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오, 샹들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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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안용의 말을 들은 목선후의 표정은 금세 굳었다. 고개를 들어 마차의 천장을 보더니 한숨을 푹 쉰다.
“미안하지만 그건 말할 수 없소. 대신 다른 상을 주리다.”
팽문이 들여 놓은 작은 비단 보자기를 안안용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제발, 이걸로 넘어가야 할 텐데. 대비마마가 누구냐고 물을 줄이야.
그녀가 원하는 상이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도 놀랍다.
사실 처음에는 머리에 꽂은 산호 뒤꽂이나 이 비단 보자기 속에 들어 있을 패물을 안안용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늘 하던 대로 구석에 처박아 둘 예정이었다.
예전의 안안용이라면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녀서 출처를 의심하게 만들 게 뻔했기에.
하지만 대비마마가 손자며느리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자고 하시는데 이전에 보내셨던 선물 중에서 하나라도 하고 가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안 보는 척하면서 꽤 오랫동안 산호 뒤꽂이를 보던 대비마마.
대비마마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이전의 안안용의 모습을 아는 목선후는 매 순간이 아슬아슬했다.
어깨를 주무르라는 말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안안용이 누군가의 어깨를 주무른다고?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데?
그 순간 안안용이 어떡하죠? 큰일 났어요, 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데 이상하게 안쓰러웠다. 위로의 미소를 지어 주자 안안용은 미소를 되돌려 주더니 씩씩하게 안마를 했다.
안안용은 뒤에 있어서 볼 수 없었지만 목선후는 보았다. 대비마마의 표정이 점차 부드럽게 풀어지는 놀라운 모습을.
저 정도면 정말 마음에 든다는 표시다.
눈앞에서 또 선물을 내리면 손자가 안 받을까 봐 팽문에게 비단 상자를 미리 보내는 꼼수를 쓴 걸 보니 손자며느리가 꽤 마음에 드셨다. 까다로운 대비 마마의 마음에 들었으니 목선후 마음에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생각지도 못했다. 이렇게 잘해 줄 줄은. 안안용은 조신하고 총명하고 그러면서도 꾸밈없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런 모습의 안안용에게서는 혼인 직후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때는 원치 않는 혼인을 한 탓에 화가 나서 그렇게 막무가내였나?
한인수와 혼인하고 싶었다고 첫날밤 내게 말했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도 했고. 그 밖에도 많은 말을 쏟아냈지만 지금 보면 그녀는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지만, 또 깊이 아는 게 무섭기도 했지만 목선후는 달라진 안안용이 이대로 쭉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
‘작은 것이 좋은 것이여. 클수록 별 볼 일 없는 것이고.’
아빠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고등학교 졸업 기념 금목걸이를 선물해 주셨다. 엄마는 커다란 상자에 담긴 쇼퍼백을 내놓으며 아빠를 흘겼다.
‘이것도 싼 거 아니다?’
쇼퍼백에 전공 서적을 넣고 금목걸이를 하고 내가 모아둔 돈으로 손목시계도 하나 샀다.
그러고 보니 귀금속 선물을 내게 준 사람은 아빠와 목선후뿐이구나.
나 그렇게 외롭게 살아 온 거였어? 황금의 이십대를 돈만 벌다 보낸 거였어?
자기연민에 빠진 손이 저절로 비단 보자기의 매듭을 풀었다.
“이거 다 내게 주는 거예요?”
당연히 노부인의 정체를 아는 것보다 한보따리 보석을 받는 게 좋지. 몇 분 안마하고 절한 다음에 보석 한 보따리라니. 삼 등급 노부인의 분위기로 보아 이 보자기 속에는 초 럭셔리 명품이 있다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건다. 매듭을 푸는 손끝이 기대감으로 떨렸다.
“잠깐, 안용, 미리 할 말이 있어요.”
“뭔데요?”
비단 보자기를 잽싸게 가슴에 껴안았다.
“뭐예요? 줬다 뺏기 없기예요.”
“그런 게 아니오.”
“그럼요? 이거 주기 싫으면 아까 그분이 누구인지 말해 줘요.”
목선후의 표정으로 봐서 그 부인의 정체를 발설하느니 팔 하나를 내줄 분위기라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다.
“알겠소. 안 주겠다는 게 아니오. 안용.”
