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목선후도 내 뒤를 따라왔다.
“너, 이름이 뭐니?”
내 질문에 육 등급 하녀가 접시를 정리하다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이십 대 초반의 하녀는 키가 조금 크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반짝여서 영리하게 보였다.
다시 봐도 육 등급이 맞았다.
하녀라고 다 무식하란 법은 없지만 천자문을 떼고 웬만큼 글을 읽어도 구 등급인 시대다. 육 등급이면 향시에 합격할 실력이 아닌가.
하루 종일 일을 하는 하녀가 언제 사서삼경을 공부할 수 있단 말인가.
“아씨, 왜 그러십니까?”
안 총관이 다가오며 물었다. 안씨 가문 내부의 일은 모두 그의 소관이라 하인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왜 대답을 안 하니? 이름이 뭐냐니까.”
안신이의 실종으로 긴장 상태라 입구에서 나는 작은 소란에도 대청 안의 모든 사람들이 즉시 반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다가왔다.
“아씨, 이 여인은 행아라는 여인인데 말을 못 합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안 총관이 하녀의 얼굴을 알아보고 말했다.
말을 못 한다고?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주시하자 하녀가 어깨를 움츠렸지만 그다지 겁먹은 표정은 아니었다.
이 하녀가 안신이의 실종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지라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육 등급 하녀란 이 사회에서는 존재 자체가 불합리하니까.
“이 사람이 수상해요.”
“그렇다면 알아봅시다.”
목선후가 안 총관에게 눈짓을 했다.
안 총관이 근처의 하인들과 다가왔다. 아무도 평범한 벙어리 하녀가 다음 순간 무엇을 할지 예상치 못했다.
하녀가 놀랄 만큼 잽싸게 뛰어오르더니 바로 앞에 있는 내게 달려들었다.
일 초도 안 되는 사이였다.
“모두 꼼짝 마. 아씨를 살리고 싶거든.”
하녀가 한 손에 작은 칼을 들고 내 어깨 한쪽을 잡았다. 하녀의 힘은 너무나 세서 나는 종이 인형처럼 하녀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 목소리?
그사이 하녀는 나를 잡고 벽으로 다가가서 벽을 등지고 섰다. 나를 잡고 있는 손끝이 떨렸다. 전문적인 무사가 아니었다.
우리 두 사람을 두고 사람들이 동그랗게 반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안용아!”
“누이!
어머니와 동생들이 소리를 질렀다. 힐끗 눈동자를 내려 보니 작은 칼이 내 얼굴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하녀, 아니 하녀로 분장한 남자의 자세는 불안했지만 눈빛은 강렬했다.
“너 벙어리가 아니었구나.”
“벙어리? 하하하!”
안 총관의 말에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서슬에 칼날이 내 귀 근처를 스쳤다. 머리카락이 두세 가닥 잘려서 떨어졌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흰 종이처럼 창백해졌다.
자신이 숨소리라도 내면 내가 더 위험해질까 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어머니.
“너는 누구냐.”
아버지가 물었다. 겉으로는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이지만 깍지를 낀 손끝이 떨었다.
“창씨를 기억하느냐?”
의외로 사내는 쉽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아버지와 안 총관 등 식솔들의 얼굴빛이 변했다. 무슨 사정인지 대충 파악한 모양이다.
“이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무협 소설 속에서.
결국 이 남자가 원한을 갚기 위해서 벌인 일이라는 건데 왜 하필 나냐고!
생각해 보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제일 약해 보이긴 한다. 어머니는 아름답기는 해도 절대 약해 보이지 않으니까.
목선후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 아내를 놔주고 나를 잡으시오. 연약한 여인이오. 나를 못 믿겠으면 내 손을 뒤로 묶어도 되오.”
고대판 흑기사네? 키스 한 번도 안 해 주더니 웬일이래?
그런데 이를 어쩌니?
나는 일찍부터 혼자 살았기 때문에 호신술을 배워 뒀다 이 말씀이야.
호신술을 배웠어도 써먹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는 위압감이 달라서 연습 때처럼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빙의한 나는 한 번 죽었다 살아나서인지 그다지 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호신술을 이용해서 이놈을 제압하려 해도 주변에 다른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방해가 되거나 다친다.
지금 가장 가까운 사람은 목선후. 다른 사람들은 모두 뒤로 물러가는데 목선후는 두려움 없이 다가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범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목선후는 이미 안전거리 6미터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6미터면 넉넉한 거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6미터는 내 호신술 선생의 말에 따르면 칼 든 사람으로부터 떨어져야 할 최소한의 거리다. 지금 칼 든 범인이 마음만 먹으면 나와 목선후 둘 다 찔리게 된다.
목선후, 이 멍충아, 위험하니 더 이상 오지 말라고!
“공, 공자님, 전, 괜, 괜찮아요. 오, 오지, 마세요.”
소리를 낼 때마다 선뜻선뜻 칼날이 느껴져서 말이 툭툭 끊어졌다. 좀 더 대범하게 말하고 싶은데 내 귀에도 너무나 연약하고 가녀리다.
목선후 보고 더 빨리 오라는 거 같은 호소력 짙은 목소리.
“우, 우리, 이대로, 나가요, 밖에.”
내가 범인에게 말했다. 대청 안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범인은 칼을 가지고 있다. 만약 내가 실패해서 범인을 제압하지 못할 경우 피해가 커질 것이다.
“안용, 나를 보시오. 염려 말아요.”
