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데스노트가 아니라 우연이다
세자빈의 배는 겉으로 표 날 만큼 부르지는 않았지만 부축을 받으며 조심히 걷는 모습이 막달이나 된 듯했다.
“오라버니, 어서 오세요.”
“마마, 제가 들어가서 뵙겠다는데 왜 이리 나오십니까? 햇빛이 따갑습니다.”
“괜찮습니다.”
시녀의 손을 잡고 연못가의 정자 안으로 들어온 세자빈이 장진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자신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은 아버지와 오라버니뿐이다. 밑에 이복동생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제 탈상까지 몇 달 안 남았네요. 오라버니가 조정에 들어오셔야 제가 안심이 됩니다. 이 아기씨가 아들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세자보다 한 살 많은 세자빈은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에 몸집이 작고 귀여웠다. 하지만 마냥 귀여워 보이는 누이의 심계가 우물처럼 깊음은 오라비인 장진한이 제일 잘 안다.
저 가녀리고 청초한 모습 뒤에는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탐욕과 열정이 있다. 이것은 장씨 집안이라면 누구나 내려 받은 성격이라서 장진한은 누이의 표정만 봐도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대략 짐작했다.
모친 삼년상이 끝나 장진한이 조정에 복귀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는 세자에게 최근에 총애하는 후궁이 생겼기 때문이다.
세자빈 외에는 관심이 없던 세자가 갑자기 언제 어떻게 봤는지 오 품 관리의 딸인 임씨 소저를 보고는 승휘라는 첩지를 내리고 세자궁으로 들였다.
관례적으로 세자빈은 회임 중에는 동침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세자에게 독수공방을 강요할 수 없으니 후궁을 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세자빈 장씨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이 어미를 위해서라도 아기씨는 반드시 아들이어야 한다.
누이의 표정을 본 장진한이 부드럽게 위로했다.
“아기씨는 아드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마음을 편하게 하세요.”
“그건 그렇고, 무슨 말씀이세요? 세자 저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봤다는 게?”
“얼마 전에 어사중승의 둘째 아들 목선후란 자를 우연히 봤습니다. 누구랑 닮은 듯한데 누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나는 겁니다. 그러다 세자 시강원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를 보고 떠올랐습니다.”
세자의 장인은 세자 시강원의 선생 중 한 명이다. 자신의 외동딸이 세자빈이 되자 외척이 득세하면 좋지 않다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세자의 곁은 떠나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를 보니 세자가 떠올랐고 희미했던 기억이 제자리를 찾은 듯 확실해졌다.
“오라버니도 참. 세자 저하께서 좀 잘 나셨습니까? 잘난 사람은 모두 세자 저하를 닮았다고 한답니다. 그 일 때문에 이렇게 급히 오셨습니까?”
세자빈이 호호호 웃자 장진한은 머쓱해졌다. 누이동생의 말이 맞았다. 왕실 사내들의 인물들이 워낙 좋아서 잘생긴 사내는 다 황실 사내와 비교가 되곤 했다.
“오라버니는 세자 저하를 직접 뵌 적이 두 번인가? 그렇죠? 그러니 더 헷갈리시는 거랍니다.”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회임한 누이동생에게 쓸데없는 근심거리를 안겨 줄 필요는 없다. 자신은 세자 저하를 두 번 봤지만 아버지는 사흘에 한 번은 보고 있다.
아버지와 대면시키면 확실히 알겠지.
세자빈과 작별한 장진한이 궁문을 지날 때 심각한 표정을 한 형부의 관리들과 마주쳤다. 손에는 산더미처럼 상소문을 들었다. 율학박사까지 끼어 있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마침 자신과 친한 형부 낭중을 발견하고 슬쩍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오?”
“염려 마시오. 장 공자와는 상관없는 일이라오.”
형부낭중은 세자빈의 오라비인 장진한을 무시하지 못했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상소문의 내용을 누설하는 것은 삭탈관직의 벌부터 참형까지 받을 수 있는 큰 죄이므로 자세한 내용은 쏙 뺐다.
“빨리 따라 오시오.”
그때 앞서 가던 형부시랑이 미적거리는 형부낭중을 불렀다. 장진한은 포기하지 않고 입을 닦는 시늉을 했다. 함구할 테니 염려 말고 말해 달라는 뜻이다.
“이번 과거시험에 관한 것이오.”
형부 낭중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흘리고는 잰걸음으로 일행을 따라잡았다. 문제가 생겨도 회임한 세자빈 마마의 오라비라는 실세가 뒤를 봐줄 것이라고 믿고.
***
궐향의 은신처.
“원래는 어사대가 맡을 일이지만 어사중승이 얽힐까 봐 형부에 미끼를 던졌지. 형부상서는 출세욕이 많은 자라 얼씨구나 하고 미끼를 물었어. 이제 이번 과거시험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들어갈 거야.”
“향시에서 부정 시험을 친 자가 한둘도 아니고 어차피 흐지부지 조사가 끝날 겁니다. 이전에도 그랬잖아요. 게다가 아직 어전시가 남아 있으니 조사를 길게 끌 수도 없고요.”
“당연하지. 다아 빠져나갈 거야. 한 놈만 빼고.”
“남우효 말입니까?”
“음.”
“에휴, 어쩌다 재수 없이 걸려서는.”
