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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33화 (33/92)
  • 33화. 권력이 필요해

    이놈의 계급 사회.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는데 목선후가 바닥에 무릎을 꿇지 않고 허리만 굽혔기 때문에 나도 살짝 허리만 굽혔다.

    “목선후? 목이후와는 어떤 관계지?”

    우리의 신분이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는지 남우효가 바로 말을 놓았다.

    “형님이십니다.”

    “오호! 어사중승 어른의 둘째로군. 그런데 왜 세자빈 마마의 오라버니인 장 공자님께 절을 하지 않나? 이건…… 세자 마마를 능멸하는 것인가?”

    우리 둘 다 몸이 쩡 굳었다.

    특히 현대에서 온 나.

    이렇게 비굴한 상황에 처한 때가 있기나 한가?

    물론 학원에 와서 진상을 떠는 학부형이 간혹 있지만 현대는 엄연히 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상대방이 아무리 권력자라도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해서 인터넷에 뿌리면 일반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다.

    서버가 다운될 만큼 청원을 하고 댓글을 다는 세상에서 온 지 얼마 안 됐다.

    그 세상에서 내게 닥친 최악의 상황이래야 학부형들이 진상 부리는 게 전부였다.

    나 자신보다 남편이나 부모님이 모욕을 당하면 참을 수 없다더니 정말 그랬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목선후를 보기 힘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왕실의 외척에 불과하니 허리를 굽히는 정도도 무례가 아니란 정도는 나도 배웠다. 반드시 바닥에 무릎 꿇고 절을 해야 하는 대상은 조부모, 부모, 왕과 세자뿐. 나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더구나 세자빈의 오라비는 따로 관직도 없는 듯하고.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바닥에 무릎을 꿇은 목선후에게 남우효가 말했다.

    “소년 수재라고 떠들썩하기에 한번 보고 싶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왜 그 뒤로 전시나 어전시를 안 봤겠어? 네 부모가 뇌물을 써서 향시에 합격했지? 응? 어디 변명을 해 봐라.”

    질투다. 팔 등급인 자신이 소년 수재인 목선후를 세자빈의 오라비를 이용해서 누를 때의 통쾌함이 남우효의 얼굴에 뚜렷했다.

    유치한 개자식.

    천천히 일어서는 목선후의 얼굴에서는 모든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굴욕을 씹다 씹다 지쳐서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이다.

    문득 언젠가 내려놓으면 편하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너무 똑똑한 사람은 어느 사회든 힘들게 사는구나. 자신의 능력은 뛰어난데 신분이 낮으니 자괴감이 들었겠지.

    목선후가 일어서더니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뜨거웠다. 내가 목선후의 손가락을 하나씩 깍지를 꼈다.

    남우효가 진상을 떠는 동안 세자빈의 오라비라는 자는 눈을 반쯤 감고 목선후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귀를 기울였다.

    “자, 자. 초면이긴 하나 이것도 인연인데 앉아서 얘기나 나누자고. 아, 참. 나도 이번에 향시에 합격했으니 우리는 같은 생원이라 할 수 있어.”

    남우효가 갑자기 사람이 바뀐 듯이 소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저자의 성격인가 보다. 이런 사람에게 휘둘리면 감정 쓰레기통이 된다.

    그런데 팔 등급이 향시에 합격했다고? 칠 등급도 아니고 팔 등급이? 내가 등급을 잘못 봤나 싶어 눈이 아리도록 다시 쳐다보았다. 팔 등급이 맞았다.

    내가 그를 쳐다보듯이 그도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시선으로. 진남이 나를 보던 표정과 같다. 구역질이 났다.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감사합니다만 내자가 몸이 안 좋아 들어가 보려 했습니다.”

    목선후의 음성은 감정이 빠진 채 그저 단조로웠다.

    그 말에 내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목선후를 올려다보았다.

    “서방님, 너무 더워서 소첩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렵습니다. 아! 어지러워라.”