목소리를 한 톤 내리는 목선후. 평소에도 듣기 좋지만 이건 뭐, 가슴 안쪽이 막 울렁거리잖아. 자신의 음성이 내는 무장해제의 효과를 알고 있을까?
“그대에겐 좀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가지고만 있어요. 사용하거나 밖에 가지고 나가면 안 되오.”
“왜냐고 물어도 대답 안 할 거죠?”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이 정도를 추측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나? 라는 표정이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존재보다 소유니까.”
순순히 대답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목선후는 존재나 소유가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았다.
내 학원이 세 들어 있는 건물은 9층이었는데 1층은 우유대리점, 2층부터 6층은 사무실. 7, 8, 9층은 내가 썼다. 1층부터 6층까지는 저녁이 되면 모두 퇴근해 버려서 불이 켜져 있는 곳은 내 학원뿐이었다.
주변 환경도 바람직하고 깨끗한 건물이어서 오랫동안 쓰고 싶었지만.
건물주는 해마다 세를 파격적으로 올렸고 학원비는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차액은 내가 온전히 떠안아야 했다. 몇 년 지나자 세가 너무 부담되어서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건물주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그때 했다. 소유가 존재를 이겼다. 적어도 내 학원 건물에서는.
“하지만.”
목선후의 말에 조급하게 되물었다.
“또 뭔데요?”
“우리 둘이 있을 때는 해도 되오. 그대가 하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소.”
목선후가 내 머리에 있는 산호 뒤꽂이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돌아올 때도 휘장을 걷을 수 없어서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는데 눈부신 보석 더미를 보자 폐소공포증이 씻은 듯이 나았다.
좀 전에 칭찬받았을 때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세로토닌이 흘러나와서 뇌를 적시는 이 기분. 노부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도 세로토닌의 물결에 씻겨 사라져 버렸다.
내가 너무 좋아하자 목선후가 커다란 금반지를 하나 골라 내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가운데 손가락에 끼웠는데도 조금 크다.
반지가 끼워진 내 손가락을 보다가 얼굴을 들었다.
우리의 시선이 얽혔다. 저 아름답고 긴 눈매에 어린 반짝임. 반듯하고 높은 콧날 아래 모양 좋은 입술. 어떻게 남자가 저렇게 멋진 입술을 가지고 있지? 내 입안에 침이 고였다.
목선후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내 뺨을 쓸었다. 간지러워서 얼굴을 돌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시선을 돌리면 이 마법의 순간이 깨질 것 같아서.
어느새 숨도 멈추고 있었다.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때 고개를 숙인 목선후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상가에 다 왔을 거요.”
그러고는 내 머리에 꽂힌 산호 뒤꽂이를 살며시 빼서 비단 상자에 넣었다.
“잊지 마시오. 안용, 이 물건들은 누구도 봐서는 안 되오.”
헐, 온몸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너무 힘이 빠지니 눈꺼풀을 들기도 힘들었다. 반쯤 내리뜬 눈으로 비단 상자를 닫는 목선후의 긴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목선후, 너도 잊지 마. 언젠가는 네가 사정하며 매달리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원한을 하루 이상 기억하지 않는 쿨한 성격의 나지만 목선후의 경우는 예외다. 반지를 빼서 상자에 넣으며 속으로 투덜댔다.
키스 한 번 하기가 뭐 이리 힘드냐.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발아래는 드라이아이스를 깔고 카메라 워크는 빙빙 돌고. 뭐 그래야 해 줄 거냐고!
***
안씨네 포목점 안.
점주의 딸 민아를 빼고 모든 사람들이 목선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안안용의 남편을 처음 본 것이다.
얼굴도 저세상 미남인 목선후는 키도 훌쩍 크고 가슴도 탄탄해서 보고 있으면 저절로 경탄이 흘러나왔다.
그래서인지 평생 사람 체형만 보며 옷을 만들던 포목점 사람들의 눈이 개구리처럼 튀어나오려 했다.
슈퍼모델을 보고 영감을 떠올린 디자이너의 눈빛을 여기서 보다니.
“민아, 너와 아버지가 만든 등을 보여 줄래?”
탁자에 앉아서 차를 훌훌 마시며 민아를 불렀다. 오늘 민아는 지난번보다 깨끗하고 예쁜 옷을 입고 머리에도 작은 진주 장식을 꽂았다.
