쓰러질 뻔하셨습니다.”
시중드는 여인이 잔잔하게 설명했다. 이 여인은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이렇게 차분하고 우아하게 말하겠지.
“얼마나 심하셨습니까?”
목선후의 음성이 떨렸다. 눈앞의 노부인이 아무리 건강해 보여도 이 시대 평균 수명을 따져볼 때 언제든 죽음을 대비해야 하는 나이다. 할머니라고 부를 정도이니 노부인과 목선후는 매우 가까운 사이다. 목선후의 날렵한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은 괜찮다. 그러니 내가 죽기 전에 한 번만 보고 싶구나.”
자신의 죽음을 미끼로 강요하는 노부인의 간교함이 밉지 않은 것은 그 눈에 담긴 진심 때문이다. 정말로 보고 싶은 거다. 무슨 옷인지는 몰라도 입어 드리지, 뭐.
나와는 달리 목선후는 요구를 철회해 달라는 듯이 최후의 최후까지 할머니의 눈을 응시하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리로 오시옵소서.”
옆방으로 안내된 우리는 여인의 도움을 받으며 붉은 옷을 입었다. 목선후가 먼저 입었는데 다 입기도 전에 내 동공이 떨렸다.
이, 이것은…… 용포?
말도 안 돼!
목선후가 왜 그렇게 머뭇거렸는지, 긴 속눈썹이 떨렸는지 알았다.
영어를 공부하고 가르치다 보면 서양문화와 역사에 친근해지고 아는 것이 많아진다. 그래서 내가 동양에 살지만 동양의 고대 문화나 복식보다는 서양의 복식에 더 친숙하다.
동양의 복장은 사극 드라마에서 봤던 복장이 전부다. 참 내 민족의 조상에 무심한 벌을 여기서 받나 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인상 깊어서 기억하고 있다. 왕족이나 황족의 옷에는 용을 수놓는데 신분에 따라 용의 발톱 수가 다르다. 용포의 색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르지만 대개 황금색이나 붉은색이 용포의 색이다.
서양의 황족은 주로 붉은색과 남색, 그리고 보라색을 입었는데 보라색을 택한 이유는 보라색 염색이 비쌌기 때문이다. 황제가 보라색을 입었으니 평민은 보라색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양은 복색의 색과 디자인으로 신분을 구분했다.
목선후가 용포를 입는 모습을 보면서 되도록 발톱은 세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세고 말았다. 다섯 개의 발톱. 세상에!
정신 차려. 지금 드라마를 찍는 게 아니야. 이건 리얼 시추에이션이라고.
아! 차라리 거짓말이거나 꿈이라고 해 줘!?
저 발톱은 용의 발톱이 아니라 닭의 발톱인데 내가 잘못 본 거라고 해줘. 좀 몸통이 긴 닭도 있을 수 있잖아. 관상용 닭. 아니면 닭으로 진화되는 과정에 있는 뱀장어일 거야.
게다가 원래 용이란 상상의 동물이야. 내가 용이라고 생각한 동물은 여기서는 아무나 옷에 수놓을 수 있는 닭 같은 동물일지도 몰라. 아니면 독수리든지. 뭐라도 괜찮아. 저 용이 그 용만 아니면 돼.
목선후가 다 입자 여인은 내가 옷을 입도록 도왔는데 붉은색에 황금 실로 온갖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옷으로 누가 봐도 목선후가 입은 옷과 짝이 맞는, 아내가 입을 법한 옷이었다.
닭발을 가진 뱀장어 대신 꽃 같은 무늬가 많았다.
“공, 공자님.”
소매가 길어 손가락이 나오지 않아서 옷 위로 목선후의 소매를 잡았다. 허리에 옥대까지 맨 목선후는 머리에 검은색 관모를 썼는데 구슬이 주렁주렁 달렸다거나 익선관처럼 보이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세상 잘생김에 초월적인 권위까지 덧입혀지자 솔직히 눈이 부셨다.
안안용,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저건 마녀가 내민 독이 든 사과라고.
“저,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잠시만 참아요.”
내 떨림이 전해졌는지 목선후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이게 잠시만 참으면 되는 일이야? 이 상황에서 그런 말밖에 못 해?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려는데 시중들던 여인이 나를 목선후 뒤에 서게 했다.
여인이 문을 열자 목선후가 먼저 노부인 앞에 서고 내가 뒤이어 그 옆에 가서 섰다. 그리고 나란히 절을 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목선후를 따라서 절을 했다. 붉은 옷을 입은 뒤부터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서자 노부인의 눈에 습기가 어리더니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음 봤을 때의 엄격함은 완전히 사라지고 우리 할머니와 다름없이 손자를 대견해하는 표정이다.
할머니에게 한 식견이 있는 나는 일단 이해와 배려의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
떨리는 음성에 우리는 둘 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목선후의 생각은 모르겠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못 했다. 뒤통수를 한 대 꽝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라 세상이 다 어지럽고 무서워졌다.
나는 적응력이 꽤 좋은 사람이다. 고아가 되어 기댈 곳 없어지면 살기 위해서라도 유연해진다. 그런데도 너무 충격이 컸던지 비단 치마 속에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노부인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었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바탕 패션쇼를 한 후에 다시 옆방에 와서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비단보따리에 대한 기대는 이제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줘도 사양해야 할지도 모른다.
벗은 옷을 조심스럽게 접는 여인에게 목선후가 물었다.
“어찌 된 일이오?”
질문의 순서가 많이 늦지 않았니? 입기 전에 물었어야지.
“선왕 전하와 대비마마께서 입으셨던 옷입니다. 낡은 용포는 때가 되면 태우는데 마마께서 태우기 전에…….”
대비마마가 자신과 남편이 입었던 옷을 태우기 전에 우리에게 입혀 본 것이다. 그 용이 그 용이 맞았다. 그렇다면 발톱 다섯 개의 의미도 맞겠지.
“이 일은 없었던 일이오. 알겠소? 그리고 어서 태우시오.”
“오늘 이 절에서 제를 지내고 태울 예정이옵니다. 심려 마시옵소서.”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여인이 하는 극존칭이 내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옷을 다 태우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꿀렁꿀렁 올라왔다.
과학수사대가 와도 증거를 못 찾도록 까맣게 탄 재까지 시냇물에 흘려보내야 마음이 놓일 텐데.
내 옷으로 다시 갈아입고 삼 등급 대비마마에게 돌아왔다. 이분이 어떻게 삼 등급인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노부인이 누군지 알고 나자 앞에 서기가 더 어려워서 고개도 못 들었다. 대기업 CEO나 대통령 앞에서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나를 회사에서 자르는 게 전부지만 대비마마와 왕실은 나와 안씨 집안 전체를 자를 수 있다. 직장이 아니라 목을.
그런 대비마마를 안마하고, 대비마마와 식혜를 마시고, 대비마마가 준 금반지를 낀 내 무지함이 불쌍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