“재수 없기는. 인과응보야. 인과응보.”
궐향의 말에 수하인 봉수가 웃음을 참느라고 눈에 힘을 주었다. 이 말을 남우효에게 해 보라지. 자신이 한 부정한 짓은 생각지 않고 왜 재수 없게 나만 걸렸냐고 길길이 뛸걸.
거기다 이게 표적 수사라는 사실을 알면 더 억울해서 게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갈 거야. 왜 표적이 되었느냐고?
어느 별 볼 일 없는 생원 하나를 세자빈의 오라비에게 무릎 꿇린 사소하고 귀여운 행동 때문이야. 애교로 봐줘도 되는 정말 가볍고 하찮은 행동.
“나라도 억울하겠어.”
봉수가 밖으로 나오며 진심으로 남우효를 동정했다.
***
며칠 후 개구리가 시끄럽게 우는 늦여름 아침.
아침을 먹고 외출 준비를 한 다음 침상 머리맡에 놓인 샹들리에를 보면서 생각해 봤다.
내가 과거로 빙의하면서 이상한 초능력도 생겼나? 등급을 보는 건 원래부터 있는 거였으니 빼고.
내가 저 사람 싫어, 라고 생각하면 얼마 안 가 그 사람이 사라진다. 이 세상에서나 최소한 이 환성에서. 마치 내가 데스노트를 쓴 것처럼.
어제 예부시랑의 아들 남우효가 과거시험 부정이 드러나서 곤장을 맞고 천 리 밖으로 유배를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귀를 후벼 팠다. 얼마 전에 남우효를 만났고 그의 유치한 행동에 화가 났지만 과잉충성을 하는 사람을 현대에서도 자주 봤는데 이 시대는 오죽하랴 싶어서 그 순간만 생각하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 남우효가 도성에서 사라졌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이유는 모르지만 고맙게도 신이 죽어 가는 나를 과거로 보냈다.
김인수를 살리려는 내 희생을 불쌍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또는 김인수가 과거로 오게 되었는데 내가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같이 오게 됐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진짜로 죽어서 영혼이라도 신을 만나면 그때는 물어봐야지 생각한다.
등급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여기서도 유용하게 쓰고 있는데다 부유한 친정 때문에 편하게 지내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일이 생기면 너무 무섭다. 이 세상이 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좁고 어두운 동굴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지금도 그런 기분이다.
진남, 예부상서의 둘째 아들, 반옥금, 창진, 남우효.
그럼 다음은 누구지? 세자빈의 오라비인가? 정말 내가 데스노트를 쓰고 있나?
아니, 아니야. 이거야말로 내가 확증편향에 빠진 증거다. 나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억지로 증거를 맞추고 있다.
진실은 이거라고 생각한다. 내게 무례했던 인간들은 다른 누군가에게도 무례했을 것이고 그래서 누군가가 이번 기회에 손을 쓴 거다.
남우효만 해도 그의 과거시험과 나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가 팔 등급임을 알아봤지만 부정합격은 나도 몰랐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철저한 우연이다.
손가락으로 수정을 달랑달랑 흔들며 빛이 반사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중얼거렸다.
우연이다. 우연이다. 우연이다. 데스노트가 아니다. 최면을 걸어서라도 이 느낌을 없애고 싶어서 계속 중얼거렸더니 최면은 안 걸리고 눈만 아프다.
그때 말순이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아씨, 공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알았어.”
“소인들이 안 모셔도 정말 괜찮으세요?”
말순은 하녀 없이 공자님과 둘만 외출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지 미간에 근심을 달고 있다.
“괜찮아. 염려 마.”
오늘 만나는 노부인의 신분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상황을 꼬고 싶지 않아서 궁금해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목선후에게도 묻지 않고 노부인의 주변도 관찰하지 않을 테다. 당분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살기로 했다.
안 그러면 내가 정말 데스노트를 쓰고 있다는 강박에 빠질 것 같아서.
하녀들 모르게 비단 보따리에서 지난번에 목선후가 손가락에 끼워 주었던 커다란 금반지를 찾아서 향낭 안에 넣었다. 노부인을 만나기 전에 끼어야지.
마중물이라고나 할까. 새로운 비단 보따리를 향한 마중물.
노부인의 신분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않겠다는 각오는 노부인이 주는 선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중에 내 장사밑천이 돼서 안씨 가문과 목씨 가문의 번창에 도움이 될 테니까 잘 챙겨두기로 하자.
***
이번에도 노부인을 만나는 길은 비밀스러웠다. 마차가 선 곳은 작은 절의 뒷문이었다. 목선후의 손에 의지해서 돌과 풀이 정돈되지 않은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작은 문 안으로 또 들어갔다.
디귿자 모양의 전각과 마당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목선후는 내 손을 오른쪽에 있는 방으로 인도했다.
정갈한 방 위쪽에 노부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중을 드는 여자가 무엇인가를 찻상에 놓았는데 나는 바로 알아보았다.
얼음! 얼음이다! 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눈이 시원해졌다. 이 귀한 얼음이 어디서 났대?
“소인 목선후와 처 안안용이 인사 올립니다.”
엎드려 절을 하는 동안에도 코가 킁킁거렸다. 에어컨도 냉장고도 자동차도 없는 시대지만 괜찮았다.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얼음을 보자 반가워서 심장이 벌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