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못 먹어도 고
하지만 협상에 포커페이스는 필수. 나는 떨리는 내심을 감추고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삼 년 후 공자님이 향시에 떨어지면 사과문을 아주 크고 길게 쓰셔야 합니다. 가게 문 앞에 걸어놓을 거니까요.”
옆을 돌아보니 점주를 비롯해서 모든 직원들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돈을 늘 만지는 사람들이라 황금 만 냥의 의미를 잘 아는 까닭이다.
필사적으로 나를 말리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니 미안해졌다.
여러분, 염려 마요. 저 남자는 삼 년 후 절대로 향시에 합격 못 해요.
목선후는?
신기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는 진상 고객이나 문밖의 구경꾼들은 신경도 안 썼다.
마차 안에서 내가 큐피트의 화살을 팍팍 쏠 때는 모른 척하더니 왜 여기서 그러는 건데? 이상한 남자라니까.
“저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까요?”
복화술사처럼 입을 벌리지 않고 목선후에게 상체를 기대며 속삭였다.
“그대라면 어떻게 할 거요?”
장난치듯이 목선후가 내 귀에 따뜻한 숨을 불어넣으며 되물었다. 짜릿한 감각에 어깨가 떨렸다. 자꾸 왜 이러는 거야?
“못 먹어도 고요.”
“……?”
“나 같으면 무조건 삼 년 후에 향시를 친다고요. 그깟 사과문 쓰고 말죠.”
목선후가 웃음을 참으려고 몸을 살짝 비틀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옆얼굴도 예술이다. 앞으로 중요한 협상의 자리에 이 남자를 데려와서는 안 되겠어. 자꾸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자, 어서 결정을 하시오.”
부채남이 또 나섰다. 이 시대는 당사자보다 제삼자가 나서야 공평하다는 인식이 있는지 주춤거리던 반 공자가 눈알을 굴리면서 가게 안으로 쓰윽 들어왔다.
***
반 시진 후 궐향은 안씨 포목점 옆 안씨 가구점 지붕에 앉아 작고 평범한 마차가 포목점 앞을 떠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협상을 끝낸 안안용과 목선후가 탄 마차였다.
“주군, 반옥금이 은 삼십 냥을 택할 것을 아셨습니까?”
“음.”
“아씨도 그렇게 생각하신 거죠? 그래서 그렇게 뻥을 치신 거죠? 황금 일만 냥은 왕궁의 국고를 다 털어야 나올 돈이니까요.”
“아닐걸?”
“네?”
“아씨는 반가 놈이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관없었을 거다. 그놈이 절대로 향시에 합격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거든.”
“아씨 생각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그녀의 눈. 그 반짝이는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궐향이 붉은 인주가 묻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들여다보며 중얼댔다.
반옥금은 자필로 은 삼십 냥에 대한 영수증을 쓰고 지장을 찍었다. 아씨도 지장을 찍고 점주도 찍고 제삼자인 자신도 증인의 자격으로 찍었다.
궐향이라는 이름 대신 풍월이라는 이름으로. 그밖에도 이름 있는 주변 몇 사람이 수결을 했고 반옥금은 옷 다섯 벌의 배상금만 받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은 놈이야.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 어떤 놈처럼 제 무덤을 파게 됐을 텐데.”
왠지 아쉬운 말투여서 부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엄지손가락은 여기에 닦으세요. 옷에 묻겠습니다.”
부하가 소매 속에서 낡은 손수건을 꺼내서 엄지손가락을 닦으려 하자 궐향이 앉은 자리에서 성큼 뒤로 물러났다.
“싫다. 안 지울 거야. 아예 이대로 문신할까 생각 중이다.”
“주군!”
곧 중문 상가의 지붕 위를 두 사람이 달리기 시작했다. 두 마리의 커다란 고양이처럼 가볍고 빠르게.
***
반옥금을 처리하고 나자 기운이 빠진 나는 목선후의 옷은 다음에 맞추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노부인 때문에 긴장한 데다 황금 만 냥의 가치를 뒤늦게 깨닫고 심장에 무리가 왔다.
집에 도착하자 이미 포목점 소문이 여기까지 퍼져 있었다.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지고 나쁜 쪽으로.
벌써 나한테 별명이 붙었단다. 만 냥 아씨. 쳇, 어감이 별로야.
방에 들어와 말순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는데 정오가 달려왔다.
“아씨, 마님께서 오고 계세요. 빨리 누우세요. 어서요.”
“왜?”
어벙하게 되묻는 나를 두 하녀가 번쩍 들어서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었다.
“마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고요.”
정오가 소매 속에서 흰 천을 꺼내더니 내 이마를 질끈 묶었다.
“정오야, 묶으니까 머리가 더 아파.”
정오는 내 말을 무시하고 말순에게 소리를 질렀다.
“말순아, 빨리!”
말순이 찻주전자에서 식은 차를 손바닥에 덜더니 내 눈에 뿌렸다.
“앗! 뭐 하는 거야?”
약간의 자극성이 있는 찻물이 눈에 닿자 눈이 시큰해지더니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오 여사가 들어왔다.
한눈에 상황을 파악한 어머니는 엄한 표정으로 하녀들을 내쫓았다.
“어머니, 그게요.”
따끔거리는 눈을 손등으로 닦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원래의 안안용은 이런 연극을 했을지 몰라도 나는 문제를 회피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는 성격이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고 손해를 끼쳤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복잡한 현대에서는 그게 훨씬 단순하고 편리했다.
오늘 나는 물질적인 손해를 끼치지는 않았지만 안씨 가문의 이름에 먹칠한 셈이다.
안씨 가문의 금지옥엽이 만 냥 아씨라는 웃음거리가 됐으니까. 돈을 잃는 것 보다 이게 더 나쁜 일인지도 모르겠다.