도도한 터키쉬 앙고라 고양이 같은 여자아이를 보니 안씨 집안의 비글들이 더 한심해졌다.
첫째 비글이 자꾸 지각을 한다는 보고를 어제 들었다. 공부 시작한 지 겨우 한 달인데. 앞으로 삼 년을 어떻게 버틸지.
거기에 비하면 눈앞의 이 여자아이는 그냥 모든 선생들이 제자 삼고 싶은 토탈 패키지다. 머리 좋고, 예쁘고 순종적이고 게다가 열성까지 넘친다. 안씨 학당에 납치하고 싶어라.
“여기 있습니다, 아씨.”
민아가 탁자 위에 촛대를 올려놓았다. 촛대는 물이 채워진 넓은 받침이 있었다.
“불이 나는 것은 촛농이 떨어지기 때문인데 이렇게 받침을 물을 담을 수 있도록 넓고 옴팡하게 만들어 붙이면 웬만한 촛농이나 불티는 이리로 떨어질 것입니다.”
점주가 딸 대신 설명했다.
“이, 이걸 쇠줄로 천장에 매달 거예요, 아씨.”
샹들리에의 기본 틀이로군. 기특해 죽겠다.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는 것을 보니 샹들리에를 만들고 싶어졌다.
“공자님, 반짝이는 게 뭐가 있을까요? 금이나 은 같은 거 말고요. 싸고 흔해야 해요.”
철이나 동으로 동전처럼 만들어서 반짝반짝 광을 낸 다음 주렁주렁 걸어 볼까? 그런데 별로 기대하지 않고 던진 내 질문에 목선후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바로 대답했다.
“북쪽 광산에서 수정이 많이 나오. 질이 나쁜 수정은 값도 비싸지 않다오.”
“바로 그거예요. 종이와 붓을 가져와 보세요.”
민아가 허락도 받지 않고 부점주의 책상에서 종이와 붓과 벼루를 가져왔다.
나는 간단한 샹들리에를 그렸다. 디테일은 모르고, 안다 하더라도 시대가 다르니 만드는 방법도 다를 것이다. 아이디어는 내가 제공해도 만드는 사람은 이 시대 사람이니까 믿고 맡기는 게 좋다.
“수정을 깎아서 이렇게 주변에 늘어뜨리면 촛불에 반사되어서 더 밝아질 거야. 민아야, 촛대 만드는 아저씨들이랑 상의해서 만들어 봐. 할 수 있지?”
“네, 아씨.”
종이를 들여다보는 어른들은 저게 될까? 라는 의심의 표정이지만 민아만은 의욕에 불타는 눈빛으로 내가 그린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잘 안 돼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해. 산법도 열심히 공부하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점주에게 말했다.
“필요한 물건은 모두 사고 장부에 달아놓으세요. 돈 아끼지 마시고요. 민아 간식도 많이 사 주세요. 내가 사 주는 거니까 맛있는 걸로 사야 해요.”
며칠 사이에 나에 대한 태도가 백팔십도 바뀐 점주가 두 손을 비비며 열렬히 대답했다.
“네, 아씨.”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짓고 포목점을 나오려는데 부점주가 다가왔다.
“아씨, 새로 들어온 비단이 있는데 공자님께 너무 어울릴 듯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부점주, 당신은 장사의 신이오. 비록 팔 등급이지만.
“가져와 보세요. 배고프니 간식도 좀 사오세요. 여기 직원들도 먹게 넉넉하게 사오세요.”
떨떠름한 표정의 목선후에게 생글생글 웃어 주었다. 오 여사님이 나를 꾸미는 즐거움을 나도 맛볼 때가 왔다.
이 남자에게 디자이너 슈트를 입히고 머리에 젤을 발라 올백으로 넘긴 뒤 런웨이를 걷게 하면 정말 근사할 텐데.
내가 남편을 인형처럼 마음대로 꾸밀 몽상에 빠져 있을 때 가게 입구 쪽에서 왁자지껄 큰소리가 났다. 젊지만 사나운 음성이 가게 안쪽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점주 나와! 빨리 안 나와? 오늘 내가 이놈의 가게를 확 불태워 버리고 말 거야. 두고 봐.”