    내가 비틀대자 목선후가 정오와 말순에게 크게 소리쳤다. 지금까지 목선후를 만난 중에 가장 큰 목소리였다.

    “무엇을 하느냐? 어서 아씨를 부축해라.”

    하녀들이 양쪽에서 나를 부축하는 사이 목선후가 장진한에게 허리를 굽혔다.

    “송구합니다,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기생인 줄 알았더니 내자였어? 뭐, 할 수 없지.”

    장진한을 힐끗 돌아본 남우효가 쩝쩝거리며 대답했다. 장진한이 보내라고 허락한 모양이었다.

    마차 안에 들어와 앉자 비로소 내 숨이 트였다.

    정신을 차리자 내가 이 사회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이 없어졌다. 저런 권력자의 눈 밖에 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매장당하는 게 당연한 이런 신분제 사회에서 말이다.

    현대로 돌아갈 방법도 모르는데. 무엇보다 돌아갈 몸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몸만 바뀌었지 영혼은 그대로라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그대로 느꼈다.

    “안용, 괜찮소?”

    마차가 출발하자 손수건으로 내 이마에 배어 나온 땀을 닦아 주며 목선후가 물었다.

    “공자님은 왜 과거를 안 보는 거예요?”

    난 권력이 필요한 거 같아. 저세상 미남만으로는 부족해.

    “그 얘기는 하지 말자고 했잖소.”

    “왜요? 저 사람은 실력도 없는데 향시에 합격했다잖아요.”

    너는 일 등급이잖아. 향시, 전시, 어전시에서 모두 장원을 할 거라고. 정말이라니까. 그거, 그 머리에 꽃 꽂고 시가지 행진하는 거, 그거 할 수 있다고.

    저 개자식을 납작하게 누를 수 있다고! 복수하고 싶다고요. 마음속 아우성을 눈빛에 실어 목선후에게 쏘았다.

    “왜 그가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요?”

    날카로운 내 눈빛에도 목선후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팔 등급이란 걸 어떻게 말해.

    “태도가, 태도가 허풍이 잔뜩 든 게 실력은 없어 보이잖아요. 저, 저런 사람치고 실력 있는 사람을 못 봤어요.”

    목선후가 나를 당겨서 부드럽게 끌어안더니 방금 일을 벌써 잊은 듯이 부드럽게 웃었다. 가슴에 안고는 더울까 봐 부채를 부쳐 주었다. 더운 여름인데도 그에게서는 시원한 솔향이 났다.

    “그대가 본 사내들이 얼마나 된다고? 규방에만 있었잖소.”

    아주 많이 봤지.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어. 목선후가 여유를 부리자 내 기분도 점차 평온해졌다.

    그를 바라보고 그의 말을 듣다보면 뭐든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느껴진다. 노부인 같은 뒷배가 있어서 여유가 있는 거겠지?

    하지만 노부인의 신분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세자빈보다 높지는 않을 것 같다.

    “봤어요? 세자빈의 오라비라는 자가 팽문의 발을 거는 거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유치하게. 일곱 살 먹은 안열이도 안 그러는데.”

    “세자빈의 오라비?”

    “네. 세자빈의 오라비라잖아요. 그 사람.”

    내가 흥,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안용, 그대는 정말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군. 세자빈 마마의 오라버니를 그리 부르는 여인은 처음 보았소.”

    그래서 무섭다. 평등한 민주사회에서 살다 왔으니 이 계급사회가 더 무섭다. 말 한 번 잘못해서 목이 댕강했다는 역사 기록이 얼마나 많으냐 말이다. 그런 사태를 피하려면 권력을 가져야 한다.

    원하는게 있는 탓에 자연스럽게 목선후의 품을 파고들며 중얼거렸다.

    “공자님이 과거를 보면 좋을 텐데…….”

    목선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남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게 싫다. 한때는 영광스러운 이름이었을 소년 수재가 지금은 무시의 조건이 되었다.

    ***

    태극회에서 돌아온 궐향 앞에 수하가 보고를 했다. 궐향에게 이번 태극회는 특별히 중요했다. 이번에 처음으로 몇몇 문파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많은 재물을 풀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시작은 좋았다.