반성하자, 안안용.
“어머니, 죄송해요.”
순전히 오 여사님 덕에 나는 이 세상에 스며들기 쉬웠다. 무식할 정도로 딸을 믿어 주고 지지해 준 오 여사님이 없었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반 공자가 너무 억지를 부리잖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나섰어요. 황금 만 냥이 그렇게 큰 돈인 줄 몰랐어요. 죄송해요. 제가 섣부르고 무지했어요. 우리 집안의 명성에도 누를 끼쳤고요. 용서해 주세요. 다음에는 안 그럴게요.”
말을 하다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렇게 빌 수 있는 어머니가 계셔서 너무 좋다. 어머니, 저를 많이 혼내 주세요.
어머니가 의자를 가져와 침상 앞에 앉았다. 평소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하얀 이마 한가운데 푸른 핏줄이 뚜렷이 솟았다.
이마를 펴 주고 싶어서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뭘 잘못했는지 말해 봐라.”
“황금 만 냥이 아니라 천 냥이나 오백 냥을 불러야 했어요. 우리 집안에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요. 저, 우리집이 그 정도는…… 되죠? 안 돼요? 중문 상가는 내기 중이니까 음, 남은 재산은 얼마 안 되는 거예요?”
“안용아.”
“네, 어머니.”
“도대체 왜 그런 하찮은 신경을 쓰는 것이냐? 누가 너더러 그런 사소한 일에 힘을 빼라 하더냐? 그렇잖아도 연약한 애가 얼마나 놀랐을지.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식은땀이 다 났다. 목 서방은 옆에서 말리지도 않든? 너랑 둘이서 모처럼 외출을 하기에 오붓하게 잘 놀고 올 줄 알았더니 그런 일에 휘말리기나 하고 도대체 목 서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목 서방도 목 서방이지만 포목점에 사람이 몇인데 네가 나섰단 말이냐? 어린 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 쓸모없는 작자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새로 사람을 들여야겠다.”
“흐앙, 어머니.”
무조건 어머니의 목을 껴안았다. 눈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마음속에 엉켜있던 검은 덩어리들이 모두 녹아서 눈 밖으로 흘러나왔다.
“허어엉. 어머니, 어머니.”
안안용은 이렇게 우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던지 어머니는 내가 제풀에 울음을 그칠 때까지 내 등을 계속 쓰다듬었다.
“목 서방도, 훌쩍, 점주 아저씨도 아무 잘못 없어요. 훌쩍, 그 반 공자가 나쁜 놈이에요. 그러니까 어머니 그 사람들 그냥 두세요, 네?”
“정말이냐?”
“네, 정말요.”
내가 목에서 팔을 풀자 어머니가 부드럽게 내 뺨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가게 직원들을 정말로 물갈이할 작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우리 딸 안용이 같구나.”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데 내 몸이 버터가 돼서 녹아 버리는 줄 알았다.
오 여사님, 당신이 원하시면 영원히 당신의 마마걸로 살게요.
목선후고 중문 상가고 다 필요 없어요.
첨단시대도 건물주도 버리고 왔는데 이제 와서 뭐가 아깝겠어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의 마마걸, 당신의 아기로 살래요.
“그래도 목 서방은 혼나야 돼.”
“왜요?”
“황금 만 냥 아니라 십만 냥이라도 네가 원한다면 주겠다고 했어야지. 귀한 우리 딸을 돈 때문에 벌벌 떨게 만들면 안 되지.”
“어머니, 목 서방은 동전 한 닢도 없을걸요. 알거지잖아요.”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마음이.”
오 여사님의 현실감이 되살아나서 반가웠다. 역시 이 큰 살림을 끌어나가는 여걸답다.
“놀랐을 테니 탕약을 달이라고 했다.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니?”
바삭한 치킨에 시원한 맥주요.
“어머니, 시원한 과일 화채가 먹고 싶어요.”
부드러운 어머니의 미소를 보며 나는 얌전히 부탁했다.
***
한잠 자고 눈을 떠 보니 침상 옆에 목선후가 앉아 있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미 밤이 깊은 듯 유등이 노랗게 흔들리며 방 안을 밝혔다.
“이걸 주려고 왔소.”
목선후가 비단 보따리를 내밀었다.
아까 집으로 들어올 때 하녀들이 내게 몰려들어서 들고 있던 비단보따리는 일단 목선후에게 맡겼었다.
오 여사님도 하녀들도 모르는 내 비밀 재산이 생겼다.
“고마워요.”
보따리를 받아서 이불 속으로 쑥 집어넣었다. 목선후가 가고 난 후 꺼내서 하나하나 살펴봐야지.
“머리가 아픈 거요?”
머리띠를 하고 있는 이마를 보며 목선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여기 만져 봐요. 열이 나요.”
내 말에 약간 주저한 목선후가 손등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쓸었다.
“열이 있죠?”
“…….”
이럴 때 열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배려야. 관심과 배려라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목선후가 얄미워서 손을 밀어냈다. 마차 안에서 내 이마에 뽀뽀할 때는 무슨 심정으로 그런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노부인을 안마해 준 것이 그렇게 좋았던 것일까?
“가요, 자야겠어요.”
“열은 없지만 눈이 부었군. 많이 혼났소? 말리려고 왔다가 그대의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아서 들어올 수가 없었어요. 장모님께서 그렇게 화를 내시다니 뭔가 오해하신 모양이오. 그리고 만 냥 아씨라는 풍문은 곧 사라질 거요. 그다지 나쁜 소문도 아니니 마음 쓰지 말아요.”
“그런 건 괜찮아요.”
“그렇다면 무엇이 마음에 걸리오? 왜 그렇게 울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