내 시선을 붙잡고 한발씩 다가오는 목선후의 얼굴은 평온해서 진짜 별일이 아닌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호신술을 배운 나는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잘 안다.
문밖에는 칼을 빼든 호위들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범인은 밖으로 나갈지 말지 결정하지 못해서 아주 짧은 순간 허점을 보였다.
바로 내가 기다리던 순간.
“흡!”
기합을 넣으며 두 손을 모아 위로 쳐들었다. 그 힘 그대로 범인의 손목을 잡고 끝까지 위로 쳐올리면서 옆으로 비틀었다.
수 없이 연습한 동작이라 자신 있었다.
쓰벌.
욕이 절로 나왔다.
분명 배운 대로 손목을 비틀었으니 범인의 손에서 칼이 떨어져야 하는데 안안용의 손힘이 너무 약해서 칼이 떨어지지 않았다.
얘 손은 고무장갑이야? 힘이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 없어? 누구나 성공하는 기술이라고 했단 말이다.
칼을 떨어트린 다음 연이어 공격을 하거나 도망가는 게 순서인데 내 의지와는 다르게 안안용의 몸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미치겠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은 취소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
***
갑작스런 안안용의 몸짓에 놀란 사람은 범인뿐이 아니었다. 서까래 위에서 기회만 엿보고 있던 일선도 일순 어안이 벙벙했다.
뭔가 하는가 싶더니 그냥 주저앉아 버리는 아씨. 도대체 저 이상한 손짓은 뭐지?
어쨌든 아씨가 움직여서 칼이 얼굴을 벗어나는 순간 일선이 아래로 뚝 떨어지며 사내의 뒤통수를 갈겼다. 어리둥절한 범인은 쿠당탕 쓰러졌다.
큰 도련님을 찾아야 하니 사내를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기절만 시켰다. 범인이 쓰러지자마자 일선은 다시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목선후가 주저앉은 안안용에게 달려들었다.
이 모든 게 너무 빨리 일어난 일이라 뒤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전혀 볼 수 없었다.
팽문과 함께 밖에 있던 호위들이 방으로 달려들어 쓰러진 사내를 발로 누르고 밧줄로 손발을 묶었다.
“안용아.”
“안용아! 우리 딸. 어흐흐.”
오씨 부인이 안도의 울음을 터트리고 목선후가 안안용을 번쩍 들어 안았다. 눈을 꼭 감은 안안용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너무 가냘픈 음성이 새어 나와 혹시 어디 찔리지나 않았는지 오씨 부인이 딸의 목과 몸을 더듬거렸다.
“어디, 어디 상한 것이냐? 응?”
입술이 떨려서 평소처럼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위험한 순간이 지났음을 알지만 여전히 안안용을 더듬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자꾸 입을 열었지만 붕어처럼 뻐금거리다 다시 닫았다.
오씨 부인이 ‘기가 막혀 말을 못 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괜, 괜찮아요, 어머니.”
“장모님, 놀란 모양입니다. 방에 가서 뉘여야겠습니다.”
“그, 그래. 목 서방, 애를 이리 데리고 따라오게. 뒷일은 자네 장인에게 맡기세.”
오씨 부인과 목선후가 나가자 안부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장에서 떨어진 일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일선의 존재를 미리 알고 있던 안부자와 목선후 정도만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안부자가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안 총관, 이자를 끌고 따라오게.”
사랑채 대청은 누군가를 심문하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호위들이 기절한 사내를 질질 끌고 나가자 남은 사람들은 긴 한숨을 쉬었다.
이제 결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팽 총관님, 여기를 정리합시다.”
“예, 둘째 도련님.”
안안중의 말에 팽 총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몸을 움직였다.
“아직 형님의 문제가 있으니 아무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둘째 도련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할 일이 있고 형은 실종된 상태다. 비장한 각오가 안안중의 눈빛에 어렸다.
***
정 공자와 함께 시내를 뒤지다가 뒤늦게 돌아온 한인수에게 하인이 다가왔다. 도련님들의 선생이라 하인들도 늘 공경을 다했다.
“오셨습니까? 사랑채에서 팽 총관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서둘러 사랑채에 들어가자 팽 총관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가 보신 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안신이의 벗들이 다니는 서원이나 학당을 돌아다니다 왔네. 벗들의 말만 믿지 않고 주변까지 세세히 탐문했네만 어떤 단서도 못 찾았네.”
“알겠습니다. 일단 저녁 식사를 하시고 쉬시지요.”
“지금 세작을 붙잡았다는데 사실인가?”
“예, 모두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씨는 어떠하신가?”
지금까지 조용하던 한인수가 물었다. 팽 총관은 한인수가 아씨에게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이 상황에서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묻고 다닐까 봐 선선히 대답했다.
“많이 놀라셨지만 의원이 괜찮다고 했답니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나는 저녁 생각이 없으니 먼저 들어가겠네.”
한인수는 정 공자와 팽 총관을 뒤로하고 학당 뒤편에 마련된 자신의 처소로 걸어갔다. 하인이 등롱을 들고 앞장섰다.
“달빛이 환하니 되었네. 혼자 가겠네.”
“네, 공자님.”
한인수는 학당을 지나 자신과 정 공자가 머무는 작은 전각으로 다가갔다.
어디선가 밤새가 울고 만월의 달빛은 매우 밝았다. 달빛이 너무 밝아. 햇빛 같잖아. 한인수가 너무 밝은 빛에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털썩.
썩은 볏짚처럼 한인수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인수가 쓰러지기 직전 현대에 있는 김인수의 심장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