    그가 가장 원했던 문파와 동맹을 맺었기에 기분 좋은 귀환이었다. 그런데 돌아왔더니 불쾌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딜 갔다고? 서중호에 뱃놀이를 갔다고?”

    “네. 그런데 거기에서 세자빈 마마의 오라버니인 장 공자와 남우효를 만났습니다.”

    “아무 일 없이 넘어갔나?”

    세자빈의 오라비는 누이동생의 권세를 믿고 함부로 날뛰는 천둥벌거숭이다. 거기에 방자 역할을 자처한 남우효까지 동행했다면 상황이 뻔하다.

    “웬걸요. 시비를 걸었죠. 다행히 큰일로 번지기 전에 아씨께서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지만요.”

    “남우효라. 그자가 이번 향시에 합격했지?”

    “네. 첩만 끼고 사는데 어떻게 합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알아봐야지. 구린내가 나. 먼 길을 달려와서 좀 쉬려 했더니.”

    궐향이 투덜거리며 부채를 쫙 펴서 파라락 부치기 시작했다.

    ***

    안씨 학당에 여자애가 들어왔다.

    원래 학교는 남학교보다는 남녀공학이 분위기가 더 좋다. 서로를 의식해서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태도도 더 얌전하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안신이가 제일 많이 변했는데 오 여사님 말대로 ‘죽을 뻔한 사건’이 약이 됐다.

    게다가 열 살짜리 여자아이는 얼마나 귀여운가. 비글 같은 사내 녀석들만 빨빨거리다가 레몬 같은 여자아이가 오자 오 여사님까지 좋아했다.

    민아는 자신의 집안 하녀와 함께 왔다가 오전 수업만 받고 점심을 먹지 않고 돌아간다. 어머니가 오전 간식을 평소보다 더 많이, 더 맛있게 챙겨 보낸다는 말을 듣고 웃었다.

    “이러다 나 두 번째가 되면 어떡해요?”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으며 목선후에게 불평했다. 목선후는 젓가락으로 수박씨를 일일이 골라낸 후 나에게 주었다.

    저 귀한 일 등급이 수박씨나 빼고 있다니 정말 인류의 낭비다.

    “어머니가 나 말고 다른 여자아이에게 신경을 쓰니까 기분이 너무 안 좋아요.”

    “내게는 그대가 첫 번째니 염려 마시오.”

    또 고백이다. 고백만 하면 뭐해?

    나는 아직 손끝만 스쳐도 찌르르하고 눈빛만 스쳐도 침대로 돌진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조금씩 내 마음이 열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의 부드럽고 인내심 있는 접근방식이 좋다.

    목선후의 무릎을 베고 자연스럽게 누웠다. 단단한 허벅지의 근육이 긴장했다가 풀어졌다. 남자의 허벅지를 만져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우리 위에 가지를 뻗은 팽나무를 올려다보았다.

    팽나무 잎사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목선후가 수박물이 묻은 내 입도 닦아주고 부채를 살살 부쳐 준다.

    잠이 솔솔 왔다.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난 어머니의 둘째가 되기는 절대로 싫어요. 이 세상에서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해야 돼요.”

    그리고 너 님도.

    나는 요새 어떻게 하면 이 남자를 사주팔자라는 덫으로부터 건져내어 입신출세라는 신세계로 나가게 할지 고민 중이다.

    출세한 사위가 있으면 중문상가가 사라져도 어떻게든 도움이 될 것 같다. 핑계는 중문 상가지만 사실은 남우효 때문이다. 사악한 남우효의 얼굴이 떠오르면 입맛이 다 떨어진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은 게 이 시대는 사주팔자를 안 믿는 사람이 없다.

    탁월한 사업가인 안부자나 대쪽 같은 어사중승. 나는 둘 중 한 사람도 설득할 자신이 없다. 목선후가 부채를 부쳐주는 동안 나는 진지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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